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1. 개요
捕虜, Prisoners of War; P.O.W / Captive
전시에 범죄에 의하지 아니하고 군사상의 이유로 인하여 교전 상대국의 권력 내에 들어가게 되어 자유를 박탈당한 적국인.
2. 포로를 잡는 이유
군사상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적국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전권을 가진 군인이나 준군사조직 소속원, 군무원, 공무원, 정치인 및 기타 상선 선원이나 방위산업체 종사자 등 필요성이 인정되는 민간인 등을 말한다. 즉 정식적으로 상대국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대국에게 잡히게 되면 해당 국가의 군대는 그들을 포로로 삼을 수 있다. 포로를 잡는 이유는 당연히 붙잡은 적 군사요원들을 그대로 석방시킬경우 다시 적국 세력으로 돌아가 자국에게 피해를 끼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며, 붙잡은 포로의 수나 특정 포로의 중요성 등이 앞으로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국제법 때문에 대놓고 포로들에게 적대시 할 순 없다지만 어찌되었든 포로들의 목숨이 상대국에게 걸려있는만큼 포로는 인질의 역할도 한다. 고위급 정치인이나 장교 등이 죽은 게 아니라 적국에게 포로로 잡혀있으면 정치적·군사적으로 굉장히 부담이 되며, 향후 종전 협상을 할 때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때문에 포로를 잡는 행위 자체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전쟁참여국의 정당한 권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군사상의 이유를 가진 자라고 해도 군사행위가 아닌 테러 행위나 간첩 행위를 하다가 붙잡히면 포로가 아니라 스파이로 취급하며, 당연히 포로로서 받을 수 있는 보호도 받을 수 없다.
3. 대우
적국의 국민일지라도 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민간인들은 군의 영향력 내로 붙잡았다고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잠시동안 억류정도는 할 수 있어도 포로로 삼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있다.[1] 그 이유는 적국일지라도 민간인은 어찌되었건 최대한 군사적 활동에 대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하는 자들이며, 어느 나라의 군대도 이들의 자유권을 박탈하고 포로로 잡을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정당한 이유 없이 민간인을 억류하고 포로로 취급해 끌고다닌다면 심각한 전쟁범죄에 해당하며, 국제적으로도 포로로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해당 국가의 입지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2]
역사적으로 포로는 승자가 모든 권리를 지니는 취득물이었으며, 승자의 가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포로 학살이 자행되거나, 강간, 노예화 내지는 그들이 모시는 신을 위해 산 제물로 바쳐지곤 하였다. 그리고 중세로 오면서 몸값을 받고 풀어주거나, 몸값을 낼 재간이 없으면 죽이거나 노예로 팔려나가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다만 현실과는 별개로 같은 종교, 문화권이라면 포로를 자비롭게 대해주는 건 그 당시에도 칭송받았다. 또 평민들이 대부분인 사병 포로들은 학대받았지만, 그 당시에도 귀족들이 대부분인 장교들은 포로로 잡힌 후에 대접받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예외는 있지만, 유럽의 귀족들은 포로라 해도 같은 귀족들은 존중하고자 했고, 이는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귀족들은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정략결혼으로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들끼리 이미 면식인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는 친척인 경우까지 종종 있었다.
유럽에서는 중세시대 용병제가 정착되면서 포로의 대우가 향상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용병들은 돈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였기에 다음 전투에선 서로 깃발을 바꿔들고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당장 지금은 적대세력의 용병이었지만 나중에 자기가 돈을 주고 고용할지도 모르니 붙잡혀도 최대한 편의를 봐준 셈이었다. 괜히 포로들 괴롭혔다가 그때 원수를 갚겠다고 깽판 치면 인과응보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용병들 역시 약탈에 참여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지금의 적이 나중에 고용주가 될지 몰랐기 때문.
근대가 될수록 전쟁이 국가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웬만한 국가는 보통 '''전시가 되면''' 징병제로 병역제도를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군인들 또한 전쟁의 희생자라는 관점에서 접근이 있었고, 인권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포로에 대한 처우 개선에 대한 논의도 진행됐다. 덕분에 과거와 같이 험한 꼴을 보는 경우는 줄어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네바 조약이 만들어져[3] 포로의 대우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두고, 포로에게도 인간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전쟁범죄로 간주하여 사후 이에 대한 엄격한 추궁과 처벌이 있을 수 있음을 명시했다.
제네바 조약에서 억류국이 포로에게 지켜야 할 사항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권침해 상황을 가정하고 하지 말라고 명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급양이나 피복, 숙식 등의 보급을 해줘야 한다. 다만 그 수준이 규정되어 있진 않다.
