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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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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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루이스 게릭, 통칭 루 게릭(Henry Louis "Lou" Gehrig : 독일식 이름은 하인리히 루트비히 게리히 --- Heinrich Ludwig Gehrig: 1903년 6월 19일 - 1941년 6월 2일)은 1923년부터 1939년까지 17시즌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한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였다. 그는 오직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만 활동했으며 좌투좌타에 주 포지션은 '''1루수'''였다. 후술하겠지만 '''역사상 최고 선수'''[1] 반열에 오르는 레전드가 희귀병으로 인해 커리어를 마치고 요절해버리는 사례가 드라마틱하기에, 그는 아주 옛날 선수이지만[2] 여전히 자주 인구에 회자된다.[3]"오늘 저는 제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라고 생각합니다."
"Today I consider myself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야구 역사상 최고의 1루수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4] 이며 7년 연속 올스타 선정, 아메리칸 리그 MVP 2회란 화려한 경력을 보유한 그는, 타격 트리플 크라운까지 한 번 달성한 적 있던 메이저 리그 전체에서 손꼽히던 강타자였다. 뛰어난 타격 솜씨뿐만 아니라 탁월한 근성과 내구성까지 지닌 선수였는데, 그의 별명 "철마(鐵馬 : The Iron Horse)"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1939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양키스는 그의 유니폼 번호 4번을 이후 누구에게도 주지 않기로 했다.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이다.
1995년 칼 립켄 주니어가 경신하기까지 56년을 이어져온 그의 2,130경기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깨진 것은 그의 마지막 시즌인 1939년이었다. 당시 그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 ALS),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루 게릭 병"이란 별칭을 가지게 되는 희귀병을 진단받았다. 이 장애는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그는 은퇴로부터 2년이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은퇴식 당시 그가 남긴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란 표현으로 유명한 연설은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용되고 있는 명연설로 남아 있다.
2. 독일인 이민자의 아들
1903년 뉴욕 맨해튼 요크빌 지역에서 몸무게가 거의 6.4kg에 달하는 우량아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하인리히 루트비히 게리히(Heinrich Ludwig Gehrig), 독일인 이민자 하인리히와 크리스티나(Christina)의 네 아이 중 둘째로 태어난 아이였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판금(板金) 노동자(sheet metal worker)로 일했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실직한 상태일 때가 빈번했다. 그래서 가족의 수입원이자 아이들의 훈육 담당은 주로 어머니 크리스티나의 몫이었고,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아이들을 열심히 키웠다. 어린 게리히도 세탁물을 접거나 물건 심부름을 하면서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대개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꿔서 불렀는데, 바로 헨리 루이스 게릭(Henry Louis Gehrig), 더 짧게는 '''루 게릭(Lou Gehrig)'''으로 불렸다.
1921년 뉴욕에서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콜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로 진학했다. 풋볼 장학생이던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던 1923년 4월 18일 베이브 루스가 양키 스타디움의 개장 축포를 쏘아올린 그 날, 콜럼비아 대학교의 투수로 나선 게릭은 비록 지긴 했지만 17개의 삼진을 잡았다. 당시 게릭을 관찰 중이던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폴 크리첼(Paul Krichell)이[5] 그 경기에 있었다. 하지만 크리첼이 높게 평가한 것은 투수로서의 게릭이라기보다 가공할 파워를 가진 좌타자로서의 게릭이었다. 그리하여 4월 30일, 게릭은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에 합의했다.
3. 선수 경력
3.1. 뉴욕 양키스의 1루수
루 게릭은 1923시즌 도중 뉴욕 양키스에 합류해 6월 15일 대타로 나서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첫 2년 동안은 대타 역할로 23경기 42타석을 나서는데 그쳤으며 1923년 월드 시리즈 출장 명단에 들지도 못했다.
데뷔 3년째인 1925년이 돼서야 주전 1루수로서 본격적으로 타선에 합류할 수 있었고, 22세의 그는 497타석 동안 리그 5위에 해당하는 20개의 홈런을 쳐냈다.[6]
이듬해 1926년 역시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고,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만나 .348의 타율과 4타점을 기록하며 활약했지만 우승엔 실패했다.
