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합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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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합피 전투'''(參合陂戰鬪)는 오호십육국시대 때 참합피에서 북위군과 후연군이 맞서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북위군이 승리하면서 후연의 세력은 약화되고 중원에서 밀려나게 된다.
2. 배경
북위와 후연은 각기 그 전신에 해당하는 국가인 대나라, 전연 시절 때부터 혼인을 맺는 등 우호 관계를 가졌는데, 391년에 북위에서 탁발고를 보내면서 후연에 선물을 바쳤지만, 후연에서 좋은 말을 요구하자 탁발고는 이를 거절했다.
북위는 후연과의 관계를 끊고 서연과 우호관계를 맺기로 하자 탁발고는 탈출하려 했으나 후연의 태자인 모용보에게 억류되었고, 모용수는 그를 매우 하대(下待)하였다.
3. 과정
3.1. 전초전
395년에 탁발규가 후연의 변경 지역에 사는 여러 부를 침입하자 5월에 모용수는 모용보, 모용농, 모용린 등에게 8만의 병력으로 오원을 시작으로 북위를 공격하게 했으며, 후발대로 모용덕, 모용소 등이 이끄는 보병, 기병 1만 8천 명을 보냈다. 8월에 탁발규가 황하의 남쪽에서 군사를 훈련해 9월에 황하까지 전진하자 모용보가 군사를 정렬시켜 강을 건너려 했다가 폭풍으로 배 수십 척이 남쪽 강변에 표류했는데, 북위에서 갑병 3천여 명을 붙잡았다가 석방했다.
3.2. 후연군의 철수
모용보가 중산으로 출발할 무렵에 모용수는 병에 걸렸는데, 탁발규는 모용수가 병에 걸린 정보를 알아내 모용보가 오원에 도착하자 사람을 보내 중산으로 가는 길에서 그들을 맞이해 그 사자들을 엿보다가 붙잡았다. 모용보가 그 동안 모용수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했기에, 탁발규는 붙잡은 사자를 황하에 보내 네 아버지(모용수)가 이미 죽었다면 어찌 일찍 돌아가지 않냐고 말하도록 시켰으며, 모용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자 후연의 병사들은 동요했다.
탁발규가 탁발건에게 기병 5만을 주어 황하의 동쪽에 주둔하게 하고, 탁발준에게 7만을 주어 후연의 군사를 남쪽으로 막게 했다. 근안이 모용보에게 철수할 것을 권했지만 모용보는 이를 무시하면서 수십 일을 대치했으며, 모여숭이 모용수가 죽었다고 생각해 반란을 일으켜 모용린을 주군으로 받들려고 했다가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 일로 모용보, 모용린은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10월 2일에 배를 불태우고 달아났는데, 모용보는 당시 황하에 얼음이 아직 얼지 않았기 때문에 북위의 군사가 건너오지 못한다고 생각해 척후병을 두지 않았다. 11월 3일에 폭풍이 불어 얼음이 합쳐지자 탁발규가 치중은 남겨놓고 정예 기병 2만여 명을 선발해 황하를 건너 급히 추격했다.
3.3. 북위군의 기습
후연군이 참합피에 도착하고 지담맹이 군사를 보내 북위의 군사를 막아야 한다고 했지만 모용보는 화내면서 이를 거절했는데, 모용덕도 함께 나서서 지담맹의 말을 따를 것을 권유해 모용보가 모용린에게 기병 3만 명을 거느려 후방에 주둔시켜 비상 사태에 대비하게 했다. 모용린은 기병을 풀어놓고 사냥을 하는 등 북위군의 공격을 대비하지 않았으며, 모용보가 기병을 파견해 돌아가서 북위의 군사를 염탐하게 했지만 기병들이 10여 리 간 다음에 바로 안장을 풀고 잠들었다.
북위의 군사가 새벽부터 밤까지 두 배 빠르게 행군해 9일에 해질 무렵에 참합피의 서쪽에 도착했으며, 후연의 참합피 동쪽에 있는 반양산 남쪽의 강변에 군영을 설치했다. 탁발규가 밤에 군사을 분산시켜 병사들은 하무(衔木)[1] 를 물고, 말에게는 재갈을 물리게 하고 몰래 나아갔으며, 10일에 해가 뜨자 북위의 군사는 산 위에 올라가 아래에 있는 후연의 군영에 닿았다.
후연의 군사들이 동쪽으로 가려다가 북위의 군사들을 보고 크게 놀라 동요했으며, 북위의 군사들이 공격하자 후연의 군사들은 달아나다가 말에 밟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만 명 정도가 되었다. 이어서 탁발준이 병사를 이끌고 후연의 병사 4, 5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후연의 군사는 수천 명만 살아남고 모용보는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모용소 등이 전사하고 모용왜노, 모용도성, 모용윤국 등 수많은 관리와 장군이 붙잡히고 수많은 무기, 갑옷, 식량, 물품 등을 얻었다.
탁발규는 사로잡힌 사람들 중에 가윤, 가이, 조숭 등을 등용하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려 했지만, 왕건이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권유하자 탁발규는 그들을 모두 파묻어죽이고 12월에 운중의 성락으로 돌아갔다.
4. 결과
후연에서는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중산으로 돌아가며, 북위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로 정동장군 평규를 시켜 기주에서 군사를 징발하려다가 오히려 평규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해야 했다. 후연의 군주 모용수는 참합피에서 수많은 후연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죽은 이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군사들이 통곡했고 모용수는 부끄럽고 분해 피를 토한 후에 사망했다.
[1] 은밀한 기동을 할 때, 병사들의 입에 물리던 가는 나무 막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