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삼국시대)

 





존속기간
220년 ~ 265년 (5대 46년간)
별칭
조위(曹魏)
위치
중국 화북, 북한 서부
수도
허도 (220)[1]
낙양 (220 ~ 265)
인구
4,932,000명[2]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曹)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문제 조비,(220~226),
명제 조예,(226~239),
애제 조방,(239~254),
주요 실권자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언어
상고 중국어[3]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도교, 불교, 중국 토속 종교
종족
한족
통화
오수전
성립 이전
후한
멸망 이후
서진
[image]
삼국의 실제 행정력[4]
현재 국가
중국, 몽골, 북한
[image]
지도의 붉은색 영토
1. 개요
2. 국력
3. 역사
4. 정치
4.1. 위나라 관료
5. 군사
5.1. 고구려와의 충돌
6. 경제
7. 문화
8. 역대 황제
8.1. 계보
9. 창작물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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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황제를 확보한 조조가 기반을 닦고, 그 아들 조비선양의 형식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후 자신들도 권신 사마씨 일족에게 휘둘리다가 후한과 같은 운명맞았다.
국호인 위魏는 조조가 위공(魏公)에 봉작될 당시 자신의 본거지로 삼고 있던 업군이 속한 지명 위魏에서 유래하였다.
워낙 삼국지의 유명세가 강해서 보통 '위나라'라고만 지칭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나라지만, 중국사에는 위나라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5] 구별을 위해 황실의 성을 따서 '조위(曹魏)'라고 부르기도 한다.

2. 국력


후한 13주 중 9주, 그 당시 '중원'이라고 칭할 수 있는 화북 전체를 혼자 차지한 만큼 인구 수와 그에 따른 생산력이 촉한손오와는 일대일 구도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인구만 해도 《후한서》에 등재된 기록을 기준으로 263년에 이미 443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동시대 촉의 5배, 오의 2배에 달하는 인구 수이다. 학자들 중에는 천하의 7~8할을 가졌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 때문에 촉한과 손오는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6]
그러나 조위의 국력이 천하의 7~8할을 장악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과대평가다. 일단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조위는 그 당시 중원의 가장 알토란 같은 지역인 화북을 장악했지만 후한 말부터 이어진 수십 년간의 전대미문의 난세 대혼란 끝에 자리 잡은 왕조인 터라 태생적으로 급감한 인구수와 바닥을 친 중앙 권력의 통치력 같은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조위의 중앙 권력이 확보한 인구수는 500만 명 정도였다.[7] 인구가 곧 국력이고 생산력인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이 정도 수준의 국력은 유구한 중국사를 통틀어 화북을 장악한 여러 왕조들 가운데 단연 하위권에 불과하다.
이렇게 당대 조위가 확보한 인구수는 촉한의 인구 5배, 손오의 2배 정도였으니 국력 역시 딱 그 정도 차이가 난다고 보면 합당하다. 그러니까 조위가 확보한 중화의 지분은 많아봐야 6할 정도가 된다고 보면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삼국이 확보한 인구는 총 8,534,000명이고 조위의 인구는 4,932,000명이니 대략 58%가 조위의 지분이다. 그리고 촉한은 12%, 손오는 30% 정도라고 보면 된다. 당대 중화권 최강국인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패권국이라고는 보기는 힘든 수준이다.
실제로 삼국 정립 이후 조위가 촉한이나 손오를 상대할 때를 보면 그다지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부친 적이 별로 없다. 일부 식자들의 평대로 당대 조위가 정말로 중화의 7~8할을 독식했고 나머지 2~3을 촉한과 손오가 나눠가졌다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조위가 촉한 혹은 손오와 일대일 구도일 경우라면 압도적으로 우위인 국력을 자랑할지는 몰라도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치고[8] 북방 이민족이라는 변수까지 추가하면 그 모든 타세력의 합을 압도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때문에 촉한과 손오가 필사적으로 싸운 만큼 조위 역시 사활을 걸고 주변국들과 싸워야 했다. 조위가 촉한보다 국력이 5배 더 강하다고 해서 대촉전에 5배의 군사력를 동원하고 손오보다 2배 더 강하다고 해서 대오전에 2배의 군사력을 투입하고 그랬던 게 절대 아니었단 얘기다.
가령 제갈량의 북벌 당시를 보면 조위는 10만 정도의 군세를 동원한 촉한과 맞서 싸우면서 5배나 되는 국력 차가 무색하게 촉한의 북벌군과 비슷하거나 조금 상회한 정도의 군세밖에 서북 전선에 투입하지 못했다. 1차 북벌 때처럼 되레 촉한의 군세가 더 많은 적(기록상 20만 명)도 있을 정도다. 특히 위나라가 역으로 침공한 낙곡대전에서는 참패하여 20여 년간 수세로 일관했을 정도 삼국의 최약체가 촉나라인데도 그 최약체를 상대로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가 멸망 2년 전에야 엄청난 행운이 연달아 일어난 덕분에 겨우 정복했다.
그리고 손오를 상대한 회남 전선에서는 외려 손오보다 항상 더 미약한 군세로 대적했다. 합비 공방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합비 전선의 대표 군사 지휘관들인 장료, 만총, 장특 등은 손오의 북진을 상대하면서 단 한 번도 군사 숫자로 우위에 선 적이 없었고 항상 극심한 열세였다. 조위와 동오의 대립구도에서 군세 상 우위의 포지션에 있던 건 손오의 2배 이상의 국력을 갖춘 조위가 아니라 언제나 손오였던 것이다. 그것도 장료군 7천 명 vs 손권군 10만 명, 장특군 3천 명 vs 제갈각군 20만 명 같은 예가 보여주듯 압도적으로...(...) 즉 손오가 회남 전선에서 번번이 좌절한 건 손권 같은 지휘관의 역량 문제나[9] 단합이 안 되는 손오 특유의 군사 시스템 같은 내부 문제 때문이었지[10] 손오가 조위보다 국력이 약하고 군세가 적어서 패배한 게 절대 아니었다. 회남 전선에서 손오는 조위보다 물량이라는 측면에선 항상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11] 회남 전선에서 조위가 어마어마한 물량을 보여준 적이 있긴 한데 오나라와의 싸움이 아니라 제갈탄의 난. 제갈탄은 둔전병까지 긁어모아 15만을 동원했고 사마소는 후방 병력까지 탈탈 털어서 26만을 동원했는데 이걸 합치면 무려 위나라 군대 41만이 회남에 집결한 것이다.
또한 사마의가 요동 공손씨 정권을 정벌할 때나 관구검고구려와 싸울 때를 봐도 이들의 군세는 항상 상대보다 약했지만 지휘관의 뛰어난 역량으로 승리한 케이스다. 요동 공손씨 정권이나 고구려는 조위의 국력에 비하면 정말 미약한 규모의 세력이었지만, 조위는 이러한 공손씨 정권이 수성병을 제외하고 수만명의 야전병을 동원할 때 4만 명을 겨우 모아 사마의에게 붙여줬으며, 관구검은 고작 1만 명의 군대로 고구려의 동천왕이 이끄는 고구려 최정예 철갑기병 5천이 포함된 2만 명의 군대와 상대해야 했다.
이처럼 조위는 촉한과 손오를 상대할 때는 물론이고 이들보다 세가 훨씬 작은 북방의 이민족을 상대할 때조차 당대 최강국이라는 위상이 무색할 만큼 우위의 전력으로 밀어부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대 조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여러 적대국들이 조위를 빙 둘러 포위한 구도였던 터라 전선이 워낙 길기도 했고,[12] 조위의 국력 또한 생각만큼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같은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의 영향 때문인지 물량빨 이미지가 강한 조위지만 사실 이는 편견이자 과대평가로 외려 오늘날 삼국지 팬덤의 인식에서 조위 소속의 인물들의 군사적 역량이 과소평가 됐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결론적으로 조위가 당대 최강국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쳐도 아예 극복하지 못할 만큼 압도적으로 격차가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우위인 패권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조위는 북방의 이민족들까지 상대해야 했기에 그 격차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 상술했듯 촉한과 동오를 상대로 조위가 그리 압도적인 군사 동원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특히 대오 전선인 회남-합비 전선 같은 경우는 손오가 무능해서 그렇지 조위의 군세 상황만 보면 상당히 아슬아슬한 경우[13]가 많았다. 당대 촉한의 최고 위정자들인 제갈량이나 강유, 그리고 노숙 이후 유일하게 비전과 능력을 겸비하고 손오의 대전략을 제시한 리더인 제갈각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분명 힘들지만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북벌을 시도한 현실주의자였지, 불가능한 목표에 집착한 게 결코 아니었다. 북벌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망정, 북벌에 성공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자신들이 소속된 국가가 사라진다는 것이야 말로 명약관화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14]

