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린고비
玼吝考妣[1]
1. 개요
한국의 대표적인 구두쇠, 혹은 구두쇠의 대명사.
2. 유래
자린고비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유명한 가설로는 충주군 금목면 삼봉리(現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2][3]#에 살았다고 해서 일명 '충주 자린고비'라 불리는 실존인물인 조륵(趙玏, 1649~1714)이 모델이라는 설이다. 그가 평생 동안 구두쇠짓을 해서 모은 돈으로 가뭄에 시달리던 1만 호의 백성들을 구하자 그 지역 주민들이 감동하여 조륵 사후에 '자인고비(慈仁考碑, 어버이같이 인자한 사람을 위한 비석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비를 세운 데에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또 이를 우연히 지나가던 암행어사[4] 가 보고 그의 선행에 크게 감동하여 포상을 하려고 하자 오히려 화를 내면서 그렇게 쓸데없이 돈을 쓸 바에는 차라리 그 포상할 돈으로 제방 등을 튼튼히 만들라고 하며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자세한 내용
또 다른 설로는, 위 글에도 소개되어있듯이 부모 제사 때 쓰는 지방을 한 번 쓰고 태워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고비(考妣 - 부모)를 절여 놓고 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절인 고비'가 음운변화를 거쳐 자린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잘은 꼽재기'가 변해서 자린고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잘은'은 말 그대로 '잘다(작다)'는 뜻이고 '꼽재기'는 '아주 보잘것없고 작은 사물'을 일컫는 말로 아니꼬울만큼 잘고 인색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재령 꼽재기', '달래(충주 달래강) 꼽재기', '이천 천지 곱재기', '달랑 꼽재기' 등이 있었다.
윤승운의 만화에서는 성이 고씨요 이름이 비였다고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는 다른 문헌에서는 확인할 수 없어 신빙성이 낮다. 구두쇠가 조륵 한명만은 아니었을테니 여러 사람의 일화와 별명이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통합되어 자린고비로 변했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3. 에피소드
그야말로 지독한 구두쇠인지라 식사 때는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놓은 후 밥 한 술에 굴비 한번 쳐다보기라는 괴이한 식사법을 애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며. 아울러 나오는 추임새 또한 유명하다. '''"어이 짜다~."''' 이 때문에 자린고비가 '절인 굴비'에서 따왔다는 설이 대중적으로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심지어 아들이 굴비를 두번 쳐다보자 굴비가 짜지도 않느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한때는 큰 아들이 굴비를 두 번 쳐다보자 작은 아들이 '형이 두 번 쳐다 봤어요'라고 말하니까 자린고비가 '놔둬라, 오늘 형 생일이잖니'라고 말했다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또 한 일화로는 뒷마당에 있는 된장독의 뚜껑을 열어 놓았더니 파리가 그 위에 살짝 앉았다가 날아가는데 그 '''파리 다리에 묻은 된장을 보고''' 아까워서 수십 리를 날아가는 파리를 쫓아가서 된장을 빨아먹고 놓아 주었다고 한다. 김삼이 그린 만화에는 파리를 놓아주기 전에 다시는 우리집 장독에 얼씬도 말라고 엄포를 놓는데, 이후 자린고비 집의 장독에는 파리가 한 마리도 꼬이지 않았다는 내용은 자린고비의 근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를 보다못한 동네사람들이 자린고비를 놀려주기 위해 집에다가 새우젓을 몰래 가져다놨는데 자린고비는 "집에 밥도둑을 들이다니 집안 망하게 할 일 있느냐" 면서 바로 집어던졌다고... 위의 굴비 이야기도 생선장수가 굴비 한마리를 그냥 담 너머로 몰래 던져주었는데, 어디서 밥도둑을 함부로 넘겨주냐면서 다시 던져버리자, 공짜로 주는 것이니 그냥 받으라고 다시 던져주고 나서야 겨우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는 김에 자린고비 '일가'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자면, 정상인 며느리가 자린고비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며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고기장수가 오자 며느리는 고기를 한참 주물럭대다가 그 손 씻은 물로 고깃국을 끓였다. 이때 시어머니는 "아가, 오늘 국물에는 고기 냄새가 나는구나" 라는 말했는데, 이 때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칭찬을 받을 줄 알고 자신있게 자기가 한 일을 말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시어머니의 대답은 그 손을 장독에다 씻었으면 더 많은 국물을 우려낼 수 있었다는 것. 이에 자린고비는 쯧쯧 혀를 차면서 그 손을 우물에다 씻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평생 고깃국을 먹었을 거라고 말한다. 결국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시던 국물을 우물에 쏟으라는 엔딩.