1927년은 게릭의 진가가 나타난 시즌이었다. 해당 시즌 게릭이 만들어낸 타격 시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격 시즌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7] .373의 타율, 218개의 안타, 52개의 2루타, 18개의 3루타, 47개의 홈런, 그리고 타점은 무려 '''175점'''이었다. 이는 베이브 루스가 6년 전 기록한 171타점을 뛰어넘는 당시 신기록이었다. 소속 팀 양키스 역시 그 해 110승 44패란 성적으로 아메리칸 리그를 압도했고, 월드 시리즈에서도 피츠버그 파이러츠를 4연승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의 주인공은 게릭의 몫이었다. 하지만 당시 60홈런을 친 자기 앞타순의 3번 타자 베이브 루스와, 양키스란 팀 그 자체의 위대함에 가려진 감도 없잖아 있었다. 1927년 양키스 타선은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의 타선을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살인 타선(Murderers' Row)"이란 별칭의 원조다.
통산 성적은 17시즌 동안 타율 0.340, 출루율 0.447, 장타율 0.632에 OPS 1.080, 순장타율 0.292, BB/K 1.91, wRC+ 173, 안타 2721, 홈런 493, 타점이 1995타점으로 역대 4위. 보통 안타까운 은퇴로 기억에 남아 있는 선수지만 게릭 본인의 전성기, 즉 1926년부터 1937년까지 메이저 리그 최고의 선수는 베이브 루스가 아닌 루 게릭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해당 기간 팬그래프스 WAR이 108.0인데 동일 기간 2위인 베이브 루스는 85.5다. 물론 게릭보다 8살 위인 루스의 전성기는 이 구간이 아니지만. 타점의 경우 1시즌 162경기 기록으로 환산하면 평균 149타점인데 이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1위에 해당한다. 불의의 은퇴만 아니었다면 통산 홈런과 타점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12년 연속 3할에 13년 연속 100타점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통산 만루 홈런 23개로 한동안 이 부문 메이저리그 1위 기록이었다(2013년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경신).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을 조금 더 언급하자면, 1895년 생이었던 베이브 루스는 1914년 데뷔했고, 1926년에는 이미 30세였으며, 1935년 은퇴했다. 1927년 30대의 나이로 60홈런을 기록한 것은 30대 초반에 은퇴하던 당대 기준을 보면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는 기록이지만, 그런 그도 35세 이후에는 하락세를 걸었다. '''타자 베이브 루스'''[8] 의 전성기는 1919년에서 1931년까지의 12년으로 뽑아낼 수 있는데, 해당기간의 fWAR 합은 139.3이다. 이 때문에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의 전성기 12년 기준으로 6년(1926 - 1931)이 겹치는 셈인데, 해당기간 동안 루 게릭은 55.2, 베이브 루스는 64.6의 fWAR를 기록해서 양자 합쳐서 119.8[9] 인데 이는 매년 평균 거의 20의 fWAR를 기록한 꼴이다. 이걸 좀 거칠게 말하면, '''한 팀에 마이크 트라웃이 2명''' 뛰고 있는 모양새이다. 마이크 트라웃의 커리어 하이 fWAR가 10.1이기 때문이다(데뷔시즌 제외한 6년 평균은 9.12 정도). 덤으로 해당기간 동안 메이저리그 구단 중에서 타자 fWAR가 120이 넘는 구단은 압도적 1위를 차지한 뉴욕 양키스(235.3)를 포함해서 단 7개 구단 뿐이다. 각각 뉴욕 양키스, 뉴욕 자이언츠(168.3), 시카고 컵스(166.7),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160.5),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50,4), 워싱턴 세네터스(136.0), 피츠버그 파이어러츠(127.1)이다.[10] 2017년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에서 타자 fWAR 합이 20을 넘는 구단도 절반도 안되는 13개이다.
1932년, 게릭은 한 경기 4개의 홈런을 친 20세기 최초의 선수가 됐다. 6월 3일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였다. 심지어 5개의 홈런을 칠 뻔 하기도 했는데 그 타구는 애슬레틱스의 중견수 알 시몬스(Al Simmons)가 펜스 근처에서 뛰어오르며 잡았다. 하지만 같은 날 은퇴한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 존 맥그로가 30년간의 감독 생활을 끝낸 터라 헤드라인을 차지하지 못했단 살짝 씁쓸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33년 9월, 루 게릭은 엘러노어 트위첼(Eleanor Twitchell)과 결혼했다. 그녀는 시카고 파크스(Chicago Parks)의 커미셔너인 프랭크 트위첼(Frank Twitchell)의 딸이었다.