3. 역사


200년
관도대전
213년
조조가 위공으로 책봉됨
216년
조조, 위왕으로 책봉됨
220년
조비가 황제로 즉위 / 위나라 개국[15]
227-234년
제갈량의 북벌
249년
고평릉 사변
254년
조방의 친위 쿠데타 발각
260년
조모의 친위 쿠데타 실패
263년
촉한 정벌
265년
조환사마염에게 선양 / 위나라 멸망
위나라는 조조가 후한으로부터 위공(魏公)의 봉작을 받으면서 공국(公國)으로서 건국되었다. 그리고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의 봉작과 구석을 받으면서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본래부터 조조는 후한의 승상으로서 후한의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왕국을 건국하고 후한과는 완전히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함으로써[16] 후한 조정의 위상은 완전히 실추된다. 위가 왕국의 체계를 갖춘 이후 후한은 명목상으로는 존속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형식만 남게 돼버렸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위의 왕위를 잇는다. 그리고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껍데기만 남은 후한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천자의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조비가 죽은 뒤 조비에 이어 조예가 제위에 올랐고, 처음에는 조진, 조휴 등 황제 일족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으나 조진은 얼마 못 가 죽고 조휴는 오나라 군에 대패하여 분사하였다.
조예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위나라는 직계 혈통이 끊어져버린다. 게다가 조예가 양자로 들여서 새로 황제가 된 조방의 혈통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이 실추된다.
사마의가 공적을 세워 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자 조진의 아들인 조상에게 실권을 주어 황제 일족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사마의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조조와 조비 대의 공신들의 후손들이 사마씨로 갈아타면서[17]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조방은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정권을 잡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허무하게 실패하고 자신이 폐위당하고 만다. 조방을 제거한 사마사는 황족인 고귀향공 조모를 데려다가 제위에 올렸다. 조모는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정권을 잡자, 역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사마씨 세력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사마씨의 군대에 시해당하고 만다. 사마소는 아예 꽤나 먼 황족 조환을 데려다가 제위에 앉힌다. 이로서 황실은 완벽하게 사마씨의 꼭두각시화되고 조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촉한이 사마소에 의해 멸망[18]한 지 불과 2년이 지난 후, 마지막 황제인 원제 조환이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에게 선양을 하면서[19] 허울만 남아있던 조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마지막 황제들이었던 조모와 조환의 최후는 조조와 조비에게 밀려난 후한 헌제의 안습하고 처절한 모습과 매우 흡사해서 역사는 반복된다 라는 좋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20]

