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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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백제의 제24대 임금이자 건길지. 이름은 모대(牟大), 마모(摩牟)[8] , 마제(麻帝)[9] ,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 중국 역사서와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여대(餘大)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마동(薯童) = 서동(薯童)으로 서동요의 서동이 백제 동성왕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신라의 소지 마립간이 백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10] 이 동성왕과 결혼해 결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담력이 컸고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전왕인 삼근왕과는 대조적이게 전제 군주적이라 할 정도로 주체적이고 고집있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진씨 세력의 추대로 옹립된 동성왕이다보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왕권 강화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권세를 휘두르는 진씨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금강 유역권을 지배 기반으로 삼았던 신진 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권력의 전면부에 배치시켰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세력으로 사씨, 연씨, 백씨 등 대성팔족이 있다. 다만 말년에는 대신의 간언을 무시하며 성곽, 궁실 등을 과도하게 증축하는 등 과도한 왕권 강화 및 과시를 하며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후 바닥까지 추락했던 백제의 왕권과 국제적 위치를 정상 궤도에 안착시킨 임금으로 꽤 우호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개로왕 이후 끊겨버린 중국(특히 남조)과의 관계를 되살렸고 신라의 소지 마립간에게 혼인 동맹을 제의하여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과 동성왕이 혼인하게 됨에 따라[11] 나제동맹의 결속을 굳건히 하는 등 적극적으로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2. 생애
문주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로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진씨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중국 측 사서를 신뢰하여 동성왕이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다.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동성왕이 무령왕보다 나이가 적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왜 동성왕이 먼저 임금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동성왕이 문주왕의 아들이었다고 한다면 자연스레 해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삼국사기》 등 기록의 대부분은 부여곤지의 아들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설의 근거는 빈약한 실정.
일단 기록대로 부여곤지의 아들이라면 형인 무령왕처럼 일본에서 태어났을 개연성이 농후하고 《일본서기》에서는 479년 동성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유년(幼年)의 나이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최소 10대 즈음에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씨 세력이 자신들이 주무르기 쉬운 왕손을 고르다 보니 뽑힌게 바로 동성왕이라는 해석을 해볼 수 있는 부분. 나이로 본다면 형인 무령왕이 왕이 되어야 정상이었겠지만 진씨 세력의 입장에서는 성인인 무령왕은 자기들이 제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동성왕을 옹립했다는 것. 다만 이름인 "말다"가 '맏'으로 읽힌다는 점, 무령왕이 개로왕의 후궁 소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부여곤지에게 적자는 무령왕이 아닌 동성왕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이 백제로 귀국할 때 츠쿠시국(지금의 후쿠오카)의 군사 500명으로 호위시켰다고 한다. 어쨌거나 진씨 세력이 삼근왕을 버리고[12] 동성왕을 뽑은 선택지는 '''자기들 손으로 자기들을 날려버릴 호랑이를 뽑은은 최악의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진씨 세력의 도움을 받아가며 국정을 운영하던 삼근왕을 표면에 내세우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는 상황이 되었다.
481년(동성왕 3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온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시켰는데 백제본기에는 없고 신라본기에만 기록되어 있다. 482년 9월에는 말갈이 북쪽에서 침입했으며 484년(동성왕 6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남제(南齊)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487년에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반란으로 가야가 혼란 속에 빠지자 이에 개입해 가야 연맹에 대한 세력 강화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아마 기록상으로 보았을 때 가야가 백제에 도움을 요청한 듯 보인다.
489년(동성왕 11년) 남도 바닷가의 농부가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근초고왕 대의 경략 이후에도 현지 세력을 인정하는 불완전한 지배에 머물렀던 현재 호남권 지역의 마한에 대한 합병이 이 때 완벽히 끝나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적 통치로 전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3] 현재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동성왕이 파견한 왜계 지방관의 묘라는 것.
494년(동성왕 16년)과 495년(동성왕 17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했다. 498년에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무력에 의한 정벌을 그만두고 탐라국을 속국화했다. 지리적으로 봐도 충청도 쪽이 중심인 백제는 전라도를 장악해야 제주도와 접하기 때문에 탐라국을 정벌하려 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도 위에서 나온 대로 호남권 마한에 대한 합병이 이미 거의 완료되었다는 정황 증거 중 하나다. 국방 정책으로도 힘을 쏟아서 반란의 이유로 언급되는 잦은 사냥이라는 것도 사실은 군사 훈련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이런 노력 끝에 어느 정도 군세를 회복하여 한때 한강 이남 저 남쪽까지 밀려났던 백제가 대략 이 시기부터 다시 한강 근처까지 진출해 한강 유역 쟁탈전이 벌어졌다.[14]
여러모로 웅진 천도 이후 막장을 향해 달리던 백제를 다시 어느 정도 추스려서 무령왕 시기 재중흥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평판은 들을만 하다. 웅진 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고 본 궤도에 올려놓는 등 업적들을 남기며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499년(동성왕 21년), 한산 지역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주려 결국 아사하는 일이 발생하자[15]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까지도 무시해버리고 500년(동성왕 22년) 봄에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정원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조차 듣기 귀찮아 해서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았다.
