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 애플링
1. 소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한 명 유격수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영구결번자이자 쿠퍼스타운에 입성한 유격수다.
2. 커리어
마이너리그에서는 타격 재능을 맘껏 뽐내며 홈런도 자주 치곤 했던 그였지만, 유격수 수비 실력이 초창기엔 심하게 안 좋았던 점은 시카고 컵스의 입단제의를 받지 못하고 같은 동네에서도 인기에서 밀리던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삭스에서도 초창기에는 훈련 도중에 손가락이 부러져서 시즌을 마감하는등 가지가지[1] 했지만(...) 1933년 더블헤더에서 실책을 범하고 기죽어있던 그에게 감독이 조언한 "홈런 말고도 경기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는 말에 발전의 실마리를 찾고 그 해부터 9년 연속 3할의 스타트를 끊는다. 특히 백미는 1936년으로, 그해 겨우 6홈런으로 '''128타점'''을 찍고 '''.388'''로 1900년대 로저스 혼스비 이후 우타자 최고 타율[2] 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유격수 타격왕'''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다.
1943년에도 타격왕을 차지한 애플링은 1944년과 1945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느라 많은 경기를 빼먹었다. 그는 전쟁 이후에도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겼는데, '''40대의 나이로 OPS .800을 넘은 선수'''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록이냐면... 이를 달성한 애플링 말고 다른 선수가 역대 단 세명 뿐인데, 그들은 1800년대의 캡 앤슨과 역대 40대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 칼튼 피스크, MLB 역대 최고의 리드오프인 리키 핸더슨, 그리고 약즈 뿐이다.(...) 그러다가 1950년 부진하자 바로 유니폼을 벗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프랭크 토마스, 폴 코너코 등과 함께 삭스 프랜차이즈 각종 타자 랭킹에서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3. 은퇴 이후
이후 그는 많은 팀들에서 타격코치로 활동하며 사기적인 선구안과 뱃 컨트롤 능력을 후배들에게 전수했고, 메이저리그 감독도 역임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 7수 끝에 1964년 84%의 득표율로 쿠퍼스타운에 입성했다. 화이트삭스에서는 당연히 그의 번호 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후에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의 팀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다 1991년 1월 초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hortstop (9th)
5.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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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링은 2000년대 말부터 한국프로야구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용규놀이를 궁극에 가깝게 자행한 선수라 할 수 있다. 비록 20년간 통산 홈런이 50개도 안되는 안습한 똑딱이[3] 였지만, 테드 윌리엄스[4] 부럽지 않은 당대 최고의 선구안과 뱃 컨트롤 능력을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파울타구를 양산해내며 상대 투수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곤 했다.
그의 용규놀이의 백미는 한 타석에서 '''28구 던지게 한 후 볼넷(...)'''[5] 이라는 정신나간 컷컷컷놀이를 자행한 기록에서 잘 알 수 있다. 불같은 강속구로 유명했던 당대 최고의 투수 밥 펠러로부터 15연속 파울을 기록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일화로 애플링의 친구들이 경기장으로 애플링을 찾아왔고, 애플링은 친구들에게 사인을 해주기 위해 구단 관계자에게 공 몇 개를 요구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 시기라 경제가 어려웠고, 구단 측에서는 개당 2.75달러나 하는 공이 아까웠는지 지급을 거부해버렸다는 것. 빡친 애플링은 첫 타석에 들어서자 마자 10연속 파울을 기록한 뒤 경기를 보고 있던 관계자에게 "여기 27달러 50센트요. 그리고 난 이제부터 시작입니다."라고 일갈했다. 이후로는 애플링이 공을 달라고 하면 무조건 넙죽넙죽 갖다바쳤다고 한다.
투수들은 차라리 안타를 빨리 맞고 말지 저런 놈과 승부하는건 치가 떨린다고들 했다고. 30년대 양키스의 에이스이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빛나는 투수 레드 러핑은 애플링에게 풀카운트에서 10구 연속 파울 뒤에 볼넷을 내줬고, 다음 타자에게 만루홈런을 맞았다고 한다(..)[6] 아무튼 이 괴랄한 능력을 바탕으로 첫 1933~1941 9년 연속 3할 타율을 친 정교한 컨택과 함께 '''역대 리드오프 출루율 2위에 빛나는 .399'''를 기록, 역대 최고의 리드오프를 논하는 자리에 있어 명함을 내밀게 되었다. 비록 리드오프치고 도루능력은 딱히 뛰어나지 않아서[7] 그쪽 분야의 올타임 본좌인 리키 헨더슨에 비해 많이 밀리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20년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6. 이모저모
- 사실은 왼손잡이였다고 한다. 어릴 적 야구를 배울 때 내야수 툴을 갖췄지만 왼손잡이임을 아쉬워하던 코치의 조언에 따라 오른손으로 야구를 배웠고[8] 타격도 오른손으로 배웠다고.
- 그의 활동 시기는 삭스의 암흑기였기 때문에 2528경기에 출전한 컵스의 어니 뱅크스 다음으로 많은 정규시즌 경기(2422경기)에 출전하고 포스트시즌 경험이 없는 선수로 남게 되었다.
- 1982년 워싱턴 RFK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드 타이머's 게임 행사에서 61세의 워렌 스판을 상대로 비거리 76m 짜리 홈런을 날린 적이 있다. 참고로 그때 애플링의 나이는 75세.
[1] 선수생활 내내 부상에 대한 염려와 엄살이 지나치게 심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Old Aches and Pains'''. [2] 최후의 4할타자 빌 테리와 테드 윌리엄스, 1994년 4할에 아깝게 실패한 토니 그윈은 모두 좌타자였다. 조 디마지오의 최고 타율은 .381이었다. [3] 라고만 하기엔 억울한 것이, 2루타 개수는 홈런이 적은 선수 치고는 굉장히 많았다. 물론 통산 2루타 개수도 슬러거들과 비교하기엔 좀 많이 부족하지만.[4] 참고로 마지막 4할 타자란 수식어 때문인진 몰라도 테드가 애플링처럼 똑딱이형 타자인 줄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이다. 테드는 사기급 선구안에 파워도 엄청난 완성형 타자다. 통산 홈런이 무려 521개로 역대 20위이며 이는 약물시대 최고의 청정거포인 빅 허트와 같은 수치다. 또한 MLB 통산 출루율 1위, 장타율 2위, OPS 2위이기도 하다. 참고로 장타율, OPS 부문 올 타임 넘버원은 야구의 신[5] 다만 투구수 기록이 공식화한 것은 이로부터 한참 후이므로 이 기록은 비공식 기록으로 남았다.[6] 이 직후 러핑은 강판되었고, 덕아웃으로 돌아가 글러브를 벽에다 집어던졌다고 한다.[7] 통산 도루가 179개로 20년을 뛰었으니 연평균 9개가 안된다. 커리어 하이로 27개를 기록한 1943년을 제외하면 20개를 넘긴 시즌도 없다.[8] 야수가 왼손잡이(좌투)면 내야수중에서는 1루수 밖에 못본다. 그나마 1루수도 딱히 오른손잡이에 비해 유리한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