평하여 말한다. 고대에는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현자들에게 주었다. 후세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적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만일 적자가 없으면 방계 친족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가령 한 대의 문제․선제가 그러했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명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사사로운 애정을 중시하여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며 기르고,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전해주었고, 또 적합한 인물에게 위탁의 책임을 맡기지 않고 일족을 정치에 참여시킨 결과 조상은 주살되고, 제왕 조왕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귀향공 조모는 재간이 있고 총명하며 어린 시절에 완성을 보았으며, 의론을 좋아하고 문장을 애호하여 문제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류왕(조환)은 정사에 관해 묻지 않고 재상이 정치를 하도록 하고 한위(漢魏)의 전례를 받들어 진(晋)에게 양도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로부터 대국(大國)으로 봉해지고, 진 왕조의 빈객이 되어 산양공(山陽公; 후한의 헌제 유협)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위서 삼소제기 진류왕기》의 마지막 평론

사실 위나라 역시 천하를 한두 해 다스린 것은 아니고, 사마씨 세력 역시 위나라의 모든 신하들을 다 손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 위나라 말기에 사마씨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은 관구검문흠, 제갈탄, 이풍 등으로 손꼽아보면 적지 않게 많다. 하지만 이런 '반 사마씨 세력'이라고 해서 어떤 통일성이나 연결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대규모로 일어나지는 못하고 그저 중구난방으로 단독으로 거병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들의 역량도 사마씨에 크게 못 미쳐서 사마씨에 대항하는 반격 계획은 번번히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렸다. 오히려 이를 명분으로 하여 사마씨는 반대 세력을 숙청할 수 있게 되었고, 조위 황실의 명운은 점점 깎여나가게 된다.
조위가 망한 후, 선양을 받은 사마씨는 이전에 받은 작위에 따라 나라의 이름을 진(晉)이라 했는데, 오늘날에는 역사속의 다른 진(晉)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서진이라 부른다. 서진의 황제들은 위나라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 같은 사마씨 일족들의 힘을 키워주며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지만, 후한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개선되지 못한채 통일제국을 건국하였고, 그 이후의 결과는...
수도는 선양 직후에는 후한의 마지막 수도 허(허창)를 그대로 썼으나 곧 낙양으로 천도했다.

4. 정치


진군(陳羣)이 주창한 구품관인법이 만들어졌다. 대개 위나라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라면 이것을 꼽으며, 세계사 교과 시간에 후한 말기나 중국 삼국시대에 넘겨짚고 가는 것도 사실상 이 제도 뿐이다(...).
본질적으로 위나라는 강력한 군벌인 조조가 연주, 영천, 여남 일대의 호족들을 포섭하고 지지를 받아내어 건국한 나라다. 삼국지연의는 물론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조조 휘하의 모사나 무장으로 묘사되는 인물들도 사실은 대개 지역 호족들이다. 애당초 조인, 조홍이나 조휴를 배출한 조조의 고향 초의 조씨 집안부터가 호족 집안이며, 하후돈 등을 필두로 하는 하후씨 일족이나 순욱을 필두로 하는 순씨 일족. 뒷날 위를 무너뜨리는 서진 정권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마의의 사마씨 역시 호족이다. 구품관인법의 정비로 관료제가 발달하여 관리 서열의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되었다. 하지만 구품관인법의 중정제가 일으킨 부작용으로 호족의 귀족화가 나타나게 되고, 귀족의 대두로 정치가 귀족들에게 좌우되기 시작한다.[21] 서진 이후로 지배층으로 군림하는 이른바 '문벌귀족'이 바로 이 시기의 호족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귀족화된 계층이다.
위의 가장 큰 약점은 황통으로, 실제 위나라의 황통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뒤늦은 후계자 책봉과 이후 머지 않은 조조의 사망 때문에 조비는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아우들을 매우 의심하여 직계 황족들을 시골의 봉지에 연금시켜 사실상 감금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이후 조예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황실의 혈통이 위기를 겪었으며 황제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가져왔다. 그래서 사마씨가 정권을 탈취하는 틈을 얻을 수 있었다.
보통 위진의 체제를 '한의 모순을 개혁'한 결과 나온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권력 쟁탈 과정에서 한의 모순과 타협 혹은 모순을 더욱 심화'시킨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후한 사회의 큰 모순 중 하나인 호족들과 계속 타협하다보니, 모순의 해결은 안 되고, 결국 이것을 일종의 계엄으로 찍어누를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서주대학살'이나 관도대전 후 '원소군 학살', 그 외 동귀비 처형 등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라는 것.
후한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인 환관과 외척을 척결하려는 시도도 진행되었다. 조조는 권력자로 등극하면서 이들을 밟아놓았고[22] 외척은 천한출신으로 삼았고 조비는 이를 이어받으며 아예 제도면에서 환관의 직책을 제한하고 태후에게 정치를 아뢰지 말라는 법을 비롯해 외척세력의 발흥을 막으려 했다. 게다가 본인들 뿐만 아니라 한나라 황제의 외척들을 상대로도 숙청을 저질러서.... 다만 후일 환관이 등장해 국정을 농단한 촉한 정도는 아니었어도 환관문제를 시스템적으로 잘라냈다고 하는 위나라에서도 조상 일파와 밀접히 결합해 연락하면서 국정을 주무른 장당이라는 환관이 있었다.[23] 또 사마사가 하후현과 이풍을 주살할 때 보면 하후현전에서 종육이 상주하길 이풍과 그 일당이 환관과 결탁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후 조방이 폐위된걸 보면 환관이 권력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보기 힘들다.[24] 외척의 경우도 조방이 사마사를 죽이기 위해 장인 장집과 조예의 딸 제장공주의 시아버지 이풍과 모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위는 스스로의 제도를 어기고 황실의 권력을 위해 외척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게 드러난다. 결국 어느정도 권력이 강성할 때는 외척과 환관 배척의 원칙도 강하게 내세우겠지만 불안정해지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겠다. 거기다가 사마씨는 태후가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조위의 태후를 협박해 황제를 갈아치웠으니 안습...사실 촉과 오 역시 외척의 발흥은 없었다. 외척 문제는 삼국시대 바로 후에 발생하는데, 후한시대의 외척문제 때문인지 조위는 노이로제 수준으로 외척을 배척하였고, 그 조위를 계승한 서진은 반대로 황족, 외척을 중용하였다. 위나라의 패망을 보고 반면교사를 삼은 듯 한데, 근데 그들의 중흥때문에 서진은 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위진이 구품관인법이나 '종친 중심의 등용'을 개혁책으로 내놓았지만 그 결과물은 좋지 못했다. 위나라의 구품관인법은 귀족체제의 공고화와 더불어 그 자체도 무력화되어 과거제로 변모되기까지 폐단을 낳았고 사마염과 그 뒤를 이은 사마충이 정신줄을 놔버린탓에 종친 중심 등용체계는 그냥 주나라의 봉건제만도 못한것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주나라가 춘추전국의 수순을 밟듯, 위진 역시 사마씨에 의한 위나라 붕괴, 진나라의 팔왕의 난으로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

