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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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곡옥의 제3대 군주이자, 진(晉)나라의 제18대 군주다. 그는 곡옥장백의 아들이며, 진헌공의 아버지이며, 진혜공과 춘추오패로 이름난 진문공의 할아버지이며, 진회공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곡옥의 제3대 백작으로 진나라의 후작이 되기 위해 싸워 끝내 진나라를 차지하여 곡옥대진 사건을 종결시키고, 주나라 왕인 희왕에게 뇌물을 바쳐 곡옥 백작에서 진나라 후작이 된 인물이다. 참고로 곡옥 백작이었기 때문에 진 무공이 아닌 곡옥 무공으로 불리기도 한다.[2]
2. 생애
2.1. 곡옥 백작 시절
곡옥 무공은 처음에는 진애후에게 패해 화평을 청하면서 힘을 길렀다.
진 애후 8년(기원전 710년), 진 애후가 형정 땅을 침범하자 곡옥 무공은 형정 사람과 힘을 합치고 이듬해 봄에 익을 치기 위해 형정에 주둔해 한만을 여융, 양홍[3] 을 거우로 삼아, 애후를 분수(汾水)가에서 사로잡았다. 하지만 진나라에서 소자후를 세우자 곡옥 무공은 인질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 진 애후를 살해했다.
진 소자후 3년(기원전 706년), 소자후를 유인해서 살해했으나 그 대가로 주환왕이 괵중을 보내 곡옥을 치자 수도를 지키기 위해 회군했다. 그리하여 주 환왕은 진후 민[4] 을 옹립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5][6]
진 소자후 4년(기원전 705년),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소자후를 유인해 죽인 것이 이 해라고 적고 있어서 기록에 따라서 연도가 다르다.
진후 민 원년(기원전 704년), 익을 멸했으나, 주 환왕이 괵중으로 하여금 진후 민을 옹립시켜 익을 부흥시키는 바람에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후 민 2년(기원전 703년), 진 무공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쳤으니 괵중, 예백, 양백, 순후, 가백이 연합하여 진 무공을 쳤다.
진후 민 28년(기원전 679년), 수십년의 어려운 싸움 끝에 진을 쳐서 멸하고 진후 민을 몰아냈다.[7] 진나라의 병력을 주희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1군만 두는 조건으로 곡옥 백에서 진후로 승진한다.
2.2. 진후가 된 뒤
진 무공 원년(기원전 678년), 진 무공은 이제 외왕내제 식으로 대외적으로는 후를 칭하고, 대내적으로는 공을 칭했다.[8] 그리고 순(荀)나라를 쳐서 멸한 뒤, 대부인 원씨암에게 주니 그가 바로 순씨들의 조상인 순숙이다. 그리고 당시 춘추오패로 군림하던 제환공은 진나라와의 우호를 위해 훗날 진헌공이 되는 희궤제에게 자신의 딸인 제강을 보내나 그가 낼름 차지해버렸다. 그러나 진 무공이 늙어서인지 제강을 상대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진헌공인 희궤제와 정을 통하게 된다.
진 무공 2년(기원전 677년), 진 무공은 진후가 된지 겨우 2년 만에 훙했다.
3. 평가
그는 진문후의 사후 익과 곡옥으로 갈라진 진나라를 통일시켜[9] 훗날 그 손자인 진문공이 성복전투에서 초나라를 이기고 춘추 오패가 되어 강한 힘을 과시하는 진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1] 열국지에서는 칭대(稱代)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사기를 오독해서 생긴 오류다. 원문에서 곡옥장백이 죽은 뒤 진 무공이 대를 이었다는 것을 칭대로 오독한 것이다.[2] 물론 시호로 곡옥 무공이 드물게 쓰이지만 곡옥의 군주였을 당시에는 곡옥의 백작임을 잊지 말자.[3] 삼국지에 나오는 양홍과는 다른 인물.[4] 진나라 즉 익나라의 마지막 후작이라서 시호가 없다.[5] 이 사건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아직 주나라의 힘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6] 참고로 이것은 사기의 내용이다.[7] 일설에는 진 무공이 죽였다고 한다.[8] 시호를 통해 드러남.[9] 진 무공이 종결시킨 사건을 곡옥대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