1936년에 부인의 재촉으로 베이브 루스의 에이전트를 고용하는데 동의했는데, 그 에이전트는 그에게 쟈니 와이즈뮬러가 물러난 타잔 배역의 오디션을 보도록 설득한 적이 있다. 물론 실제로 배역을 맡진 않았으나 그로 인해 얼룩 무늬 옷을 입고 찍은 그의 다소 부끄러운 사진은 남아 있다.[11]
3.2. 연속 경기 출장 기록과 그 중단
1925년 6월 1일 대타 출장부터 이어진 루 게릭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은 어느 순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렇게 14년을 거쳐 게릭은 '''2,130경기 연속 출장'''이란 위업을 달성했다. 게릭의 이 기록은 1987년 6월 13일까지 유지되었지만, NPB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내야수 기누가사 사치오가 그날 2,131번째 경기 출장으로 게릭의 기록을 경신하며 메이저리그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기누가사의 최종 기록은 '''2,215경기'''). 이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유격수 칼 립켄 주니어가 1995년 9월 6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와의 경기에서 게릭의 기록을 경신하며 메이저리그 기록에서도 2위로 내려앉았다.[12]
물론 기록 달성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행운과 주변의 도움도 컸다. 몇몇 위기들의 사례들 들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1933년 4월 23일, 워싱턴 세너터스의 얼 화이트힐(Earl Whitehill)의 투구에 머리를 맞아 거의 혼절했던 적이 있었다. 또 1934년 6월에도 공에 맞아 의식을 잃는 일이 있었다. 당시엔 헬멧 도입 이전인지라 특히 위험했다. 같은 해 7월 13일엔 등허리 통증이 심해 다음날 원정 경기에서 리드오프로 나서 안타를 친 다음 대주자로 교체됐다. 참고로 이 당시의 통증이 훗날 그가 겪게 될 병의 초기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많다. 또한 양키스의 단장 에드 바로우(Ed Barrow)가 플루로 힘겨워하던 게릭을 보고 독단적으로 우천 연기를 시킨 일화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부상이 있더라도 꾹 참고 출장하느라 당연히 이곳저곳이 다치고 깨졌는데, 나중에 찍은 그의 엑스레이 사진에선 수많은 골절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한다.[13]
그런 게릭의 몸에 본격적으로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던 것은 1938년으로 여겨진다. 그 해 게릭은 원인 모를 피로함을 호소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기운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말을 했었다. 그 해에도 역시 훌륭한 활약을 해내긴 했으나 확실히 이전의 화려한 기록엔 미치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게릭은 슬럼프거나 나이가 들어서 그런거라 여겼고 1939년에는 다시 부활하겠다 약속하며 비시즌기간에 이전보다 더 땀을 흘리고 몸관리에 신경썼다.
1939 스프링 트레이닝 시기쯤 되자 게릭의 몸상태는 명백히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게릭은 그 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단 하나의 홈런도 치지 못했고, 당연히 주루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경기장에서 주루 중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정규 시즌에 돌입해 4월의 끝자락이 될 무렵이었다. 게릭은 이전에 보여줬던 힘차고 근성넘치던 모습들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제임스 칸(James Kahn)이란 기자가 쓴 글에 따르면, 유명한 선수들이 갑작스레 노쇠화를 겪는 일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당시 게릭의 모습은 너무나도 괴리감이 느껴졌다고 한다. 분명 공은 제대로 맞추는 것 같지만 타구가 뻗질 않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 게릭은 1루 수비조차 힘겨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힘겨운 사투를 이어가던 4월 30일, 루 게릭은 워싱턴 세너터스를 상대로 무안타를 기록했다. 그것이 기록의 마지막인 2,130번째 경기였다. 이 경기서 게릭은 수비시 자기쪽으로 오는 땅볼을 힘겹게 잡고 말안듣는 몸을 최대한 힘써가며 움직여서 간발의 차이로 베이스커버에 성공해 아웃을 만들었다. 그걸로 공수교대에 들어갔고 옆의 팀동료가 '''"나이스 커버"'''라고 격려해줬을때 그제서야 더이상 뛰면 안된다는걸 깨닫고 은퇴를 결심한다.[14]
5월 2일, 양키스는 디트로이트에서 타이거즈와의 맞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게릭은 감독 조 맥카시를 찾아가 말했다. "조, 벤치에서 쉬겠습니다." 자신이 팀에 '''방해'''가 되는 걸 원치않는다고 말하는 게릭을 두고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 맥카시였지만 그것을 억누르며 조용히 동의했다. 그리고 맥카시는 "1루는 너의 것이니 다시 뛰고 싶을 때 언제든 말하라"며 게릭을 격려했다. 그날 장내 아나운서는 게릭의 기록이 2,130경기에서 끝났음을 관객들에게 알렸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홈팬들은 눈물 고인 눈으로 앉아있는 게릭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1루수 자리는 베이브 달그렌이 들어갔고 이후 게릭은 벤치에 앉아 팀의 주장으로서 남은 시즌을 함께 했지만, 그가 다시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장하는 일은 없었다.