4.1. 위나라 관료


크게 조씨의 가향인 초, 패 출신자와 여(여남), 영(영천) 출신자가 많았다.[25]

5. 군사


후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둔전제세병제가 실시되었다. 조조의 강병 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위나라는 매우 강력한 군대를 갖추었다.[26] 군법이 매우 엄격하여 군사적인 배신자는 가족까지 연좌제에 걸어서 벌을 줄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다른 나라에 항복한 자가 나오더라도 그 가족들이 오를 수 관직에 있던 촉한과의 차이점.
내지 둔전은 조위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도겸은 진등을 전농 교위로 삼아 서주경내에 둔전을 실행해 효과를 거두었고, 유주의 공손찬도 역경에서 둔전을 실시해 군량을 비축했다. 그러나 대규모로 둔전을 운용한 것은 조조 정권이 처음으로 조조는 이들을 참고삼아 대규모로 내지 둔전을 실시했다.
조위의 둔전은 본래 민둔과 군둔의 구분이 없었는데 근대 학자들이 서술과 연구의 편리를 위해 민둔과 군둔으로 구분지었다. 사실 둘을 명확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민둔과 군둔의 공통점은 군량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고, 군사 편제를 따랐다는 것이다. 유사시에는 민둔의 노역자들도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오와 촉의 변경 지대 둔전객들은 방위의 임무도 겸했으며, 내지 둔전객들은 반란 등이 일어날 경우 징집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경제가 회복되며 이들을 군역과 요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단순 병력의 물량으로는 다른 국가들을 압도했지만[27] 문제는 전선. 워낙 세력이 크다보니 단순히 촉, 오뿐 아니라 다른 이민족 등도 고려해야 했기에 압도적인 수로 적을 밀어버린다거나 하는 모습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이게 반영이 되지 않은 삼국지 13처럼 반란군이나 이민족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창작물에선 정말 압도적이다.
조위의 갑옷 제작기술 역시 뛰어났다. 조식은 '선제사실개표'에서 흑광개, 명광개, 양당개, 환쇄개, 매개 등 다양한 갑옷의 명칭을 들고 있다. 이런 갑옷은 당시에는 매우 진귀한 고급품이었으나 후에는 군대의 주요 장비로 발전했다. 그 중에서 마개는 전투마를 보호하는 갑옷을 말한다.

5.1. 고구려와의 충돌


사실 처음부터 위나라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요동에 공손씨 세력이 남아있었을 때 고구려와 위나라는 협력 관계였다. 오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왔을 때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고, 위나라가 공손연을 칠 때 고구려도 1천의 병력을 보내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고구려가 직접 국경을 맞닿게 되자 상황이 급변하여 위나라와 고구려는 급격히 사이가 나빠졌고, 고구려가 선빵을 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242년, 동천왕이 병력을 보내 서안평을 침공했다.
  • 246년 8월, 관구검이 1만의 군대를 이끌고[28] 침공, 비류수 전투에서 동천왕을 개박살내고[29] 수도인 환도성까지 불태워 버리는 대승을 거뒀다.
  • 259년 12월, 울지해가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침공, 양맥 전투에서 중천왕에게 개박살나고[30] 물러났다.
한편 정사 삼국지 위서에는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충돌이 남은 기록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6. 경제


