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협
陳勰
생몰년도 미상
조위, 서진의 인물. 자는 태화(太和). 진협(陳協)이라고도 한다.
며칠마다 완적을 찾아오자 술을 한 통 씩 줬다고 하며, 241년에서 263년 사이에 사마소가 구룡보를 보수하려 하자 완적이 적임자로 진협을 천거해 사마소가 기용했다.
사마소로부터 도수사자에 임명되어 구룡보의 보수를 위해 땅을 파자 오래된 동으로 된 용이 여섯 장이 출토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하루에 천 금의 이익을 낳았다고 해서 구룡보를 천금보로 바뀌었고 태평환우기에 따르면 천금보 공사는 경원 연간에 완료되었다.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진협은 사마소에게 기대를 받아 유달리 재능이 탁월해 군령을 명확히 이해했는데,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진협에게 군대를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사마소가 촉한을 멸망시킨 후에는 제갈량의 진법과 그것을 운용하는 방법, 갑을교표치(甲乙校摽幟)로 지휘하는 요령 등을 진협에게 주라는 영을 내렸다. 진협은 그에 대한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숙달했다. 드디어 진협은 궁궐 안의 군대를 관리하는 전중전병중랑장(殿中典兵中郞將)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사마소가 죽고 서진이 건국되자 진무제가 출입할 때마다 백수번을 들고 어가의 좌우에서 의장대들을 지휘했으며, 진협이 지휘하는 부대는 진형이 잘 정돈되고 기강이 매우 삼엄했다. 함녕 연간에는 숙위를 지내다가 순욱의 참언으로 면관된 화이를 찾아가 그 저택 옆의 돼지 우리를 짓는 것에 도움을 줬다.
287년 정월에 태묘가 무너지자 9월에 새로운 태묘의 조영을 위해 멀리서 좋은 재목을 수집하고 구리 기둥을 주조하면서 준비하자 장작대장에 임명되어 태묘 조영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공사는 6만 명이 동원되어 289년 4월에 완성되었다. 이 공사 때 진협이 땅을 파서 고척이 발견되자 상서가 지금의 자는 옛 자보다 크기에 적당한 크기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주했다.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태강(280~289) 말에는 무제가 꿩 사냥을 나가자 도수사자(都水使者)로서 따라갔으며, 거가를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사냥을 하게 했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사냥을 끝나게 하기 위해 모이도록 했지만 모이지 않았다. 무제가 진협에게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해 진협이 백수번을 들어 흔들자 잠깐 사이에 집합이 완료되었으며,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진협의 통솔력을 칭찬하고 무제가 진협을 신임하는 것이 두터웠다.
다만 진협이 당시 도수사자였다면 태묘 공사가 끝난 후일 것으로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진협이 편찬한 여러 비 22권, 비문 15권 등에 진의 장작대장 진협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작대장을 지내다가 죽은 것으로 보이므로 진서 직관지의 도수사자는 장작대장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생몰년도 미상
조위, 서진의 인물. 자는 태화(太和). 진협(陳協)이라고도 한다.
며칠마다 완적을 찾아오자 술을 한 통 씩 줬다고 하며, 241년에서 263년 사이에 사마소가 구룡보를 보수하려 하자 완적이 적임자로 진협을 천거해 사마소가 기용했다.
사마소로부터 도수사자에 임명되어 구룡보의 보수를 위해 땅을 파자 오래된 동으로 된 용이 여섯 장이 출토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하루에 천 금의 이익을 낳았다고 해서 구룡보를 천금보로 바뀌었고 태평환우기에 따르면 천금보 공사는 경원 연간에 완료되었다.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진협은 사마소에게 기대를 받아 유달리 재능이 탁월해 군령을 명확히 이해했는데,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진협에게 군대를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사마소가 촉한을 멸망시킨 후에는 제갈량의 진법과 그것을 운용하는 방법, 갑을교표치(甲乙校摽幟)로 지휘하는 요령 등을 진협에게 주라는 영을 내렸다. 진협은 그에 대한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숙달했다. 드디어 진협은 궁궐 안의 군대를 관리하는 전중전병중랑장(殿中典兵中郞將)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사마소가 죽고 서진이 건국되자 진무제가 출입할 때마다 백수번을 들고 어가의 좌우에서 의장대들을 지휘했으며, 진협이 지휘하는 부대는 진형이 잘 정돈되고 기강이 매우 삼엄했다. 함녕 연간에는 숙위를 지내다가 순욱의 참언으로 면관된 화이를 찾아가 그 저택 옆의 돼지 우리를 짓는 것에 도움을 줬다.
287년 정월에 태묘가 무너지자 9월에 새로운 태묘의 조영을 위해 멀리서 좋은 재목을 수집하고 구리 기둥을 주조하면서 준비하자 장작대장에 임명되어 태묘 조영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공사는 6만 명이 동원되어 289년 4월에 완성되었다. 이 공사 때 진협이 땅을 파서 고척이 발견되자 상서가 지금의 자는 옛 자보다 크기에 적당한 크기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주했다.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태강(280~289) 말에는 무제가 꿩 사냥을 나가자 도수사자(都水使者)로서 따라갔으며, 거가를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사냥을 하게 했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사냥을 끝나게 하기 위해 모이도록 했지만 모이지 않았다. 무제가 진협에게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해 진협이 백수번을 들어 흔들자 잠깐 사이에 집합이 완료되었으며,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진협의 통솔력을 칭찬하고 무제가 진협을 신임하는 것이 두터웠다.
다만 진협이 당시 도수사자였다면 태묘 공사가 끝난 후일 것으로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진협이 편찬한 여러 비 22권, 비문 15권 등에 진의 장작대장 진협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작대장을 지내다가 죽은 것으로 보이므로 진서 직관지의 도수사자는 장작대장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