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8강 이후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1라운드 이후 8강, 4강, 3&4위전, 결승에 대하여 정리하는 페이지.
1934년 월드컵 8강은 1934년 5월 31일부터 시작되었다. 이 당시 경기는 연장을 치르고도 무승부로 끝나면 재경기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8강의 이탈리아 vs 스페인의 시합이 그리하였다. 이 경기는 5경기로 서술한다.
1. 8강
1.1. 1경기 이탈리아 1 vs 1 스페인
두체[3] 의 염원대로 이탈리아은 8강에 안착하였고 다음 상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당시 유럽에서 자타공인 최강이었던 잉글랜드를 비영연방팀 중 최초로 꺾었다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까지 이탈리아와의 전적에서 3승 4무 3패의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의 씨X 니들. 이 대회에서 우승을 못하면 다 X되는거야. 아주 X되는거라고라는 지상 명령 과 함께 홈팬들의 절대적인 성원을 업고 있는 이탈리아가 더 유리한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경기 시작과 함께 이탈리아는 맹공을 펼쳐 스페인의 문전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홈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탈리아는 전반 30분, 스페인의 레게이로에게 카운터 펀치를 맞았고 더욱 약이 올라 공세를 강화했다.
여기서 스타로 떠오른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스페인의 주장이자 주전 골키퍼였던 리카르도 사모라[4] 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내로라하는 공격수들인 주세페 메아차, 조반니 페라리, 엔리코 구아이타의 슈팅을 잇달아 선방하여 이탈리아 홈팬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선방에도 불구하고 44분에 페라리에게 동점골을 허용하여[5] 경기는 연장전에 접어들었고, 결국 1대1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 다음 날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1.2. 2경기 오스트리아 2 vs 1 헝가리
오스트리아는 전반 8분 만에 주장[6] 호르바트가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 나갔다. 그리고 후반 6분 또 다른 공격수 치셰크가 추가골을 넣어 승부를 오스트리아 쪽으로 가져가는 듯 했지만 헝가리의 샤로시 죄르지가 후반 15분에 얻은 페널티 킥 찬스를 골로 연결하여 승부를 안개 속으로 빠뜨렸다.
하지만 그 안개를 걷어버린 것은 오스트리아가 아닌 헝가리였으니 헝가리의 마르코슈 임레가 페널티 킥 골이 터진지 3분 만에 퇴장을 당함으로서 헝가리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오스트리아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3. 3경기 체코슬로바키아 3 vs 2 스위스
전력상으로 보면 체코슬로바키아가 스위스에 비해 앞섰다. 하지만 스위스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갖지 못한 또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응원이었다. 당시 경기를 관람한 관중이 12,000명이었는데 그 중 만 명이 넘는 수가 스위스 원정 응원단이었다.[7]
멀리까지 원정 응원을 와준 스위스 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18분 만에 스위스의 킬홀츠가 선제골을 넣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도 6분 후 스보보다의 골로 응수하였고 후반 4분 만에 소보트카의 역전골로 경기를 뒤집고 말았다. 스위스는 후반 33분, 예기의 동점골로 경기를 원점으로 끌고 가서 스위스 팬들의 기대를 높였지만 그 기대는 4분 만에 대회 득점왕이 될 네예들리가 철저히 즈려밟아버렸다.
1.4. 4경기 독일 2 vs 1 스웨덴
이 경기에서 승부를 가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분이면 충분했다. 독일의 카를 호만이 후반 15분과 18분에 연속으로 골을 넣어 팀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스웨덴은 후반 37분에서야 괴스타 둔케르가 만회골을 넣어 쫓아가려 했지만 시간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스웨덴의 이변은 1라운드에서 끝나고 말았다.
1.5. 5경기[8] 이탈리아 1 vs 0 스페인
스페인의 선발 명단에서 전날 미친 활약을 보였던 리카르도 사모라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부상#s-2의 악화였는데 그 부상은 전 날의 경기에서 조반니 페라리에게 유일하게 골을 먹던 상황에서 충돌로 인해 입었던 것이었다. 사모라는 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잇단 선방으로 무승부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스페인의 주장 완장은 사모라의 앞에서 1차 방어선 역할을 했던 하신토 킨코세스가 차고 이탈리아과의 재경기를 준비했다.