당시의 생산은 대부분 농업 생산이었고,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인구였는데, 결과적으로 인구가 국력이고 경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위나라는 촉의 5배, 오의 두배가 되는 압도적인 경제력을 자랑했다. 특히 당시에는 장강 이남의 남중국이 개발되지 않았던데다가, 기후도 현재보다 온난습윤하여 황하를 끼고 있는 화북 지방의 농업 생산량은 현재보다 훨씬 좋았다.[31] 일단 조조가 집권하여 둔전 등의 여러 정책을 펼쳐 전란으로 소실된 토지를 재건하고 유민을 정착시키자 바로 생산이 급등하였다. 둔전제는 고대로부터 전해진 둔전제를 백성들 전체를 상대로 도입한 아주 중요한 제도로, 많은 왕조들이 군사 운영의 중요한 방편으로 따랐다. 그러나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는 등 그 폐해도 만만치 않아서 점점 생산성이 떨어졌고 결국 조위가 멸망하기 1년전인 264년에 폐지된다.
어쨌거나 조위는 동한말의 혼란기에 황폐해진 경제를 다시 복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예컨대, 양회(兩淮)지역은 "수춘에서 도성에 이르기까지 둔전을 일구니 (고을마다 사람이 많아)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나고 천맥(밭 사이의 길)이 서로 종횡으로 이어졌다, 돈과 식량이 비축되고 수해가 없다" 등의 모습으로 번창했다. 또 좌사의 《위도부(魏都賦)》에 "면수(비단의 일종)는 양읍이요, 나기(무늬 있는 비단)는 조가며, 면광(솜)은 방자요, 겸백(명주비단)은 청하다" 라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동한 말에 와해되어 거의 자취를 감췄던 방직산업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민생이 안정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동한 말년에 황폐한 폐도였던 낙양은 조위의 수도가 되면서 번창하여 조방 시기(240~253)에 "백성이 사방에 섞여 살고, 대 호족이 많이 기거하며, 상인과 이민족 등 천하 모든 곳에서 이익을 좇아 모여들었다"라고 할 만큼 거대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현재의 산둥성 지역인 북해는 소금 산지,[32] 서량, 병주, 유주 지역은 기병에 필수적인 말의 산지였다. 당시는 상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나라는 수백년간 한족의 활동 무대였기 때문에 상업도 다른 곳보다 크게 발달되어 있었다. 한나라 시절엔 개개인이 동전으로 인두세를 냈는데, 동탁이 소전 만들던 시점을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화폐경제(+호적 조사)가 와장창 무너진 바람에 조조, 조비 때에 호구 기준의 현물납으로 바뀌었다. 동탁 시대 이후로 대륙에서 (한동안) 화폐 사용이 딱 끊겼다, 이와 관련해 후한말-위의 조세제도가 동전을 내는 인두세에서 현물을 내는 호포제로 바뀐 것이다. 조조가 인두세를 폐하고 호포제를 실시했고 화폐납 대신 현물납을 택한다.[33]
이렇듯, 동탁의 병크 등등으로 화폐의 공신력이 바닥을 쳐버려서 오수전이 폐지되었는데 그 후 조비, 조예 시기 화폐 재건 시도가 있었다. 조비도 즉위 초에 오수전 회복을 시도했고 조예가 즉위하고서도 폐지했던 오수전을 다시 발행하자고 한 것이다. 당초 조비가 221년 초에 후한말 난리로 인해 폐지된 오수전 사용을 회복시켰다가 위나라에서 곡물값이 너무 비싸니까 다시 오수전을 폐지하고 곡식과 비단(穀帛)을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를 교묘하게 속이는 방법이 점차 많아졌다. 서로 다투어서 곡식을 물에 적셔서 이익을 보려 하였고, 얇은 비단을 가지고 교역을 하여서, 비록 엄한 형벌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금지시킬 수 없었다. 사마지 등이 조정에서 크게 토론을 벌이며 생각하길 "전(錢, 돈)을 사용하는 것은 나라를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벌을 줄일 수 있으니, 지금 오수전을 만들어서 편하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227년 여름, 4월 을해일에, 다시 오수전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폐경제를 어느 정도 복구시킨 촉한을 제외한 중원에서는 이런 현물거래가 계속 성행했으며 오나라는 촉한의 화폐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후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중원에서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대개 내륙에서 농업을 생계로 삼던 사람들과 비교할 때 해안가 사람들의 생업활동에 대한 통치자들의 시선은 그리 좋지만 않았던 것 같다. 정혼사마지등애로 대표되는 조위 위정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해안 지역의 생업활동은 장려의 대상이라기 보단 계도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7. 문화


후한 말기의 전란으로 소실된 문화를 재발굴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위는 여러모로 후한의 문화를 계승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호족 세력이 발달하여 귀족화되면서 귀족적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조조, 조비, 조식 삼부자를 필두로 하여 문학이 발달하였는데, 건안 문학이라 불리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조비는 즉위 이후 당시 가장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7명의 문인들의 시를 묶어 건안칠자라 명명하고, <문자경국지대업>이라는 서문까지 작성했다. 또한 조식은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이백과 두보가 등장하기 전까지 운문에서 아주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후한 말의 황폐한 상황을 여러 가지 정책 시행으로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귀족적인 문화가 융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귀족 남자들 역시 패셔니스트하게 노는 것을 즐겼던 모양. 하안은 얼굴에 분칠을 했다고 하고, 조예는 소매가 짧은 옷을 입거나 머리를 길게 길렀다고 한다. 하지만 식자들은 이를 안 좋게 보았다. 이러한 풍조는 서진시대까지 지속되어 왕개석숭같은 사람이 나타나는 배경이 된다.
후한 말기에 널리 퍼져 세력화되었던 민간 도교가 민간의 도인들이 왕과 귀족들에게 초빙을 받는 식으로 제도권으로 편입되면서 귀족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후에 죽림칠현 같이 세상에 초탈하려 했던 사람들이 등장하며 귀족 사회에 청담사상이 유행하는 기반이 되었고 오석산같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중천왕 시기 관나부인의 기사에 따르면, 위나라에서는 장발의 미인이 인기였던 듯하다.

8. 역대 황제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약력
사후 추존
 
고황제(高皇帝)
조등(騰)
조조의 조부, 중국 유일의 환관 황제.
생몰년 미상.
사후 추존
 
태황제(太皇帝)
조숭(嵩)
조조의 아버지, 조등의 양자.
193년 사망.
사후 추존
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
조조(操)
사실상 위나라의 초대 황제.
후한의 위왕.
155년 출생, 220년 사망. 66세.
1대
220-226년
세조(世祖)
/고조(高祖)
문황제(文皇帝)
조비(丕)
위나라의 초대 황제.
187년 출생, 226년 사망. 40세.
2대
226-239년
열조(烈祖)
명황제(明皇帝)
조예#s-2(叡)
정상적으로 권력을 누린 마지막 황제.
205년 출생, 239년 사망. 35세.
3대
239-254년
 
애황제(哀皇帝)
조방(芳)
사마사에 의해 폐위.
232년 출생, 274년 사망. 43세.
4대
254-260년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髦)
사마소에 의해 시해.
241년 출생, 260년 사망. 20세.
5대
260-265년
 
진류왕(陳留王)
원황제(元皇帝)
조환(奐)
사마염에게 선양.
246년 출생, 302년 사망. 57세.