다만 나제동맹은 사서에 명확하게 써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왕 재위 후반부에 조금 흔들리는 듯한 정황이 보인다. 키노 오이와노스쿠네(紀 生磐宿禰)의 반란 때 엮여서 백제와 사이가 좋지 않던 반파국(대가야)과 신라가 친해지는 듯한 사건이 나오고 어느 순간부터 고구려가 쳐들어오면 서로 지원군을 보내주던 게 끊기고 501년에는 신라가 만에 하나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탄현에 방어선을 구축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뒤로도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 전투 전까지는 직접 싸우지는 않아서 나제동맹이 깨지는 정설은 50년쯤 뒤인 554년이지만 동성왕 재위 후반부쯤 되면 나제동맹의 끈끈함은 전보다는 확실히 약해지는듯 한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백제와 신라 사이는 옛날부터 안 좋았으니 장수왕이라는 공공의 강적이 없어지고는 살짝 멀어지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결국 501년(동성왕 23년) 겨울 음력 11월, 사비 서원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했던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다만 《삼국사기》를 보면 동성왕의 승하 기사가 동성왕 23년 11월 조에 있지만 본문에 '''12월에 이르러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자객에게 공격당했을 때 바로 목숨을 잃은 게 아니라 중태에 빠진 뒤 얼마간 있다가 승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말다왕이 포학무도하므로 국인(귀족)이 제거했다"라는 백제신찬의 기록을 인용했다.[16]
시호(諡號)는 동성왕(東城王)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아들로 무령왕이 된 부여사마가 있다고 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과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이 오기였음이 확실시되었다.
3. 미스터리
3.1. 북위와의 전투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를 크게 격파하였다.
永明二年, 魏盧征之, 大破百濟王弁都.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당대에 북위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84년, 488년, 490년 총 3차례 충돌 기록이 있는데 놀라운 점은 북위는 명군이었던 효문제였던 반면, 백제는 불과 10여 년 전에 장수왕의 침입으로 왕이 죽고 수도가 불타버린 경험이 있었던 상황에서 중원의 맹주였던 북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북위의 백제 침공은 한국사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인데, 당시 백제와 북위는 전투가 펼쳐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건무 2년(495)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예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臣) 모견,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중략)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가장 큰 이유는 '''북위와 백제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는 육상으로는 고구려가, 해상으로는 황해가 있었다'''. 따라서 북위와 고구려 간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북위와 백제 간에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북위가 만약 백제를 공격하려고 육로를 선택했다면, 고구려가 북위의 군대가 자국 땅을 지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있다. 물론 절대라는 것은 없고 당시 북위와의 훈훈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가 허용해줄 수도 있으나, 육로로 통해서 고구려를 지난다면 북위군이 평양성 인근을 지나간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다수의 병력이 수도 인근을 지나가게 해줬다는 기록은 한국은 물론 중국사에서도 나오지 않는다.[17] 그렇다면 황해를 건너왔을 확률이 높은데, 유목민인 북위는 물에 익숙하지 않아 황해를 건너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근거해 북위군이 쳐들어온 곳은 만주와 화북의 사이에 위치한 요서 지방의 백제 식민지라며 이 사건을 백제의 '요서 경영설'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18]
또한 북위가 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19] 을 보내 백제와 교전을 펼쳤는가? 라는 의문점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다. 다만 북위의 병력이 상당히 강력했고 백제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표문에 기록된 백제군 지휘부들의 면면에서 사법명, 해예곤, 목간나 등 백제의 대성팔족의 일원들이 참여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들 귀족이 직접 참가해서 군대를 지휘했다고 본다면 백제도 상당한 정예병을 투입한 것으로 보이며,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대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자료가 저 위의 내용들이 전부다보니, 학계의 해석도 제각각인데 크게 보면 5가지로 분류된다.
- 요서경략설
- 북위군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는 설: 공격자를 북위군으로 보는 것은 남조 측에 전쟁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공격자를 '위로'로 지칭했기 때문인데, 이 말이 '위나라의 오랑캐'라는 말이 아니라 '위나라에 붙은 오랑캐', 즉 고구려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주장. 요서 경략설 부정론을 포함해서 이 시기 백제의 대외 관계를 주로 다루는 공주대 유원재 교수의 주장이다. 하지만 근거가 미약한데, 백제가 고구려를 부르는 비칭은 맥(貊)이지 험윤, 흉리 등이 아니다. 남조에서는 일관되게 북조에 대해서만 저런 표현을 쓰고 있다.[20] 당시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적고 있는데 이것만 누락할 리 없다.
