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

 


'''백제 제22대 건길지'''
'''文周王 | 문주왕'''
'''시호'''
문주왕(文周王)
'''관등'''
상좌평(上佐平)[1]
'''직위'''
보국장군(輔國將軍)
'''성씨'''
부여(扶餘)
''''''
문주(文周) / 문주(汶洲)[2] / 문명(文明)[3] / 모도(牟都)[4] / 도(都)[5] / [6] / [7]
'''왕자'''
부여삼근(扶餘三斤)
'''부왕'''
개로왕(蓋鹵王)[8] / '''비유왕(毗有王)'''[9]
'''생몰연도'''
음력
? ~ 477년 9월
'''재위 기간'''
음력
475년 음력 9월 ~ 477년 9월 (3년)
1. 소개
2. 생애
2.1. 태자/태제 시절
2.2. 웅진으로의 천도
2.3. 시해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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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백제의 제22대 국왕이자 건길지.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래도 백제신찬을 비롯한 백제계 사서를 직접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 측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10]

2. 생애



2.1. 태자/태제 시절


457년, 중국 남조에 보낸 서신에서는 성명이 모도(牟都) 혹은 여도(餘都)[11]로 나타난다. 이미 개로왕 시기 때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개로왕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보국장군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상좌평을 역임했었다.
성품이 부드러웠지만 우유부단했다고 한다. 백제 최대의 국난을 수습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맡은 왕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은 성품을 소유한 듯하다. 그래도 인간됨은 선했는지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라고 한다.

2.2. 웅진으로의 천도



고구려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꾸준히 밀어붙이고 있었고 백제는 신라나제동맹을 맺어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475년 고구려가 한성으로 크게 쳐들어오자 개로왕은 최악의 상황을 예감하고 태자 문주를 신라에 보내 자비 마립간에게 가서 1만 구원병을 얻어오라고 보낸다. 그러나 문주왕과 신라 구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백제는 한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과 일족은 살해당했으며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일본서기에서는 이때 백제를 '망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한성 백제의 멸망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쓰고 있다.
신라의 지원군을 이끌고 북상하던 도중에 한성 함락 소식을 들은 문주는 그길로 남하하여 475년 10월 금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요새인 금강 곰나루터(웅진성, 지금의 공주시)에 방어 성곽을 구축하여 새 도읍으로 정하고 왕에 즉위한 후 즉각적인 항전 태세에 돌입했다. 늦게나마 백제 지방 귀족들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힘을 보탰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일단 개로왕이 문주를 후계자로 확실하게 선언해놓았기 때문에 백제의 고질병이던 왕위 다툼은 벌어지지 않았다[12]. 476년 2월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아직 고구려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한강 이북 백성들은 남쪽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3월에는 바다 건너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구려의 방해로 못 가고 되돌아왔다. 4월에는 탐라국조공을 바쳐오자 문주왕이 기뻐했다.
한성을 함락한 장수왕은 남진을 계속하여 성남, 용인, 안성, 진천을 지나 세종시에 남성골산성, 대전에 월평산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며 웅진성을 포위해 압박했다. 그러나 북방의 침략 등을 우려해 돌아가고 말았는데 웅진성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백제의 직접적인 군사 대결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백제의 677년 역사 중 492년간 수도였던 한성을 잃은 백제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되면서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고 귀족 세력이 강성해졌다. 한성 시절부터 권세를 휘둘렀던 해씨, 진씨 세력이 강성해져 웅진 시기에는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해씨나 진씨 가문 출신의 권신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웅진 인근의 현지 지방 세력(구 마한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사씨, 연씨 등의 권력이 강성해지면서 기존의 해씨, 진씨와 함께 대성팔족이라는 최고 귀족층을 이루게 된다.