3.3. 루 게릭 병
점점 게릭이 쇠약해져가자 부인 엘레노어는 미네소타 로체스터의 메이요 클리닉을 방문하여 남편의 병에 대해 문의했고 이는 찰스 윌리엄 메이요에게 전해졌다. 그 역시 게릭의 쇠약화를 눈여겨 보고 있던 사람이었고 엘레노어에게 남편을 최대한 빨리 이쪽으로 데려오라고 전했다.
1939년 6월 13일, 메이요 클리닉에 도착한 게릭은 6일간의 정밀 검사 이후, 6월 19일 근위축성측색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 ALS)을 진단받았다. 그 날은 게릭의 36번째 생일이었다. 예후는 암울했다. 주변인에게 전염되지 않고 정신적인 장애나 큰 통증이 따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급격히 마비가 진행될 것이고 나중엔 음식을 삼키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남은 수명도 길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목에 그는 잠시 워싱턴 D.C.에 들러 원정 경기를 치르러 온 양키스에 합류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역에서 자신들을 향해 손 흔들며 행운을 빌어주는 사람들을 보고 그 역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동행의 기자에게 몸을 부축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남긴 말은 이랬다: "저 사람들은 저의 행운을 빌어주고 있지만 저는 죽어가고 있군요."
참고로 "Neuropathology & Experimental Neurology Journal" 2010년 9월 이슈에 실린 한 기사는 게릭을 포함한 운동 선수들이 진단받은 ALS가 뇌진탕과 그 외의 다른 뇌가 받은 충격으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다는 내용을 싣기도 했다. 링크
3.4.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
1939년 6월 19일, 루 게릭의 병이 대중에 공개됐고, 6월 21일 양키스는 그의 은퇴를 발표했다. 그러자 게릭을 그냥 떠나보내선 안 된다는 기자들과 대중들의 의견이 잇따랐다. 그에 대한 감사일을 가져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본격적으로 떠올랐고 이후 양키스는 1939년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더블헤더 경기 사이에 "루 게릭 감사일(Lou Gehrig Appreciation Day)"을 가지기로 했다.
1939년 7월 4일 당일, 양키 스타디움엔 루 게릭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한 만원 관중이 찾았다. 그 자리에 있던 뉴욕 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는 게릭을 두고 "훌륭한 스포츠맨과 시민의 전형(the greatest prototype of good sportsmanship and citizenship)"이란 찬사를 보냈고, 게릭과 아버지와 아들 같은 유대감을 가졌던 양키스의 조 맥카시 감독 역시 작별을 고했다. 맥카시는 기록이 멈췄던 디트로이트에서의 그 날, 자신이 팀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던 게릭을 떠올리고선, 너는 결코 그랬던 적이 없다는 말을 게릭에 전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이에 답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선 루 게릭이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양키 스타디움의 관중들은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고, 감정이 북받쳐오른 게릭은 손수건으로 얼굴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곤 동료인 베이브 루스가 다가와 그와 포옹을 했다. 그리고 이 날, 양키스는 게릭의 등번호 4번을 이후 어떤 선수에게도 주지 않기로 했다. '''메이저 리그 최초의 영구결번'''이었다.For the past two weeks you have been reading about a bad break. Yet today I consider myself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 I have been in ballparks for seventeen years and have never received anything but kindness and encouragement from you fans.
When you look around, wouldn’t you consider it a privilege to associate yourself with such a fine looking men as they’re standing in uniform in this ballpark today? Sure, I'm lucky. Who wouldn't consider it an honor to have known Jacob Ruppert? Also, the builder of baseball's greatest empire, Ed Barrow? To have spent six years with that wonderful little fellow, Miller Huggins? Then to have spent the next nine years with that outstanding leader, that smart student of psychology, the best manager in baseball today, Joe McCarthy? Sure, I'm lucky.
When the New York Giants, a team you would give your right arm to beat, and vice versa, sends you a gift - that's something. When everybody down to the groundskeepers and those boys in white coats remember you with trophies - that's something. When you have a wonderful mother-in-law who takes sides with you in squabbles with her own daughter - that's something. When you have a father and a mother who work all their lives so you can have an education and build your body - it's a blessing. When you have a wife who has been a tower of strength and shown more courage than you dreamed existed - that's the finest I know.
So I close in saying that I might have been given a bad break, but I’ve got an awful lot to live for. Thank you.