경기는 주세페 메아차의 골로 1대0으로 이탈리아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앞서 열린 경기와 함께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된다. 그 이유는 판정 시비 때문인데 이탈리아의 격렬한 플레이에 제동을 걸어야할 심판의 휘슬이 계속 침묵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이탈리아 선수들이 거칠어서 힘든데 관중들은 귀청 따갑게 ‘이탈리아 만세~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하며 살벌한 응원전을 펼쳐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해야할 심판까지 세트로 위축된 상황이라 스페인이 이 경기에서 이길 확률은 없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결국 이 경기에서 심판을 맡았던 스위스의 르네 메르세는 나중에 스위스 축구 협회로부터 정직 처분을 당한다.[9]
2. 4강
2.1. 1경기 이탈리아 1 vs 0 오스트리아
사실 당시 개최국이었던 이탈리아보다 오스트리아를 우승 1순위로 예상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월드컵이 열리기 3달 전의 친선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를 4대2로 이겼는데 그 장소가 이탈리아의 홈인 토리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 마티아스 신델라까지 빠진 상황에서 거둔 승리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자신감은 더욱 컸다. 이탈리아 역시 이 패배로 인한 충격은 매우 커서 이탈리아와 유벤투스의 주전 수비수이자 당시 이탈리아 A매치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던 움베르토 칼리가리스도 이 시합을 끝으로 더 이상 A매치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다.[10]
이런 상황의 시합이라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다시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올라가겠구나 하는 기대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역시 베니토 무솔리니의 지상 명령과 이탈리아 팬들의 광적인 응원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을 뒤엎은 이탈리아 선수들의 투지를 바탕으로 아르헨티나에서 귀화시킨 엔리코 구아이타의 결승골을 끝까지 지켜 1대0의 신승을 거둔다. 전반 19분, 이탈리아의 라이문도 오르시가 왼쪽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렸고 경합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골키퍼 페터 플라처에게 이탈리아의 메아차와 스키아비오가 파울을 범하며 플라처가 놓친 공을 구아이타가 잡고 득점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는 결승골의 주인공 구아이타가 아닌 이탈리아의 센터 하프 루이스 몬티였다. 몬티는 이 경기에서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신델라를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데 성공하여 역시 자신이 세계 최고의 터프 가이이자 수비수라는 것을 증명해 냈다. 하지만 오점도 꽤나 분명한 경기임에는 틀림없는데 몬티가 신델라를 막는 과정에서 숱한 반칙을 저질렀지만 심판의 휘슬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경기 내용을 대화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1. 평상시
몬티: '''파울 좀 하면 어떠냐 신델라만 막으면 그만이지'''
(퍽)
신델라: '''꽥!!'''
2. 위급한 상황 시
몬티: '''안 되겠소. 쏩시다!'''
(빠각)
신델라: '''이보시오, 이보시오! 심판양반!! 이거 파울 아니오? 아이유우!'''
심판: '''안정을 취하세요. 흥분하면 경기에서 퇴장당할 수 있습니다'''
신델라: '''파울이 아니라니, 아니, 이게 파울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에잇 파울이 아니라니!! 몬티 이놈... 이게, 이게 파울이 아니라니!! 이게, 앓흐 앓흐 앓흐...'''
(1과 2의 상황이 90분까지 계속 반복)
2.2. 2경기 체코슬로바키아 3 vs 1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올드르지흐 네예들리가 이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다. 이 해트 트릭으로 인하여 네예들리는 득점 선두로 올라갔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결승행 티켓도 선물받았다. 그리고 히틀러는 이 경기에서 패한 독일 선수들을 환영해주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3. 3&4위전
3.1. 오스트리아 2 vs 3 독일
역대 월드컵 최초로 3&4위전이 나폴리의 조르조 아스카렐리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시합에서 먼저 기세를 올린 쪽은 독일이었다. 경기를 시작한지 25초 만에 독일의 에른스트 레너가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12] 마티아스 하이데만의 슈팅을 오스트리아의 골키퍼 플라처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레너가 재차 슈팅을 시도하여 골을 기록했다.
팽팽한 경기 속에 전반 27분, 독일의 에드문트 코넨이 추가골을 넣었지만 유럽 최강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의 뒷심은 독일을 당황케하기에 충분했다. 코넨이 추가골을 넣은 지 1분 만에 주장 호르바트가 만회골을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패한 것이 후유증이 컸기 때문일까? 독일의 레너가 전반 42분에 골을 추가함으로서 독일이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결국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꺾고 3위를 차지하였다.
