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헌공(통일왕조)

 


'''진(秦)나라 4대 국군
헌공
憲公
'''
''''''
영(嬴)
''''''
조(趙)
''''''
립(立) / 녕(寧)?
'''할아버지'''
진문공(秦文公)
'''아버지'''
진정공(秦靜公)[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704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715년 ~ 기원전 704년
1. 개요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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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진(秦)나라의 제4대 군주. 진문공의 손자. 진정공(秦靜公)의 아들. 진출자, 진무공, 진덕공의 아버지. 진 문공이 오래 살아서 아버지 진 정공이 뒤를 잇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진 문공이 재위 50년 만에 죽자, 그 뒤를 이었다. 사기에는 진영공(秦寧公)[2]으로 기록되어 있다. 훗날에 즉위한 후대의 군주인 진헌공(秦獻公)과 진(晉)나라진헌공(晉獻公)과는 다른 군주다.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진 헌공 2년(기원전 714년), 진 헌공은 신읍(平陽)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진 헌공은 병사를 보내 탕사(蕩社)를 쳤다.
진 헌공 3년(기원전 713년), 박(亳)의 융족과 싸울 때 박왕(亳王)은 패해 서융으로 달아났다. 드디어 탕사를 멸망시켰다.
진 헌공 7년(기원전 709년), 예나라의 백작의 어머니 예강이 예백의 애첩이 많은 것을 싫어했다. 예백 만은 예나라에 쫓겨나 그는 위성에 거주했다.
진 헌공 8년(기원전 708년), 가을 진 헌공은 예백 만을 위해 예나라를 쳤는데, 진 헌공이 예나라를 얕봐 패했다. 겨울에 주 환왕은 진나라와 연합해 위성을 포위해 예백 만을 포로로 잡았다.
진 헌공 12년(기원전 704년), 진 헌공은 탕지(蕩氏)를 토벌해 영토를 넓혔다. 같은 해 진 헌공이 죽으니 그 나이가 21세다. 장지는 서산의 큰 산기슭이었다. 그 뒤를 아들 진출자가 이었다.
[1] 단 계보에 들어가는 군주가 아니라 추존된 군주다.[2] 사기지의(史記志疑)의 저자 양옥승(梁玉繩)은 영(寧)자가 헌(憲)자를 잘못보고 기록한 글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