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크 그린버그
1. 소개
'''Hammerin' Hank'''[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통산 장타율이 .600 이상인 6명의 선수들 중 한 명으로[2] 메이저 리그의 첫 유대인 스타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통산 성적은 13시즌[3] 동안 타율 .313, 출루율 .412, 장타율 .605, 1628안타, 331홈런, 1274타점, BB/K 1.01, wRC+ 154를 기록했다.
2. 생애
행크 그린버그는 1911년 1월 1일 뉴욕에서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 이주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린버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어린 시절을 양키 스타디움이 있는 브롱크스에서 보낸 그린버그의 꿈은 야구 선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에 희망했던 그린버그는 당시 뉴욕에 정착한 유대계를 겨냥해 유대인 선수를 찾고 있던 자이언츠 구단에 의해 트라이아웃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존 맥그로[4] 감독은 그린버그의 큰 덩치와 굼뜬 모습을 보고 그를 뽑지 않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한편 그린버그는 루 게릭을 발굴한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터인 폴 크리첼의 눈에도 띄었다. 크리첼은 그린버그를 양키 스타디움에 초대해 배팅 연습을 하는 게릭을 가리키며 자랑했다. 그러나 그린버그는 가뜩이나 굼뜬 자신이 맡을 수 있는 포지션은 게릭이 맡고 있던 1루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양키스의 입단 제안을 거절했다.
1930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9천 달러를 받고 입단한 그린버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한 경기만을 소화하고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 이후 3년간 마이너 리그에서 자신을 담금질한 그린버그는 1933년 메이저 리그에 콜업되었지만 그를 마땅치 않게 본 버키 해리스 감독에 의해 제한된 기회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한된 기회 속에서도 그린버그는 .301 .367 .468 12홈런 85타점이라는 인상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이듬 해인 1934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명포수인 미키 코크레인이 감독 겸 포수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부임해오면서 그린버그에게도 기회가 오게 되었다. 코크레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린버그에게 1루를 맡겼고 그린버그는 .339 .404 .600 26홈런 139타점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많은 63개의 2루타를 날리며 기대에 부응했다. 그 해 팀은 25년만에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디지 딘이 이끄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의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1935년 그린버그는 '''.328 .411 .628 36홈런 170타점'''을 기록하면서 만장일치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고 팀은 2년 연속 월드 시리즈에 올랐다. 그린버그는 비록 2차전에서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팀은 시카고 컵스를 꺾고 창단 35년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듬 해인 1936년 그린버그는 12경기 만에 경기 도중 주자와 충돌하며 전년도 월드 시리즈에서 얻은 부상이 재발해 시즌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태가 심각해 은퇴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1937년 그린버그는 .337 .436 .668 40홈런 184타점[5] 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리고 1938년에는 .315 .438 .683 58홈런 146타점을 기록하며 성역으로 여겨지던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도전했다. 하지만 5경기를 남겨두고 58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그린버그는 남은 경기 동안 홈런을 추가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훗날 그린버그는 당시 루스의 기록을 지키려던 사람들에게서 협박편지를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1939년 .312 .420 .622 33홈런 112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 그린버그는 이듬 해인 1940년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된다. 팀이 수비력이 형편 없던 루디 요크를 1루수에 기용하기 위해 그의 포지션을 좌익수로 옮겨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피나는 노력을 통해 데뷔 시절 형편없던 1루 수비를 평균 이상으로 끌어올렸던 그린버그는 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또다시 좌익수 수비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린버그는 '''.340 .433 .670 41홈런 150타점'''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많은 50개의 2루타를 날리며 두 번째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41년 팀은 그린버그를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그가 평발임을 어필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린버그는 5월 7일 자원해서 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 해 12월 5일 28세 이상자 제대 조치에 의해 군에서 제대한 그린버그는 이틀 후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고 다시 군복을 입게 된다. 미 육군 항공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한 그린버그는 졸업 후 중위로 진급해 중국-버마-인도 전역의 20공군에 배치되어 58폭격비행단에서 체련 교관으로 근무했다.
1945년 7월 1일 대위로 군에서 제대해 메이저 리그에 복귀한 그린버그는 건재한 모습으로 시카고 컵스[6] 를 상대로 팀의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게 된다.