4. 결승
4.1. 이탈리아 2 vs 1 체코슬로바키아
이 대회의 결승전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펼쳐졌다. 이탈리아인들은 당시 굶주림 등으로 인한 불만을 축구장에서 선수들에게 풀곤 했다. 매일 응원이라고 하는 게 살벌하게도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였다. 게다가 이 경기는 베니토 무솔리니까지 직접 관람을 했다.[13] 이탈리아의 긴장감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14]
지면 ㅈ된다는 절박함과 최강 오스트리아를 꺾었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이탈리아였지만 역시 리카르도 사모라, 잔피에로 콤비와 함께 유럽에서 최강을 다투던 골키퍼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가 버티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골문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시종일관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던 가운데 후반 26분 체코슬로바키아의 푸치가 선제골을 넣었다. 이탈리아의 관중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는지 더욱 흉포해지기 시작했다. 무솔리니의 얼굴도 같이 굳어졌다. 응원은 광적으로 변해갔다. 응원이 아닌 야유가 로마의 스타디오 PNF를 가득 메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를 외치던 관중들이 아니었다. 응원 구호도 그냥 '죽어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탈리아를 구한 사람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라이문도 오르시였다. 그는 후반 36분, 오른쪽에서 구아이타의 패스를 받아 골대를 등진 채 오른발로 공을 잡은 뒤 그대로 골문을 향하여 왼발로 회심의 터닝 슈팅을 날렸다. 볼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왼쪽으로 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골대 오른쪽을 꿰뚫었다. 이 기적#s-2.3과도 같은 골로 이탈리아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15]
경기는 그대로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이 대회 세 번째 연장전이자 결승전 첫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연장 전반 5분, 체코슬로바키아의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주세페 메아차의 패스를 받은 스키아비오가 오른쪽 진영에서 날린 슈팅이 플라니츠카의 방어를 뚫고 골문에 박혔다.
이탈리아는 결국 이 골을 끝까지 지켜 1934년 월드컵의 챔피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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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신난다~ 우승이다.
[1] 8강 1경기의 재경기[2] 괄호안은 한국시간[3] 영도자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무솔리니의 칭호이다[4] 이 사람이 바로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에서 최소 실점을 기록한 골키퍼에게 주는 사모라 상의 모티브가 된 골키퍼이다.[5] 여기에서 넣은 페라리의 골 상황은 사모라에 대한 명백한 파울이었기 때문에 골이 취소되었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6] 피파 공식 홈페이지 기준으로 호르바트가 출전한 경기에는 호르바트가 주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위키피디아와 RSSSF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모든 경기에 스미스티크가 주장으로 출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 유럽 지도를 보면 이탈리아의 바로 위는 스위스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토리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이고, 당시에는 알프스에 각종 터널들도 뚫려있는 상황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전 당시 마르세유를 오렌지 색 물결로 물들였던 네덜란드 응원단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8] 8강 1경기의 재경기[9] 사실 이 메르세는 스위스 컵 대회 결승 등 굵직한 대회를 많이 경험하였고 이 대회에서 개막전을 맡는 등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받던 심판이었다. 게다가 중립국인 스위스 출신이라 당시 첨예했던 국제 정세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껏 판정을 할 인물이라는 평가가 컸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뇌물 수수의 의심도 받는 등 여러모로 체면을 구기게 된다.[10] 당시 감독이었던 비토리오 포초가 칼리가리스의 플레이에 실망했다는 설이 제일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 월드컵에서 경기에 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명단에 포함은 시킨 걸로 봐서 완전히 기대를 접지는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11] 전통적으로 독일과 유니폼 색깔이 흰색으로 같았기 때문에 인근의 SSC 나폴리의 유니폼을 빌렸다.[12] 지금도 역대 월드컵 최단 시간 골기록 부문 3위의 기록이다.[13] 사실 무솔리니는 매 경기를 관람했지만 예선과 결승의 긴장감은 당연히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14] 이탈리아가 만약 경기에서 지면 진짜 피바다가 될 기세였다. 무솔리니가 나서서 이탈리아 선수들을 총살시키지 않는다 해도 흥분한 관중들에 의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15] 정말 기적 맞다. 오르시가 이 광경을 재현하기 위해 나중에 기자들 앞에서 비슷한 상황을 스무 번 만들었지만 그 때는 재현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