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근왕

 


'''백제 제23대 건길지'''
'''三斤王 | 삼근왕'''
'''시호'''
삼근왕(三斤王)
'''성씨'''
부여(扶餘)
''''''
삼근(三斤) · 임걸(壬乞) / 삼걸(三乞)[1] / 문근(文斤)[2] / [3]
'''부왕'''
문주왕(文周王)
'''생몰연도'''
음력
464년[4] ~ 479년 11월 (14-15세)
'''재위기간'''
음력
477년 9월 ~ 479년 11월 (3년)
1. 개요
2. 생애
3.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백제의 제23대 국왕이자 건길지.

三斤王【或云壬乞】文周王之長子

삼근왕은【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

삼근(三斤)을 임걸(壬乞)로 쓰는걸 봐선, 三을 훈독인 미(み)로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5]. 《일본서기》에는 문근왕(文斤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좌우지간 斤은 순우리말 '''큰'''의 음차로 보인다.

2. 생애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후 웅진성으로 도망쳐오듯 천도하여 왕실의 권위가 약해진 상태에서 문주왕해구에게 시해당한 뒤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탓에 해구에게 휘둘려 주체적인 국정 운영을 하지 못했다. 중요한 정사는 모두 좌평 해구가 처리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478년 봄에 해구가 신흥 세력인 은솔 연신(燕信)과 손을 잡고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명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명으로 해구를 공격하여 해구를 죽여버리고 아버지의 앙갚음을 한다. 한편 해구에 동조했던 은솔 연신은 고구려로 도주했는데 그의 처자식을 체포하여 웅진성의 저잣거리에서 처형시켰다.
기록의 부실로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해구가 백제 내에서 실질적으로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였음을 감안하면 삼근왕이 진씨 등 다른 세력들과 함께 해구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어 사지로 내몰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삼근왕의 나이가 14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유력 세력들과의 연대를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정치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479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 별다른 업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여러모로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왕.
재위 3년인 479년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했고 479년 11월 갑작스레 승하했는데 해씨 세력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움켜쥔 진씨 세력의 정변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삼근왕의 뒤를 이은 동성왕이 유년의 나이었다고 하니 진씨 세력이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보이던 삼근왕 대신 자신들이 주무르기 쉬운 어린 왕족인 동성왕을 왕위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유랴쿠 덴노 23년(479년) 여름 4월, '''백제(百濟)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왕이 곤지왕(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6]

그리고 병기(兵器)를 주고 아울러 츠쿠시국(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東城王)이 되었다.

이 해 백제(百濟)에서 바친 조부(調賦, 공물)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츠쿠시(筑紫)의 아치노오미(安致臣)· 우마카히노오미(馬飼臣)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高麗)를 쳤다.

'''《일본서기》'''

이후 백제에서는 다시 진씨 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였는데 구심점이 해구를 토벌한 진로(眞老)다. 진로가 삼근왕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얽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국정 혼란이 계속되면서 근초고왕 대에 복속시켰던 호남 지역의 동부 일부를 대가야가 잠식하고 섬진강 유역을 장악해 479년에는 가야가 백제 땅을 통하지 않고 중국과 통교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악재가 계속됐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삼근왕 본기'''
一年秋九月 삼근왕이 즉위하다
二年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다
三年秋九月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기다
三年冬十一月 삼근왕이 죽다
아버지도 재위 기간이 3년이었는데 아들도 재위 기간이 3년밖에 안 된다. 역시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1]삼국유사》.[2]일본서기》.[3] 오우치씨 족보. 그러나 삼근(三斤)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4] 즉위 당시 13세였다는 기록으로 역산한 생년.[5] '''임'''나('''任'''那)는 '''미마'''나('''みま'''な, '''彌摩'''那)로 읽는다. 그대로 대입하면 삼근은 '''미큰''', 임걸은 '''미마큰'''.[6] 일본서기인만큼 걸러 들어야 한다. 애초에 일본이 세계 제일의 나라고 중국도 자기들 밑에 있다고 기술한 역사서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