8.1. 계보


  • 분홍색 : 황족 또는 혈연관계
  • 색 없음 : 양자
  • 회색 : 불확실한 관계
  • 취소선 : 다른 사람의 양자로 들어감
  • 남색 : 황제로 즉위한 인물 또는 황제로 추존된 인물(양자로 입적된 경우 글씨가 남색)
  • 初 : 사실상의 초대 군주
  • 末 : 마지막 군주
조절
조등

하후씨 가문(?)
조숭

初. 조조
1. 조비
조창
조우
2. 조예
조림
조해
5(末). 조환
3. 조방
4. 조모
(?)[34]

9. 창작물


전통적으로 위나라는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최종보스의 역할을 맡았는데, 압도적인 규모의 군사력과 인재풀, 경제력 등에서 최종 보스의 역할을 하기엔 이보다 더 좋은 세력이 없다. 특히나 건국자인 조조의 카리스마로 인해 넘사벽의 최종 보스란 기믹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세력.
그렇다고 주연이 되기엔 작가의 내공을 많이 요구하는데, 우선 위의 건국자인 조조의 삶이 너무 파란만장하다보니 조조가 죽으면 위나라 얘기가 심심해진다(...). 조조가 온갖 삼국의 영웅들과 싸우는 모습을 읽고 난 다음에 가끔씩 촉이나 오가 쳐들어오는 거 보면 아무래도 좀 허전하다. 이렇기에 주로 위나라 중심의 창작물에선 조조 사후에 사마의를 주연으로 대두시키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필히 사마씨의 찬탈로 이어지기에 위빠로선 허무해진다(...). 즉, 위나라를 주인공으로 하려면 조조라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공백을 잘 메우는 것이 중요하다.
예외적으로 군사연맹(한국명: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오로지 위나라만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성공했는데,[35] 이쪽은 사마의를 주인공으로 해서 위나라 정권 내부의 갈등을 다룬 정치극이 됨으로서 가능했다. 사마의가 주인공이며 조비 등 다른 조씨 캐릭터들도 캐릭터를 잘 다져둔 덕분에 조조가 죽은 이후에도 스토리를 알차게 꾸릴 여지가 많이 남았다. 여기에 갈등의 주요 요소가 천하 통일이 아니라 위나라 내부의 정치다툼이 되다보니 전쟁이 아니더라도 살벌한 암투가 많이 나온다. 조비와 조식의 세자 경쟁이 끝났나 했더니 사마의가 구품관인법을 진군과 만들어 조씨 외척과 대치하는 등, 전쟁이 없어도 긴장감 있는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더불어 기존에 주연급으로 주목받지 못한 양수나 정의 등의 인물들도 재조명해서 이야기를 밀도있게 꾸몄다.[36]
사마의가 후반부 위나라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면서 생긴 새로운 트렌드가 있는데, 바로 찌질하고 무능한 조씨 일족(...).[37] 이는 사마의의 고평릉 사변을 변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의가 "주인공" 급으로 격상되다보니 그와 대립하게 된 조씨 일족이 오히려 이미지상 손해를 보게 된 것. 라이벌 제갈량이 촉나라 내부의 문제로 발목잡히는 것처럼 사마의도 압도적인 위나라의 국력과 제갈량 못지 않은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적 때문에 고생하는 스토리가 종종 나온다.
일례로 삼국 같은 경우는 조진이 무능하게 나오는데, 사실 위나라가 재조명받기 전엔 오히려 사마의보다는 못해도 위나라를 떠받치는 총사령관으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사마의에게 능력이 부족한 자신 대신 위나라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충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오히려 위나라가 폄하되었다고 얘기되는 몇몇 연의의 판본에서는 제갈량이 조진을 경계하는 묘사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달리 위나라 중심인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사마의의 정적으로 등장하며 외척 부심을 부리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이고 있는 것은 덤. 조홍 같은 경우도 대군사 사마의에선 굉장히 무개념한 인간으로 묘사되며 진삼국무쌍의 경우 진나라 시나리오가 추가된 작품들에서는 조상 같은 캐릭터가 찌질하게 나온다.
이런 작품들에선 기존의 "제갈량의 맞수는 오직 사마의"라는 인식이 더 강해져서 사마의를 제외한 조씨 일족은 제갈량에게 영혼까지 털리는 주제에 사마의가 어떻게 해볼려고 하면 발목을 잡는 모습도 보인다. 특히나 대군사 사마의의 경우 후반에 선악대비가 심해지며 악역으로 대두된 것이 조홍과 조진으로 치졸하고 무식한 방식을 쓰는지라 1부 초반에 가문을 살리고 흠모하는 조식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복잡한 이미지의 양수와 크게 비교된다.[38]
이외의 난점은 아무래도 기록이 풍부하다보니 위군 장수들이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기록이 거의 다 전공 관련이다보니 재밌는 캐릭터를 만들려면 작가의 상상력이 좀 뛰어나야 한다. 그렇다보니 위나라 중심으로 스토리를 짜도 은근슬쩍 연의의 캐릭터성을 넣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특히 하후돈), 굳이 역사 고증을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장합같이 역사적 배경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즉, 주인공 세력으로 쓰려면 의외로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이다. 열전에서 성격의 장단점이 잘 드러나거나 임팩트있는 활약이 종종 보이는 촉/오의 인물들과는 달리 위나라 측은 대부분이 모범생에 인품이 훌륭하고 받은 임무를 잘 시행하며 잘 싸웠다는 게 대부분이다보니... 그나마 장료는 합비공방전에서 보여준 무쌍이나 항장이었다가 위나라의 명장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스토리가 있으며, 장합은 커리어의 굴곡이 뚜렷한 편.
삼국지 시리즈에선 최강의 세력으로 등장해왔다. 건국자인 조조부터가 총합 능력치 1위를 항상 먹는 먼치킨 군주인데다가 인재풀도 두텁다보니 가장 약한 초반 시나리오에서도 다른 약소 세력과 비교하면 플레이하기 쉽고, 높은 난이도에서 인공지능이 플레이하면 순식간에 다른 세력들을 처묵하며 비대해지는 세력을 본다. 반란군과 적대 이민족 개념이 없는 삼국지 13에선 다른 세력이 홀로 상대하기 힘들다. 아직 조위가 정식으로 건국된 후의 시나리오는 없지만, 실상 조위가 건국된 것이나 다름없는 조조의 하북 차지 후의 시나리오에선 정말 답이 없다. 내부의 걱정거리도 없겠다 조조가 모든 하북과 중원에 빽빽히 밀집해 있는 도시들의 병력을 전부 다른 세력 침공에 동원할 수 있기에 동원력부터가 다른 세력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SD건담 삼국전에서는 '기가'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조비 건담이 신하들에게 건국을 선포한다.