1946년 그린버그는 .277 .373 .604 44홈런 127타점으로 제 몫을 다했지만 팀과 연봉 협상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었고 팀은 그를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 하게 된다.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당시 홈구장이었던 포브스 필드의 좌측 펜스 뒤 불펜을 'Greenberg Garden'으로 명명하는 등 그린버그에게 엄청난 대우를 해주었지만 그는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리면서 .249 .408 .478 25홈런 74타점에 그쳤고 시즌 후 36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피츠버그에서 그린버그는 당시 풀타임 2년 차에 불과했던 랄프 카이너를 정성껏 지도해 주었고 그 해 카이너는 51홈런을 치게 된다. 그리고 그린버그의 은퇴 후 'Greenberg Garden' 역시 'Kiner's Korner'로 바뀌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고작 9년 반의 실질적인 메이저 리그 경력동안 그린버그는 1394경기에서 1628개의 안타와 1276개의 타점, 331개의 홈런, .605의 장타율을 기록했는데 당시 그보다 더 큰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는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루 게릭, 지미 폭스 뿐이었다.
그린버그는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통한 홈런 생산 능력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를 더욱 훌륭한 타자로 만들어 준 것은 3할의 타율을 유지하면서도 꾸준하게 타점을 생산하는 능력이었다. 그가 부상과 군 복무에 발목이 잡히지 않았다면 충분히 400홈런을 넘기고 500홈런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린버그는 군 입대 전 풀타임 5년간 연평균 41홈런 152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그린버그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구에 평발이어서 달리는 것도 쉽지 않고 운동 신경도 다소 부족했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Self-Made' 슈퍼스타였다. 그린버그는 경기 전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배트를 휘둘렀고 경기가 끝나면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시 타격 연습을 했다. 오죽하면 배팅볼 투수들이 그만 보면 도망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4. 은퇴 후 그리고 명예의 전당 입성
1946년 뉴욕 백화점 재벌의 딸인 카랄 짐벨과 결혼한 그린버그는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은퇴 직후인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였던 빌 빅의 제의를 받아 팀의 팜 디렉터를 맡았고 1950년 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58년 빌 빅을 따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부회장이 되었다.
1961년 자신의 터전을 캘리포니아 남부로 옮기고 싶어 했던 그린버그는 메이저 리그 사무국의 구단 확장 계획에 찬성해 당시 창단 준비중이었던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구단주가 되려고 친분이 있던 빌 빅을 끌어들이는 등 노력을 했으나 당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구단주였던 월터 오말리의 반발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고향 뉴욕에서 은행계에 투신한 그린버그는 성공적인 은행가가 되었고 얼마 후 자신의 회사를 캘리포니아 주 비벌리힐즈로 옮겼다. 그리고 1986년 9월 4일 향년 75세에 비벌리힐즈에서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1948년 처음 명예의 전당 입성 자격을 얻은 그린버그는 부족한 누적 성적으로 인해 투표에서 고전했지만 9수 만에 1956년 84.97%의 득표율로 당당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되었다.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First Base (16th)
5. 이모저모
- 유대인이었던 그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했던 시기는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1935년 월드 시리즈 당시 상대 팀이었던 시카고 컵스에게서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듣기도 했고 한 번은 상대 팀의 클럽하우스에 쳐들어가 싸운 적도 있었다. 당시 미국 내 유대인들은 그린버그를 자신들의 희망으로 여겼고 그 역시 이를 자신의 막중한 임무로 생각했다. 훗날 샌디 코팩스에 의해 유명해진 유대교의 속죄일인 '욤 키푸르 데이'에 처음으로 출장 불가를 선언한 것도 그린버그였다.
- 메이저 리그의 첫 흑인 선수였던 재키 로빈슨과도 인연이 있다. 그린버그가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하고 선수 생활 마지막 해였던 1947년은 바로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막 데뷔를 해 경기장 안팎에서 갖은 인종차별을 겪어가며 분투하던 때였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흑인만큼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유대인으로써의 차별을 접해봤던 그린버그는 경기 중에 상대 팀 선수였던 로빈슨을 만나자 "너한테 인종차별적 야유를 보내는 저 사람들을 너의 실력으로 이겨버려라."라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6. 연도별 성적
[1] 훗날 이 별명은 행크 애런이 계승하게 된다.[2] 베이브 루스 - .690, 테드 윌리엄스 - .634, 루 게릭 - .632, 지미 폭스 - .609, 배리 본즈 - .607, '''행크 그린버그''' - .605[3] 실제 활동한 기간은 9.5시즌으로 봐야한다.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때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역대 메이저 리거 군 복무 기간 1위인 47개월을 복무했다.[4] 역대 감독 승수 2위인 2763승을 기록한 명장으로 멜 오트를 길러낸 장본인이다.[5] 역대 타점 3위 기록으로 1위는 1930년 핵 윌슨의 191타점이고 2위는 1931년 루 게릭의 185타점이다.[6] 이 해 시카고 컵스가 그 유명한 염소의 저주에 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