진 폴 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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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Paul Getty(1892년 12월 15일 ~ 1976년 6월 6일)
미국의 석유 재벌이자 게티 재단의 설립자이다.
1892년 미니애폴리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 때에 미국으로 이민온 북아일랜드 출신의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믿던 집안이었다. 부모대에 감리교를 믿기 시작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였고 철저히 금주했으며 게티도 엄한 감리교의 교육 방식대로 자라났다.[1]
1903년 경에 변호사로 성공해 보험업으로 재산을 쌓은 그의 아버지 조지 게티가 석유붐을 맞이하여 오클라호마주로 이사를 갔고 진 폴 게티도 UC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아버지를 도와 사업에 참여하여 23세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 부호로 성장했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 스페인어,러시아어,그리스어에 능통했고 아랍어와 라틴어도 익혔으며 인문학적 지식이 많아 고전 예술을 좋아했다.
이후 게티석유를 세워 석유사업에 인생을 걸어 사업을 성장시켰고 대공황때에는 전직원을 해고시켰다가 싸게 재고용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사업을 하면서 나치와 친하게 지내기도 해 FBI의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으로 이주해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쿠웨이트의 유전 개발권을 얻고 이후 부동산 투자와 호텔 사업에도 투자해 1956년경 포춘지에서 세계제일의 부자로 선정했다.
이때 진 폴 게티의 일화가 재밌는데 1949년 사우디 국왕 이븐 사우드에게 석유가 나오지 않는 곳의 황량한 땅을 천만달러나 현금으로 주고 개발권을 얻었다. 3년동안이나 석유가 나오지 않아 실패한 투자라고 사람들이 말했으나 4년째에 석유가 터저나오면서 1년에 1600만 배럴을 생산했고 진 폴 게티는 막대한 부자가 됐다. 그는 중동투자를 위해 아랍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중동 왕족들이나 권력자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또 중동전쟁때 석유가격이 올라 그는 떼돈을 벌었다.
미술품에 애호가 많아 게티 재단을 설립하고 미술관, 박물관 등을 운영했으며 그리스-로마 양식의 건축물에도 관심이 많아 거대한 그리스-로마풍의 게티 빌라를 지어 각종 유물들을 보관했다.
이후 1976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재산은 사망당시 60억 달러이며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70억 달러(약 31조원)에 육박한다.
사후 유족에 의해 재산 분쟁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재산이 상속된 재단 싸움으로 또 진통을 겪었다. 게티석유는 유족에 의해 텍사코(쉐브론 계열)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12년에 파산하여 지금은 이름만 남은 상황이다. 게티 재단은 아직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LA에 미술관 게티 센터와 게티 빌라를 운영하고 있다. 게티의 손자 중 한명인 마크 게티가 세운 게티이미지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사진 제공 업체가 되었다.
1973년 당시 16세의 손자 존 폴 게티 3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악명 높은 마피아 은드랑게타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1700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납치범들에게 맞서 처음엔 진 폴 게티는 손자가 할아버지한테서 돈을 뜯어낼려고 하는 자작극인 줄 알고 미온적으로 반응했다. 또 만약 테러범, 납치범한테 돈을 주면 그들의 기를 살려줘 더 많은 유괴 피해와 나머지 13명의 손자들도 납치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제대로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납치범들은 2번째 요구사항을 쓴 편지를 또 보냈으나 하필이면 이탈리아 우편 파업 때문에 제때에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은드랑게타가 귀를 잘라서 보내고 몸값을 320만 달러로 줄였다. 진 폴 게티는 협상에 응하면서도 끝끝내 몸값을 깎아내고 300만 달러까지 깎았다. 그 돈도 소득공제 한도인 220만 달러만 주고 나머지는 아들 존 폴 게티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주었다.[2]
손자 존 폴 게티 3세는 다행히 목숨을 건저 풀려나와 치료와 귀 재건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과 납치 후유증으로 알코올,마약 중독에 빠져 부작용으로 1981년 뇌경색이 와 폐인이 되버렸다. 장애를 얻어 목소리도 안나오고 시력도 마비되었으며 필사의 재활 끝에 어느정도 회복은 됐으나 결국 건강을 해쳐 2011년 54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자식으로 로스트 하이웨이에 출연했던 배우 발타자 게티가 있다.