보통 위나라를 주인공이나 주역으로 하면 대개 현실주의적이고 냉철한 다크 히어로 내지 안티 히어로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 정도가 심하면 오히려 반감을 사기도 한다[39]. 다만 특이하게도 위나라 중심이면서도 주인공을 극딜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대군사 사마의는 1부에서는 사마의를 미화하나 했더니 2부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잔혹해지는 사마의를 보여주며 보기에 따라선 사마의의 처세술도 기회주의자, 위선자로 볼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더불어 왕 샤오레이의 소설 "삼국지 조조전"의 경우 백성들의 힘든 삶을 보여주며 이를 고치려는 조조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조조가 점점 권력을 탐하며 비열하게 변해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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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창'은 수도였던 시기 조비에 의해 생겨난 말이다. 자세한 건 허창 문서 참조.[2] 군인까지 포함한 숫자로 위략에 의하면 삼국 시대 말기 군인의 숫자는 50만 명이었다고 한다.[3]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4] 당시 위는 한나라를 계승하였기에 한사군도 그대로 지배하였으므로 한반도 이북도 위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다. 중국 세력의 한반도 이북 직접 지배가 종결된 시기는 4세기 초반이다. 다만 당시 삼국의 세력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든 이 지도조차 위나라와 오나라를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위나라 같은 경우는 양주, 옹주, 병주, 유주 지역에 대한 통치력이 약했고, 요동과 요서, 한반도 북부 지역도 분쟁지역에 가까웠다. 또한 오나라는 강릉 이남 형남 지역과 교주가 오나라 중앙 권력의 통치력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라 보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저 당시 장강 유역을 제외한 양주는 미개발지거나 산악 지형인데 전체를 행정력이 닿는 부분이라고 표현하는 건 어폐가 있다는 시각이다. 후한 말부터 수십 년간 이어진 미증유의 난세 때문에 삼국시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중앙 권력의 통치력이 급전직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한 기준으로 5천만이 넘던 중화의 인구는 삼국시대 기준으로 850만 명 정도로 급격히 줄어든다. 물론 실제 인구수가 급감했다기 보단 중앙 권력의 행정력에 잡히는 인구수가 그렇게 됐다는 얘기인데, 이 지도는 그런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삼국시대의 행정력 자체를 과대평가했다는 지적이 많다.이지도의원본도 중국어위키백과에서온것이다.[5] 위(魏)나라 뿐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위(衛)나라도 있어서 이 나라와도 혼동이 오는 경우도 있다. 이 두 나라는 현대 한국어 뿐만 아니라 표준중국어로도 발음이 같다.[6]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가 금새 무력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천하삼분지계는 세 나라 가운데 하나가 10의 힘을 가지면, 나머지 5의 힘을 가진 나라 둘이서 연합하여 10대 10의 구도로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한다는 개념인데, 문제는 위나라의 국력이 10이라면 촉한은 2, 오는 4에 불과했던 것이다.[7] 최대로 잡는 학자도 600만을 넘지 않는다. 삼국시대 실질적 행정능력으로 통제 가능한 인구는 위, 촉, 오를 도합하여 900만 수준이었다.[8] 실제로 둘은 확고한 동맹까지는 아니고 이릉대전처럼 싸우기도 했지만 그 외 기간에는 한 쪽이 치고 올라가면 위나라가 한 쪽 전선에 집중 못 하도록 비슷한 타이밍에 같이 공격해주거나, 적어도 서로 싸우는 건 자제하는 사실상의 불가침조약을 맺어 협력했다.[9] 실제로 총 지휘관이 손권에서 손권보단 군재가 위인 제갈각으로 바뀌자 손오는 대놓고 조위와 회전을 시도하려고 했다. 물론 조위가 이런 전략에 넘어가질 않아 제갈각 역시 결과는 제2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손권과 같았다.(...)[10] 손오는 근본적으로 호족 연합체 성격이 강해 중앙에서의 명령이 절대적으로 먹히는 국가가 아니었다.[11] 삼국시대의 관점으로만 보면 손오의 거듭된 북진 실패 때문에 회남-합비전선이 난공불락의 전선이라는 이미지가 강할 수밖에 없는데, 후일 남조 왕조들과 남송까지도 회남 지역 정도는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갔다. 심지어 동진 이래 육조 최약의 왕조였다는 조차도 진욱 시절에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회남 일대를 차지한 적이 있다. 손오가 야전에서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위의 수뇌부 역시 손오의 이러한 처참한 야전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남 전선에 병력을 그닥 배치 안 한 것일 수도...(...)[12] 조위의 인구가 삼국 중 가장 많기는 했지만 문제는 국경선 전체가 전선이다. 이는 최약체이기는 하나 현지의 이민족과 그런대로 잘 지낸 촉나라나 현지의 이민족과 사이 안 좋기는 그래도 마찬가지지만 흉노, 고구려, 강족 정도의 수준의 규모는 되지 못한 오나라와는 차이점이다. 이런 상황이니 인구가 많아도 지켜야 할 전선이 타국보다 넓은 위나라는 많은 인구의 장점을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13] 특히 양번 공방전 당시 관우에 의해 양번이 함락 직전까지 몰리자 멘붕에 빠진(...) 