때로 이 며느리가 자린고비보다 한 수 위의 구두쇠로 등장하기도 한다. 모든 음식을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내놓는데 간장만은 종지 한 가득 내놓는 모습에 자린고비가 한마디 하자, 그렇게 해야 보기만 해도 짜서 오히려 덜 먹게 되고, 또한 숟가락으로 종지를 긁어 숟가락과 종지가 닳는 일이 없다는 대답을 해서 오히려 자린고비가 놀라며 칭찬했다고. 또 한 번은 며느리가 떡을 해오자 자린고비는 온갖 욕을 다하는데 여기서 며느리는 떡을 하면 부피도 늘고 오히려 단맛이 있어 반찬이 필요없다는 말을 하여 자린고비가 크게 감탄해 그날부터 자린고비네는 매일 떡을 해먹었다는 말도 있다.
언젠가는 이 자린고비와 옆집, 혹은 다른 지방에 사는 또다른 구두쇠[5] 가 경쟁에 붙었는데, 여름에 부채 부치는 방법에 대해서였다. 옆집 구두쇠는 한번에 한 살만 펼쳐(쥘부채 형태) 부쳐 다 떨어질 때까지 쓴다고 자랑했더니, 본가 자린고비는 부채를 촥 펼쳐놓고 '''얼굴을 흔드는''' 방법을 쓴다고 해서 옆집은 데꿀멍. 어째 더 더울 거 같다.[6] 또한 그날 밤에 구두쇠와 자린고비가 함께 잠을 자는데 문풍지에 뚫린 구멍으로 외풍이 들어와 잠을 잘 수 없어서 구두쇠는 가지고 있던 종이조각에 저녁 먹고 남은 밥풀을 붙여 문풍지를 때워놓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 구두쇠가 집으로 돌아갈 때 종이조각은 자기 것이라고 떼어가겠다고 하자 자린고비는 밥풀은 우리집 것이라고 하며 밥풀을 박박 긁어내고 종이만 들려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7]
어쨌든 현재는 쓸데없는 것에 눈을 뒤집고 절약정신을 외치는 괴짜들을 비꼴 때 쓰는 말이 됐다.
참고로 오직 부정적인 묘사만 있는 놀부와 달리 이쪽은 민담에서 긍정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초에 비교 자체가 실례인 것이 놀부는 부친의 유산을 독차지해서 졸부가 됐지만 자린고비 이 사람은 정당하게 자수성가 한 사람이다. 다만 위에서 봤듯이 온갖 엽기적인 방법으로 구두쇠 짓을 해서 식솔들은 고통 받았을 테니 식솔들 기준으로만 본다면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어느 날 솔개가 병아리 한 마리를 물어가자 "지금까지 내가 거지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인가를 허투로 잃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잃는 것이 생겼으니 나의 재복도 다했구나."라고 하면서 전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서 임종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8] 혹은 위의 조륵 이야기처럼, 평생 지독한 구두쇠로 지내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평판이 안 좋았는데 가뭄 등 재해가 닥치자 그동안 아끼고 아껴 모으던 재산을 탈탈 털어 도와줘서 사람들이 크게 감동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위에 이야기중, 된장(또는 간장)독에 앉은 파리를 쫓은 건 '''또다른''' 구두쇠인 이천시의 천지곱재기란 인물의 얘기라고 한다. 그 또한 자린고비 못지 않은 구두쇠였다고... 장독에 앉은 파리 다리에 묻은 된장이 아까워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가지고 '파리'를 붙잡아 그 다리를 씻으려고 쫓아가다가 용인땅 어느 개울가에서 그만 파리를 놓쳐 버렸는데 이 놈의 파리가 이리 갔나 저리 갔나 하고 어정거렸다고 해서 이곳 지명을 '어정개'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9]
