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겸 감독

 


1. 개요
2. 실존하는 선수 겸 감독
2.1. 야구
2.2. 축구
2.3. 기타 종목
3. 창작물에서의 선수 겸 감독


1. 개요


스포츠에서 선수감독 직책을 모두 겸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영어로는 플레잉 매니저(Playing Manager)라고 한다.
보통 프로스포츠 구단에서는 선수와 코치, 감독으로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드물게도 고참 선수들 중 코치와 선수 역할을 병행하는 플레잉 코치가 생길 수 있으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드문 사례로 선수단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 감독이 직접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 역할까지 겸해가며 활약을 펼치는, 선수 겸 감독이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체로 프로스포츠에서는 시즌 종료 후 감독직이 비어 있을 시 마땅한 선택지가 없을 경우, 선수단 사이에서 인망이 높은 선수를 감독으로 선출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마추어 스포츠에서는 명감독을 영입하기에는 자본이 부족하거나 스포츠단의 투자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스포츠 업계와 관련 없는 인물을 감독으로 고용하거나 감독을 바지사장으로 두고 한 선수가 감독을 대신해서 선수단을 통솔하는 안습한(...) 케이스도 있다.
옛날에는 선수층이 얇고 감독감도 적어서, 가장 유서깊은 프로스포츠 리그 중 하나인 메이저리그에서조차 선수 겸 감독이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하는 경우도 1901년 이후 5번 있었다. 가장 최근의 경우는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유격수 겸 감독 루 보드로[1]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일단, 학원스포츠를 거친 수많은 유망주들 중에서 명선수로서의 자질이 있는 몇몇 선수만이 프로에서 살아남는 게 프로스포츠의 법칙인데, 더욱이 명선수의 조건에 부합하는 뛰어난 운동신경과 자기관리, 그리고 명감독의 조건에 부합하는 선수단 통솔 능력이나 작전 수행능력 등을 모두 갖추는 선수는 좀처럼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예로 KBO 리그만 해도 선수 겸 감독은 프로 원년 MBC 청룡을 지휘했던 백인천이 유일무이한 사례이며, 일본프로야구에서조차 선수 겸 감독으로 양 뱡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인물은 난카이 호크스노무라 카츠야 말고는[2] 전혀 없다시피하다. 20세기에는 스포츠 의학 그런 거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선수들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수 겸 감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나, 스포츠 의학과 각종 훈련, 분석기법이 고도로 발달된 21세기로 가면서 선수, 코치, 감독 외에도 트레이너라든가, 전력분석원 같은 프로스포츠와 관련된 직업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운동능력과 판단력 두 가지를 모두 신경써야 하는 선수 겸 감독은 갈수록 사라져 가는 게 현실이다.

2. 실존하는 선수 겸 감독


이름 - 선수 겸 감독으로 재직했던 팀(재직년도) 순으로 기재바란다.

2.1. 야구



2.2. 축구



2.3. 기타 종목


  • 빌 러셀 - 보스턴 셀틱스(1966~1969)[9]
  • 레니 윌킨스 - 시애틀 슈퍼소닉스(1970-1972),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1974-1975)
  • 송병구[10] - 삼성 갤럭시 칸(스타크래프트 2)(2015~2016)
  • 강광배 -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프론트맨 겸 감독(2010)
  • 이형섭 - FXO.KR(스타크래프트 2(2012 ~ 2013)
  • 박상익 - oGs(스타크래프트 2)

3. 창작물에서의 선수 겸 감독


  • 슬램덩크 - 김수겸[11]
  • 아이실드 21 - 히루마 요이치[12]
  • 쿠로코의 농구 - 하나미야 마코토
  • ONE OUTS - 토쿠치 토아[13]
  • 전직고수 - 엽수
[1] 그것의 인디언스의 마지막 우승이다. 이 공적으로 그는 영구결번까지 되었다. 더우기 선수로서도 뛰어나서 리그 MVP까지 된, 우승감독 겸 MVP라는 영원히 다시 나올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2] 그마저도 말년엔 구단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 롯데 오리온즈, 세이부 라이온즈를 떠돌며 보내야 했다. [3]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4] 메이저리그 최후의 선수겸 감독.[5] 그냥 그런 정도의 활약이 아닌, 4할 타자다.[6] 이후 전임 감독으로 계약[7] 이후 다음 시즌부터 은퇴후 정식 감독으로 부임[8] 1990년에는 선수로만/ 91년부터 93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94년부턴 선수 은퇴 이후 감독으로 활약했다.[9] 1968, 1969년에 선수 겸 감독으로 우승한 후 은퇴했다. 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자 최초의 흑인 감독 우승자이기도 한데, 첫 시즌인 66-67시즌에만 당시 최고전력을 자랑하던 필라델피아와 라이벌 윌트 체임벌린에게 패했을 뿐, 그 다음해에는 같은 식서스에게 1승3패로 뒤지다가 역전해서 업셋, 그 다음해에도 압도적인 전력의 레이커스 (체임벌린이 여기로 이적했다)를 상대로 7차전 만에 원정에서 승리, 역사상 최초로 파이널 7차전에서 원정팀이 승리한 케이스를 만들었다. 여러모로 극적이었던 시절. 69년에 우승 후 러셀은 이전 우승과는 비교도 안된다며 눈물을 흘렸다.[10] 직함은 코치이지만 수행하는 역할은 감독의 역할이다.[11] 창작물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스. 로컬라이징 이름부터 선수 겸 감독에서 따왔다고 한다.[12] 감독, 코치, 트레이너를 혼자 다 하는 괴물[13] 후반부부터,이쪽은 선수겸 구단주에 가깝지만 감독대신 감독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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