2.3. 시해


비록 문주왕이 새로운 땅에서 다시 시작하기는 했지만 475년의 큰 패전으로 인해 도망온 부여씨 왕실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지배층 내부의 갈등까지 겹쳐서 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한국사에서 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이 경우는 준비되지 않은 강제적으로 쫓긴 상황이었으므로 웅진 지역에서 기반을 갖추기 급급했다. 결국 재위 3년째 되는 해 사냥을 나가 외부에서 묵었다가 병관좌평(지금의 [국방부장관]급 직책이다. 국왕의 최측근이라는 뜻) 해구가 일으킨 반란 때 사로잡혀 끝내 시해당했다. 반란이 성공하자 해구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한 후에도 권세를 휘둘렀다. 그러다가 몰래 세력을 키우던 동성왕파의 세력이 커지자 권력 다툼을 일으켰으나 진로에 의해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한편 삼근왕 또한 반란을 진압한 직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삼근왕의 죽음에 동성왕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있다.

3. 기타


동생(으로 보이는) 부여곤지가 475년 한성 함락 이후에 일본에서 백제로 귀국하여 내신좌평에 임명된 것을 보면 전왕 개로왕처럼 왕실 인사들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둘 다 해구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13]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문주왕의 후손들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격으로 무왕의 조카로서 백제부흥운동에 중추적으로 참여했던 귀실복신, 그의 아들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14]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문주왕 본기'''
一年秋九月 문주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다
二年春二月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민가를 이주시키다
二年春三月 송에 예방이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하다
二年夏四月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다
二年秋八月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다
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三年夏四月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다
三年夏五月 흑룡이 웅진에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내신좌평 곤지가 사망하다
三年秋八月 병관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다
三年秋九月 문주왕이 죽다
탐라국(제주도)이 최초로 등장했다.

[1] 대좌평(大佐平)과 같은 관등으로 보인다.[2]일본서기》에서도 이렇게 나온다.[3]삼국유사》.[4]남제서》, 《양서》. 단 이병도는 모도가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의 다른 표기이며 문주왕과 혼동된 것이라 하였다. 한편 모도-모대가 모두 '''맏'''의 음차 표기로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혼동이 아니며 문주는 모도와 같은 뜻이 된다.[5]송서》. 모도의 축약 표기.[6] 오우치씨 족보. 문주(文周)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7] 《신찬성씨록》. 다만 문주(汶洲)의 오기로 추정된다.[8]삼국사기》.[9]일본서기》. 다만 일본서기에서 비유왕은 등장하지 않고 정확히 말하자면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0] 이기동 교수가 '中國史書(중국고서)에 보이는 百濟王牟都(백제왕 모도)에 대하여'(1974년)라는 논문에서 중국 측 기록과 《일본서기》, 《삼국사기》등을 정치하게 비교 분석하여 문주왕이 개로왕의 동생임을 고증했다라고는 하나 실제로 가장 먼저 밝힌 것은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외교역사(外交繹史)』(1915년). 또한 1974년에 가사이 와진(笠井倭人)이 이를 부연설명한 적이 있으므로 단순히 이기동의 업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어찌되었든 이후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이것을 따르고 있다.[11] 여(餘)가 성이고 이름이 도(都).[12] 백제가 위기 상황에서 고질적인 권력 투쟁을 계속했으면 명나라 멸망 직후 얼마 안 가서 완전히 멸망해버린 남명 꼴이 났을 것이다. 다만 남명도 엄연히 태자가 있었으나 북경 함락당시 실종된 것을 생각해보면 백제는 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남명은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지도자로 옹립한 홍광제가 미친 놈이어서 안 그래도 위기인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13] 다만 부여곤지의 경우 해구가 암살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사망 시기나 그 당시 정치적 위치를 근거로 부여곤지 역시 해구에 의해 암살당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14] 한편 무왕의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데 이에 대해 무왕의 조카였던 귀실복신의 존재를 들어 무왕이 본래 귀실씨였으나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 부여씨로 환원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무왕은 문주왕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