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게링거
1. 개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18년 간 뛴 프랜차이즈 스타.
2. 선수 생활 초기
어린시절 부터 야구를 시작한 게링거는 실력이 너무 뛰어나 2 ~ 3살 연상의 형들과 야구를 했다고 한다. 그는 1920년 파울러빌 고등학교에 진학해 내야수와 투수를 겸업했고, 3년 동안 투수로써의 성적은 단 1패에 불과했다.[1] 그래서 당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그에게 입단테스트를 제시했고, 1923년 디트로이트와 자유계약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포지션은 3루수로, 메이저리그에 발을 디디기 전에는 2루수로는 단 한 차례도 뛰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감독이었던 타이 콥은 그의 포지션을 2루수로 바꿨고, 마이너리그로 보낸다.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1925년까지 쳐박혀 있었고, 1926년 본격적으로 1군에 콜업되어 백업 2루수로써 활약한다.
3. 디트로이트의 간판 타자
풀타임 첫 해, 127안타, 0.277의 타율을 기록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게링거는 꾸준히 활약하며, 팀의 간판타자가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215안타, 131득점, 27도루, 0.339의 타율을 기록하며, 안타, 득점, 도루 부문에서 3관왕에 오르기도 했다.[2] 그리고 그 다음해에 행크 그린버그가 디트로이트에 들어오며, 팀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3] 그리고 부상으로 고전하던 게링거는 1932년 184안타, 1933년 204안타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복귀했고, 1934년에는 .371/.458/.520에 209안타까지 기록하며 자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1935년에는 201안타를 기록하였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유일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기도 했다.
4. 선수 생활 말년
그러나 그도 1938년 이후로는 하락세를 걸었는데 점점 경기 횟수, 안타 개수 등이 줄어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940년 이후 주전에서 밀려났고, 1942년 은퇴한다.
5. 은퇴 후
은퇴 후 그는 1949년 명예의 전당에 6수만에 헌액되었으나, 당시 결혼식이 있었던 이유로 헌액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960년 까지 타이거즈의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90년까지는 쿠퍼스타운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야구 중독. 그가 은퇴하고 나서도 그의 인기를 식지 않았는데 밥을 먹을 때면 팬들이 집 앞에 사인 요청을 해와 고생했다고 한다. 1983년에는 행크 그린버그와 함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영구결번(2)이 되었으며, 그 후 1993년 1월 21일 그 동안 겪어온 발작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