납치범 일당들 9명은 대대적인 수사로 체포되었으나 그 중 2명만 유죄판결이 나서 감옥으로 갔고 나머지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몸값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진 폴 게티는 어찌보면 코믹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했고 악명높을 정도로 자린고비로 유명했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1. 개요
Jean Paul Getty(1892년 12월 15일 ~ 1976년 6월 6일)
미국의 석유 재벌이자 게티 재단의 설립자이다.
2. 생애
1892년 미니애폴리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 때에 미국으로 이민온 북아일랜드 출신의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믿던 집안이었다. 부모대에 감리교를 믿기 시작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였고 철저히 금주했으며 게티도 엄한 감리교의 교육 방식대로 자라났다.[1]
1903년 경에 변호사로 성공해 보험업으로 재산을 쌓은 그의 아버지 조지 게티가 석유붐을 맞이하여 오클라호마주로 이사를 갔고 진 폴 게티도 UC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아버지를 도와 사업에 참여하여 23세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 부호로 성장했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 스페인어,러시아어,그리스어에 능통했고 아랍어와 라틴어도 익혔으며 인문학적 지식이 많아 고전 예술을 좋아했다.
이후 게티석유를 세워 석유사업에 인생을 걸어 사업을 성장시켰고 대공황때에는 전직원을 해고시켰다가 싸게 재고용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사업을 하면서 나치와 친하게 지내기도 해 FBI의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으로 이주해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쿠웨이트의 유전 개발권을 얻고 이후 부동산 투자와 호텔 사업에도 투자해 1956년경 포춘지에서 세계제일의 부자로 선정했다.
이때 진 폴 게티의 일화가 재밌는데 1949년 사우디 국왕 이븐 사우드에게 석유가 나오지 않는 곳의 황량한 땅을 천만달러나 현금으로 주고 개발권을 얻었다. 3년동안이나 석유가 나오지 않아 실패한 투자라고 사람들이 말했으나 4년째에 석유가 터저나오면서 1년에 1600만 배럴을 생산했고 진 폴 게티는 막대한 부자가 됐다. 그는 중동투자를 위해 아랍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중동 왕족들이나 권력자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또 중동전쟁때 석유가격이 올라 그는 떼돈을 벌었다.
미술품에 애호가 많아 게티 재단을 설립하고 미술관, 박물관 등을 운영했으며 그리스-로마 양식의 건축물에도 관심이 많아 거대한 그리스-로마풍의 게티 빌라를 지어 각종 유물들을 보관했다.
이후 1976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재산은 사망당시 60억 달러이며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70억 달러(약 31조원)에 육박한다.
사후 유족에 의해 재산 분쟁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재산이 상속된 재단 싸움으로 또 진통을 겪었다. 게티석유는 유족에 의해 텍사코(쉐브론 계열)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12년에 파산하여 지금은 이름만 남은 상황이다. 게티 재단은 아직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LA에 미술관 게티 센터와 게티 빌라를 운영하고 있다. 게티의 손자 중 한명인 마크 게티가 세운 게티이미지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사진 제공 업체가 되었다.
3. 일화
3.1. 손자의 납치
1973년 당시 16세의 손자 존 폴 게티 3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악명 높은 마피아 은드랑게타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1700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납치범들에게 맞서 처음엔 진 폴 게티는 손자가 할아버지한테서 돈을 뜯어낼려고 하는 자작극인 줄 알고 미온적으로 반응했다. 또 만약 테러범, 납치범한테 돈을 주면 그들의 기를 살려줘 더 많은 유괴 피해와 나머지 13명의 손자들도 납치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제대로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납치범들은 2번째 요구사항을 쓴 편지를 또 보냈으나 하필이면 이탈리아 우편 파업 때문에 제때에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은드랑게타가 귀를 잘라서 보내고 몸값을 320만 달러로 줄였다. 진 폴 게티는 협상에 응하면서도 끝끝내 몸값을 깎아내고 300만 달러까지 깎았다. 그 돈도 소득공제 한도인 220만 달러만 주고 나머지는 아들 존 폴 게티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주었다.[2]
손자 존 폴 게티 3세는 다행히 목숨을 건저 풀려나와 치료와 귀 재건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과 납치 후유증으로 알코올,마약 중독에 빠져 부작용으로 1981년 뇌경색이 와 폐인이 되버렸다. 장애를 얻어 목소리도 안나오고 시력도 마비되었으며 필사의 재활 끝에 어느정도 회복은 됐으나 결국 건강을 해쳐 2011년 54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자식으로 로스트 하이웨이에 출연했던 배우 발타자 게티가 있다.
