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백제)

 

眞老
? ~ 497년

1. 소개
2. 생애


1. 소개


백제의 귀족이자, 삼근왕, 동성왕 대의 대신. 백제의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였던 진씨 출신.

2. 생애


진로는 본래 백제의 16관등 중 4등급인 덕솔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큰 권력을 휘두르던 좌평 해구문주왕과 대립하다가 477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유숙하던 틈을 타서 그를 붙잡아 시해하고는 곧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문주왕의 아들로서 뒤를 이어 즉위한 삼근왕은 세력이 미약하고 나이도 어려서 해구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문주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차지한 해구는 급기야 478년 정월 은솔 연신 등의 무리와 더불어 대두성에 웅거하여 모반을 일으켰는데 이때 삼근왕은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1]

처음에 좌평 진남이 왕명을 받들어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쳤으나 패배하여 진로는 정예병 500명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무찔러 결국 그 수괴인 해구의 목숨을 빼앗았다. 해구와 함께 모반했던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으나 진로는 그 처자를 잡아 웅진의 저잣거리로 끌어내 참수해버렸다. 이듬해인 479년에 삼근왕이 승하하고 동성왕이 즉위하였다.[2]

482년 정월에 동성왕은 진로를 병관좌평으로 삼아 나라 안팎의 군사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진로는 497년 5월에 죽었는데 이에 동성왕은 달솔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비록 진로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2천 명의 군사로도 이기지 못한 적을 500명의 정예병으로 공격해 무찌른 점으로 보아 군사적 능력은 꽤 준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해씨 세력의 모반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최고위직인 좌평의 자리에까지 올라 군사업무를 총괄했다는 점으로 볼 때 당시 백제의 핵심 권력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1] 이는 당시 백제의 귀족세력이었던 해씨와 왕족인 부여씨, 진씨 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생긴 일로 추측된다.[2] 일설에는 삼근왕의 승하에 개입했다고도 한다. 하긴 해구의 반란이 평정된 지 얼마 안돼서 승하했기에 자연사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