구두쇠가 된 사연이 불쌍하게 시작하는 구전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가 죽은 뒤 고아가 되어 빌어먹으며 자라다 어느 마음씨 좋은 부자댁 머슴으로 일을 하며 풀칠하게 되었을 무렵, 심부름 도중에 길에서 우연히 계란 하나를 줍게 되고 그것을 키워서 닭으로 키웠는데 모조리 암탉이었고 암탉이 낳은 계란을 팔아 땅을 샀더니 모조리 옥토였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돈이 들어와서 결국에는 갑부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고생을 잊지 않고자 구두쇠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어사가 이곳에서 하룻밤 지내게 되었을 때 하인이 솔개가 병아리 한마리를 채갔다고 알리자 자신의 운명도 이제 다 했다며 한탄한 뒤 어사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한 다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일생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어사의 도움을 받아 보시를 한 덕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아들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남은 재산들은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아들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살라 유언한 뒤 세상을 떠난다. 전설의 고향에서는 이 이야기를 각색하여 아들에게는 땡전 한 푼 물려주지 않고 모두 보시한 다음 유산은 어사에게 맡겨 두었다고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친다. 이 어사가 팔도를 순시하다가 충주의 한 주막에서 밥을 먹는데 한 거지가 와서 밥을 얻어먹었다. 그 거지가 자린고비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어사는 유산은 이것이라며 아들에게 암탉 한 마리를 사주었다. 아들이 암탉을 품에 안고 어루만지는 것으로 화면이 끝나며, 그 암탉의 의미를 깨달아 아들도 자수성가 부자가 됐다는 후일담이 내레이션으로 나왔다.
4. 기타
- 박완서가 자린고비를 소재로 한 '굴비 한번 쳐다보고'라는 동화를 썼다. 자린고비에게 3명의 아들이 있었고, 아버지처럼 짠 굴비를 보는 것을 반찬 삼아서 맨밥만 먹으며 살아온 세 아들은 장성해서 장남은 농부, 차남은 소리꾼, 막내는 화공이 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이에 왜 이럴까 하고 고민하던 삼형제는 마을의 지혜로운 노인을 찾아가 해답을 찾는 이야기.
[1] 옥티 '''자''', 아낄 '''린''', 상고할 '''고''', 죽은어미 '''비'''[2] 금왕읍은 본디 조선시대 충주군 금목면(金目面)과 법왕면(法旺面)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대한제국 때인 1906년에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일제강점기 초인 1914년에 합병되어 금왕면이 되었다. 음성군은 원래 굉장히 좁은 동네였다.[3] 이 곳은 현재도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2002년 이 마을에 사는 그의 10세손이 '자린고비 표창'을 받기도 했다.[4] 박문수라고도 하지만 조륵은 박문수가 겨우 24살 때 사망했기 때문에 아니다.[5] 이름이 '토목공이'라고 한다. 토목공이가 자린고비와의 구두쇠 승부에서 지자 서로의 자식들을 결혼시켰는데, 위의 며느리가 토목공이의 딸. 결코 정상인은 아니다.[6] 판본에 따라서 오히려 자린고비는 반을 펼쳐서 쓰고 옆집은 고개를 흔드는 경우도 있다.[7] 다른 구두쇠가 "나는 짚신이 닳는 게 아까워 버선발로 돌아다닌다"고 하자 자린고비가 "그럼 버선이 닳지 않는가, 나는 맨발로 다닌다"고 했다고도 한다. [8] 이 에피소드는 소설 '상도'에서도 쓰였는데, 이 사건 이후로 임상옥이 사재를 털기 시작했다.[9] 용인시 어정에서 구성으로 넘어가는 아차지고개가 어정개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