팬 여러분, 지난 2주 동안 제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저는 제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7년 동안 야구장에 있으며 여러분들로부터 호의와 격려만을 받아 왔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저는 오늘 바로 이 야구장에서 유니폼을 입고 저 멋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이걸 특권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 행운아입니다. 제이콥 루퍼트와 알고 지내는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야구계 최고의 제국을 만들어낸 에드 버로우 단장은요? 또 밀러 허긴스란 대단한 인물과 함께한 6년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이후의 9년을 함께한 훌륭한 지도자이자, 사람의 심리에도 정통한 오늘날 최고의 감독 조 맥카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 전 행운아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은 상대인 뉴욕 자이언츠가 당신에게 선물을 줬습니다. 이것도 특별한 일입니다. 또 구장 관리인들과 저 흰색 코트를 입은 소년들까지 모두 트로피를 건내며 당신을 기억해줍니다. 이것 역시 특별한 일입니다. 제 편을 들어주시며 자신의 딸과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시는 훌륭한 장모님이 계신다는 것도 아주 특별한 일이지요. 그리고 당신이 배울 수 있도록, 또 커갈 수 있도록 본인의 삶을 쏟아 일하시는 부모님이 계신다는 건 축복받은 일입니다. 당신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당신이 생각한 그 이상으로 큰 용기를 보여주는 아내가 있다면 그건 제가 아는 가장 멋진 일입니다.
이런 시련을 겪게 됐을지라도, 전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누려왔다는 말씀을 전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은퇴 이후의 삶과 죽음
1939년 12월 7일, 루 게릭은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유예 기간 없이 곧장 선출됐다. 그의 병으로 인한 특별 조치였다. 당시 36세에 불과했던 게릭은 명예의 전당 최연소 헌액 선수가 됐다.[16] 물론 그의 화려한 성적들을 고려하면, 정상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어도 충분히 첫 투표에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겠지만.
1939년 10월, 야구계에서 은퇴한 게릭은 뉴욕 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지명을 받아 뉴욕 시티의 가석방 위원 일을 하게 됐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제의들이 많았지만, 그런 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1940년 1월 2일 취임해 업무를 시작한 그는 죽기 한 달 정도 전, 그의 몸 상태가 도저히 일을 지속할 수 없게 됐을 때 사임했다.
1941년 6월 2일 오후 10시 10분, 루 게릭은 뉴욕 브롱크스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숨을 거뒀다.
소식을 듣고 베이브 루스와 그의 아내 클레어는 게릭의 집으로 가서 아내 엘러노어를 위로했다. 라과디아 뉴욕 시장은 조기를 게양하도록 했고, 전국의 메이저리그 구장에서도 똑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1951년 게릭의 전기영화 "양키스의 자랑"이 개봉했다. 게리 쿠퍼가 게릭을 연기했다.
게릭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 남겨진 부인 엘러노어는 1984년 3월 6일, 그녀의 80번째 생일에 숨을 거두기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은 생을 ALS 연구를 지원하는 데 바쳤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First Base (1st)
6. 연도별 기록
7. 기타
- 루 게릭의 은퇴 연설 일부분은 2015년에 출간된 EBS 수능특강 영어 영역에 문제 지문으로 나왔다.
- 2015년 미국에서 30여년 넘게 처박은 배트가 바로 루 게릭이 쓰던 배트인게 밝혀졌다. 이거 주인은 야구장 관리인이던 친구에게 선물받아 대충 넣어두고 야구하던 아이들에게 빌려주기도 하며 막썼고 용도도 혹시 모를 도둑 대비용 호신용으로 보관했는데 다행히도 사람을 두들겨팬 적은 없었다고... 우연히 이걸 본 다른 친구가 기겁하였고 조사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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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브 루스와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자신의 재능을 믿고 폭식을 즐기며, 활발한 성격에 호색한이었던 루스와 달리, 게릭은 프로 의식이 투철해서 비시즌인 겨울에도 스케이트를 타며 시즌을 성실히 준비했고, 부모님을 굉장히 잘 따랐다. 심지어 루스에게 '네가 그러니까 4번밖에 못 치는거야.'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 양키스의 간판 스타로서 베이브 루스 - 루 게릭 - 조 디마지오 - 미키 맨틀로 이어지는 계보를 잇는다. 루스와 활동기간이 상당히 겹치긴 하지만 그래도 루스와 디마지오의 사이에서 자칫 과도기로 빠질 수 있는 팀을 잘 추스르고 둘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 베이브 루스 등이 포함된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의 일본 방문 친선경기에서 당시 일본의 에이스 사와무라 에이지에게 홈런을 친 적이 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대표 팀이 18경기를 모두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