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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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4]
1.1. 축구 선수
1.1.1. 클럽
차초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에두아르도 곤살레스 발리뇨는 1927년 당시 갈리시아 지역 리그 소속이었던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에서 데뷔하였다. 당시 데포르티보는 스페인 전국 리그가 출범하면서 라리가 2에 속해 있었고 차초가 1934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뛰는 동안 1931-32 시즌의 라리가2 4위가 팀의 최고 성적일 정도로 데포르티보는 별 볼 일 없는 팀이었다
1934년, 차초는 새로 라리가에 승격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팀을 옮겼고 이 곳에서 전국 단위 우승컵을 들지는 못했지만 나름 1부 리그의 맛을 보았다.
스페인 내전이 터지고 차초는 다시 친정팀 데포르티보의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1940년, 데포르티보는 라리가2 우승을 차지했지만 라리가로의 승격이 이뤄지지 않았고 1940-41 시즌에 드디어 라리가 2 2위로 라리가 승격을 확정지었다.
라리가에서 차초는 데포르티보에서 잠시 선수 겸 감독 역할을 맡기도 했고 데포르티보는 라리가에 잔류하다 1944-45시즌에 다시 라리가2로 강등당했다. 차초는 1946년, 라리가 2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1.2. 국가대표
차초는 스페인 국가대표로 3경기에 출전했다.
차초의 데뷔 경기는 1933년 5월 21일의 불가리아전이었는데 스페인은 불가리아를 13대0으로 초전박살을 냈고[5] 차초는 이 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두 번째 경기는 포르투갈과의 월드컵 지역예선 1차전이었고 차초는 전반 3분 만에 선제골을 넣어 9대0 대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차초의 세 번째 A매치이자 마지막 경기는 월드컵 8강 재경기였다. 차초를 포함한 스페인 선수 모두가 이탈리아의 골문을 여는 데 실패했고 스페인은 이탈리아의 주세페 메아차에게 선제 결승골을 얻어맞고 0대1로 패했다.
차초는 대표팀에서 총 3경기 출전, 7골을 기록했다.
1.2. 이후
차초는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친정팀의 감독을 다시 맡은 적이 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차초는 데포르티보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꼽으면 반드시 후보에 거론될 만한 선수이다.
데포르티보의 홈구장 에스타디오 리아소르에는 1988년부터 그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3. 수상
3.1. 클럽
- 라리가 2 준우승 2회: 1939–40, 1945–46(데포르티보 라코루냐)
- 갈리시아 지역 리그 우승 5회: 1927–1928, 1930–1931, 1932–1933, 1936–1937, 1939–1940(데포르티보 라코루냐)
- 코파 갈리시아 우승 1회: 1945-46(데포르티보 라코루냐)
- 갈리시아 지역 리그 준우승 4회: 1929–1930, 1931–1932, 1933–1934, 1938–1939(데포르티보 라코루냐)
- 코파 갈리시아 준우승 1회: 1935–1936(데포르티보 라코루냐)
[1] 일부 기록엔 차코(Chaco)로 표기되어 있지만 오기이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이 경기가 스페인 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 경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