- 그런 거 없다: 전투 자체가 없었으며 남제에게 인정받기 위해 꾸며낸 기록이라는 주장. 일제 강점기 시절 도쿄제국대학의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주장한 것으로, 근거가 미약한 데다가 존재하는 기록들을 그냥 부정해버리는 것이라 사실상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 북위의 해로 공격설: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것은 기정 사실로 보고, 그렇다면 북위의 공격 루트가 해로인가 육로인가 기준에서 해로로 본 것이다. 특히 490년 전투 중 동성왕이 남조에 직접 보낸 표찰에서 목간나의 공적 부분이 가장 큰 근거로 꼽힌다.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인데, 舫는 말할 것도 없이 선박이고, 臺는 성문 혹은 누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공격자인 북위군에게 성문이나 누각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보면 臺舫은 각 단어의 의미가 서로 통하는 단어인 누선(樓船)[21] 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 백제의 용병 참가설: 최근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가설로, 이도학 교수의 주장이다. 백제가 왜에 선진 기술을 전수해주고, 왜는 백제에 용병을 파견해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듯이[22] 남제가 백제에게 용병을 요청했고, 백제가 이를 받아들여 바다 건너 주둔해 있다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다만, 각종 기록의 주체는 북위가 백제(영토)를 침입했다는 기록과 결정적으로 '臺舫’이라는 북위의 배를 불태웠다는 기록 때문에 전반적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남조 유송에 마필을 배로 팔았다는 점에서... 북위가 고구려 수군의 도움으로 백제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긴 하지만 북위가 1)수군도 미약한데 바다 건너편을 2)직접적인 위협이나 이해 관계도 없는 상태에서 3)인접 우방국이 있음에도... 무슨 이유로 전쟁을 개시했는지부터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3.2. 최후에 대한 의혹
동성왕은 재위 말년에 접어들면서 의도적으로 신진 세력들을 꽤나 등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 - 삼근왕을 거치면서 약화되었던 왕권을 다시금 부흥시키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한성에서 함께 내려온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웅진 출신의 신진 세력을 중용한 것이다.
문제는 동성왕 시해를 사주한 백가가 구 귀족 세력이 아니라 신진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백제의 대성팔족중 하나인 백씨 가문의 백가는 웅진 출신의 신 세력이었고 동시에 동성왕 본인이 직접 위사좌평에 임명한 인물이었다. 위사좌평은 오늘날의 경호실장에 해당되는 위치였기 때문에 사실상 백가는 동성왕의 최측근이라고 봐도 좋을 인물이었다.[23]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백가를 새로 신축한 가림성[24] 의 성주로 임명했다. 백가는 이에 불만이 있었는지 병을 핑계로 가림성으로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동성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불만을 품고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백가는 가림성으로 도망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동성왕의 형인 무령왕이 보낸 토벌대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하더니 그대로 처형당했다.(...)
동성왕의 죽음과 뒤를 이은 백가의 황당한 반란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왕의 최측근이던 백가가 왕을 암살하고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다가 처형되었다는 점은 백가가 뭔가 '''뒤에 믿는 구석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백가 혼자서 동성왕을 암살했다기보다는 백가의 뒤에 배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나 누가 배후였을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동성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동성왕이 즉위하다
四年春一月 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四年冬十月 큰 눈이 내리다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五年夏四月 웅진 북쪽에서 신성한 사슴을 사냥하다.
五年春二月 남제에 사절을 파견하다
六年秋七月 남제에 파견하는 사절의 통행을 고구려가 차단하다
七年夏五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八年春二月 백가를 위사 좌평에 임명하다
八年春三月 사절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다
八年秋七月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다
八年冬十月 대궐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年 '''위가 침입하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十一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十一年冬十一月 남당에서 군신들과 잔치를 벌이다
十二年秋七月 사현성과 이산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연돌을 달솔에 임명하다
十二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十三年夏六月 웅천의 물이 불어 민가가 피해를 입다
十三年秋七月 백성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十四年春三月 3월에 눈이 내리다
十四年夏四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十四年冬十月 우명곡에서 사냥하다
十五年春三月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다[25]
十六年秋七月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하다
十七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七年秋八月 신라군이 구원하여 고구려가 물러나다
十九年夏五月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다
十九年夏六月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다
二十年 웅진교를 가설하다
二十年秋七月 사정성을 축조하고 한솔 비타를 보내 지키게 하다
二十年秋八月 왕이 무진주로 행차하여 탐라의 사죄를 받다
二十一年 백성이 굶주려 고구려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二十一年冬十月 전염병이 크게 돌다
二十二年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다
二十二年夏四月 우두성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夏五月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다
二十三年春一月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지다
二十三年春三月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치다
二十三年夏五月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二十三年秋七月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을 대비하다
二十三年秋八月 가림성을 축조하여 백가로 하여금 지키게 하다
二十三年冬十月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三年冬十一月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죽이다
'''기록이 상당히 많다. 재위 기간으로 비교하면 의자왕보다도 많을 정도. 백제에서 온조왕, 무왕 다음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왕이다.'''
5. 기타
동성왕의 후계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동성(東城)씨를 자처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성왕 시기 활동한 동성자막고, 동성자언, 동성도천이 대표적. 하지만 동성씨가 자신들의 조상을 밝히지 않은 점과, 일시적으로만 나타나고 사라졌던 점 때문에 아닐 가능성도 있다.[26]
무령왕과 마찬가지로 일본 태생이거나 장기 체류한 것으로 보인다. 추정지는 후쿠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