납치범 일당들 9명은 대대적인 수사로 체포되었으나 그 중 2명만 유죄판결이 나서 감옥으로 갔고 나머지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몸값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3.2. 악명높은 자린고비
진 폴 게티는 어찌보면 코믹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했고 악명높을 정도로 자린고비로 유명했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 호텔의 세탁서비스로 나가는 돈이 너무 아까워서 궁색맞게도 화장실에서 세탁물을 자기가 직접 손빨래를 해서 빨았다.
- 문구류를 여러번 재활용하고 메모지도 앞면 쓰고, 뒤짚어 쓰고, 조금의 여백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썼다.
- 류마티스로 아파하는 친구에게 좋은 약이 있다고 하고 튜브 끝까지 짜낼정도로 거의 다 써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연고를 선물로 줬다.
- 가장 악명 높은 건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전화를 걸어서 전화비가 많이 나오자 화를 내며 전화마다 자물쇠를 건 뒤 밖에다가 공중전화 부스를 만들어 거길 쓰도록 했다. 물론 요금은 손님 부담이었다.
- 옷을 낡아서 떨어질때까지 입는 건 기본이고 10년 이상 새옷은 신발과 넥타이 정도 밖에 사지 않았고 셔츠의 팔이 떨어질 정도가 되자 새옷을 사는게 아니고 다듬고 덧붙여서 다시 재활용해 입었다.
- 손자의 납치사건에도 돈을 낼려고 하지 않아 냉혈한이라고 욕을 무지하게 먹었다. 그 낸 몸값을 이용해 세금 공제를 시도했다.
- 영국의 대저택인 서튼 맨션은 원래 5대 서덜랜드 공작이 쓰던 건물이었는데 진 폴 게티는 40년전 공작이 산 가격의 절반으로 매입했다. 서튼으로 이주한것도 런던에 비해서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 미술품 애호가였으나 어떻게든 미술품을 최대한 깎을려고 여러번 흥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 친구 5명과 런던의 도그쇼에 갔는데 1인당 5실링의 전체 가격을 지불하지 않을려고 일부러 블록을 10분 정도 돌아다니게 한 뒤 오후 5시에 도그쇼가 열려서 가격이 반값이 되자 그때 입장했다.
- 마지막이자 다섯번째 부인의 아들이 말기병에 걸리자 희망도 없는데 돈이 너무 많이 나간다며 그녀를 꾸짖었다. 결국 막내아들은 뇌종양으로 눈이 멀어서 1958년 12살에 사망했고 그 해에 부인은 게티와 이혼했다.
- 1960년 진 폴 게티는 새로 구입한 서튼 플레이스에서 집들이 파티를 열었는데 16대 노포크 공작과 여러 명사들을 초대해 놓고도 담배도 제공하지 않고 휴대용 화장실을 밖에서 사용하라고 하여 모두들 게티의 인색함에 진절머리를 냈다. 초대 받지 않는 손님들까지 몰려 홀에 2만 파운드의 피해를 냈고 귀중한 물병도 도난 당했다가 반환되었다. 이러한 엉망진창 파티에 게티는 조롱거리가 됐다. 그 후 그는 다시는 파티를 열지 않았다.
4. 여담
- 손자 납치사건이 영화 올 더 머니로 다뤄졌다.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연기했는데, 생전 진 폴 게티를 파티장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 보수적인 신앙을 가져온 부모와 달리 바람둥이에 난잡한 사생활을 즐겼다. 사생아도 있었고 공식적으로 5번 결혼하고 모두 이혼했으며 4명의 아내에게서 다섯명의 아들을 두었다.
- 유튜브에 그의 인터뷰 영상이나 저택에서 찍은 동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 여러 일화를 남긴 만큼 어록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들로 아래와 같은 말들이 있다.
>돈을 셀 수 있으면, 당신은 부자가 아니오.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경험은 최악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은행에 100달러를 빚젔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입니다. 은행에 1억 달러를 빚젔다면 그건 은행의 문제입니다.
>성공을 위한 공식은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일하고, 석유를 뿌리는 것입니다.
>석유는 야생동물과 같다. 누구든 잡기만 하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팔때 나는 산다.
>나는 실패하는 것이 싫다. 나는 내 결혼의 실패를 후회하고 미워한다. 나는 단 한번의 지속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기꺼이 수백만 달러를 기부할 것이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