조조가 회남 전선의 총사령관인 장료까지 차출했을 때가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손권과 여몽이 결과적으로 조조에게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해서 그랬지, 이들이 그 공백을 틈타 그대로 회남을 뚫었으면 조조는 관우가 양번을 뚫었을 때보다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양번과 허도 사이에는 남양 땅이라도 가로막고 있지만 회남이 뚫려버리면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가 위험하게 된다. 훗날 일이지만 제갈탄이 봉기해 회남을 장악하고 손오까지 끌어들이자 조위의 권력자인 사마소는 지체없이 대촉 전선의 군대까지 차출해 20만의 물량을 쏟아부어 즉각 제갈탄의 난을 진압한다. 그만큼 중원 땅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회남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14] 대체적으로 강남에서 시작한 국가는 결국 하북에서 일어난 국가에게 먹히는 패턴이 반복되었고 그나마 강남에서 시작한 세력이 천하통일을 한 것도 대체적으로는 하북이고 강남이고 쫙 갈라진 채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강남이 강북을 넘어서는 경제력을 갖춘 것도 무려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다. 육조시대 말 진나라만 해도 인구가 8백만 남짓이었는데 북쪽의 수나라는 무려 4천만이었으니 결국 하북의 왕조를 격파하지 못하면 자기가 멸망하는 건 당시 강남 왕조들의 숙명이었다.[15] 사실상 위나라는 조조가 왕이 되면서부터 개국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건 왕국이고 조비는 제국을 열었기 때분에 여기에 표기하였다.[16] 일본의 막부 정권이 교토의 천황 조정과는 별도의 정부를 구성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17] 조모가 시해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침과 함께 진의 례를 제정한 순욱의 아들 순의, 조위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가규의 아들 가충, 그 외 진교의 아들 진건, 악진의 아들 악침, 배잠의 아들 배수, 왕창의 아들 왕혼 등 많은 개국 공신 후손들이 이때 조씨를 버렸다. 이들은 순욱을 주축으로 한 영천 호족 청류파 집단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순욱이 조조에게 버림 받은 만큼 조씨 일가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조씨를 배반하는 것도 어찌보면 사필귀정이다.[18] 정확하게는 등애가 멸망 시켰다.[19]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위세를 올려서 선양을 받을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20] 그나마 얌전히 선양을 한 조환은 조모처럼 살해당하지는 않고, 헌제나 조방처럼 서진 조정으로부터 나름 대우를 받으며 안락하게 살다가 천수를 다했다.[21] 사실 삼국시대의 세 나라는 모두 호족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세 나라 모두 멸망할 때까지 호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22] 조조 세력의 중심들이 한창 젊을 때 환관과 외척에 의해 나라가 패망한 경험을 겪은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23] 조상이 왜 중서령을 안 거쳤느냐 하면 손자, 유방 일파가 완전히 자기 사람이 아니라 봤기 때문일 것이다.[24] 사실 중요 사대부에 대한 처벌만 기록되어 있으며 '환관 따위 처벌에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25] 위진남북조사, 이공범.[26] 영토가 북쪽에 위치하여 북방의 유목 민족들과 거래가 많았다. 그래서 그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조위는 막강한 기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27] 오와 촉은 물론 이민족들과 고구려에게도 압도적인 강국이라서 그들도 위와 맞설 생각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28] 일설에 따르면 10만의 오기(오탈자)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위군은 1차 전투에서 3천 + 2차 전투에서3천으로 6천이 죽었는데, 1만 명 중 6천이 죽으면 사실상 전투불능이라, 2만 5천의 대군을 상대해 1만 8천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10만 설을 지지하는 학자도 있다.[29] 고구려군이 입은 피해가 1만 8천.[30] 위나라 병력이 입은 피해는 8천.[31] 현재는 장강 이남은 2-3모작을 하는데다가, 기후도 훨씬 좋기 때문에 이쪽의 농업 생산량이 훨씬 많다. 삼국시대 이후 5백년 후인 당나라 때만 해도 장강 이남의 상당수가 밀림으로 뒤덮혀 있었고, 현재 중국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광둥 성홍콩은 아예 오랑캐의 영역이었다.[32] 한나라 시절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33] 한대의 인두세는 어른 기준으로 1년에 120전이었다. 아이면 이보다 적은 액수를 냈고. 징세 대상의 연령에 따라 개인 단위로 세금을 받는 건 인구 파악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가능한 조세 방식. 즉 다 깨강정 나서 인구이동이 혼란하던 후한말엔 어림도 없다.[34] 위씨춘추나 세설신어에는 조방을 조해의 아들이라 기록했으나 신빙성이 부족함.[35] 전쟁은 1부 내내 나오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관우는 배역조차 없다.[36] 다만 군사연맹도 조조가 죽자마자 드라마가 사마의가 주인공임에도 힘이 빠져버린다.[37] 정확히는 조조와 그 아들들을 제외한 조씨 일족.[38] 그나마 조진은 2부에서 제갈량에게 농락당한 뒤 사마의에게 군권을 맡기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사마의를 견제해야 된다고 조예에게 얘기하기는 하지만.[39] 진삼국무쌍 8이나 창천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