포로에게도 식량배급과 의료지원 등 생명에 직결되는 관리는 해줘야 하며, 무기는 압수할 수 있지만 방탄모, 방탄복 등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를 빼앗아서는 안되고, 현금이나 고가의 물품(보통 시계나 반지 등의 장신구)을 뺏을 수는 있으나 액수를 기록하고 향후 반납, 보상해야 한다. 가족들의 사진이나 편지, 혹은 포로로 잡히기 전 받았던 훈장 등 포로 본인에게 정서적 가치를 가지는 물건 등도 당연히 압류할 수 없다. 또한 총알받이로 쓰거나 지뢰 제거 같은 위험한 작업에 투입해서도 안되며, 포로에게도 '''봉급을 지급해야 한다'''. 심지어 이 이하로 주면 안된다는 최저임금까지 있다. 물론, 잡혀 있는 포로들의 기본급을 사로잡은 쪽이 주라는 얘기는 아니고, 노동을 시킬 때 그 보수를 뜻한다. 포로의 기본급은 포로의 국적의 정부가 지급하며 이 돈을 가능하다면 수감되어 있는 포로에게 전달하고 포로로 사로잡은 쪽도 이를 뺏지 않는 게 원칙이다. 포로에게 노동을 시킬 때도 농업이나 공예, 단순 운송업 등 비군사적인 용도이어야 하며 기본적인 노동 환경을 갖추어 줘야 한다. 기본적인 보급 외에 포로들이 필요한 편의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만들어준 매점에서 나오는 수익은 모두 포로들의 복지를 위해 써야 한다는 조항까지 있을 정도다.제 15 조. 포로를 억류하는 국가는 무상으로 포로에 대한 급양을 제공하고 또한 그들의 건강상태상 필요한 의료를 제공하여야 한다.
포로 상태가 되더라도 계급과 직급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사로잡힌 몸이니만큼 편안한 생활은 불가능하지만 계급이 높은 포로는 계급이 낮은 포로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적으로 장교 포로와 사병 포로를 같이 묶어 관리하지 않는데, 이는 장교 포로가 사병 포로들과 함께 있을 경우 포로들을 결집시키기 때문에 포로 관리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적군이라고 해도 장교 포로는 사병들과 동일한 취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가능하면 사병 포로도 부사관과 병을 분리 수용하기도 한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장교 포로는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할 수 있게 세면이나 면도, 피복의 세탁 등의 여건 정도는 마련해주는게 보통이다. 포로들에게 노동을 시킬 때도 계급을 구분하여 직급에 맞는 일을 시켜야 한다. 불가피한 이유로 장교인 군의관 포로에게 자국 장병의 치료를 맡길 경우 그 포로는 자국의 군의관과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하며, 치료 활동 외의 노동을 면제해야 한다.
4. 한계
그러나 전쟁 와중에 이걸 '''현실적으로 전부 지키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전쟁 자체가 인권을 침해한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포로들을 심문[4] 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고, 서로 악에 받혀있는 상황이라면 포로는 필요 없다란 상황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게다가 일선에서 싸우는 장병들도 결국 감정이 있기 때문에 '''방금 전까지 아군을 죽이던 적군'''이 두 손 들고 항복했다고 금새 모든 것을 잊고 포용해줄 수 있는 대인배가 아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으로 이곳에 파병된 한국인의 수기를 보면 교전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중상자들을 부대원들이 사살했다고 한다. 방금 전까지 우리에게 총을 쏘던 놈들을 살리기 위해 애쓸 기분도 아니었고 적군 부상자들을 후송해 치료하라는, 상부의 일선 장병들의 감정에 합치되지 않는 명령에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물론 발각될 경우 정상이 참작된다고 해도 최소 징역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초반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미 육군 레인저 대원이 손들고 나온 독일군 두 명을 총으로 쏴버린 뒤 동료 대원이 "뭐라고 그러던 거야?"라고 묻자 "'나 밥 먹으려고 손 씻었어요!'라는데?"라며 농담을 한다. 그러나 이 두 명은 독일인이 아니라 독일 국방군에 강제 징집된 체코인이다. 자세한 건 영화 항목 참조. 말 그대로 전시상황엔 조약 그딴 거 없다를 적절히 보여주는 예시. 물론 엄연한 '''전쟁범죄'''다. 다만 적도 아군도 서로 비슷한 짓거리를 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무고한 민간인이거나 대규모 학살과 같은 짓을 터뜨리는 거 아니면 크게 공론화되지는 않는 편이다. 당연히 지휘관이 엄격하거나 내부 고발자가 있고 그걸 들어주고 확실히 처벌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박혀있거나, 군사경찰이 이를 목격했거나 한 경우는 처벌받을 수도 있다.
또 위와 같은 식으로 투항해도 확실한 고의로 쏴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전투 중의 혼란과 공포 때문에 누군가 눈 앞에 나타나면 적인지 아군인지 투항자인지 확인도 안하고 반사적, 혹은 우발적으로 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의 아군 오사도 있다.
게다가 정상적인 교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잡히는 경우에도 포로 대접을 못 받는 예외도 당당하게 존재한다. 일단 적의 저격수나 또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맹렬히 저항하다 붙잡힌 경우에는 포로 대우를 못 받고 즉석에서 총알 박힐 확률이 꽤 높다. 그 외에도 국제법상 교전권이 없는 테러리스트나 PMC[5] , 제네바 협약상 절대 보호받지 못하는 스파이도 포로로 잡히면 보통 살해당한다. 물론 규정상으로는 이들도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되어 있지만 그게 잘 지켜지지 않으니까 문제다.
전시의 경우 여군이 포로로 잡혔을 때의 대우 문제도 존재한다. 여군이 포로로 잡힌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게다가, 적대인종 여군을 성노예로 만들어 성욕 해소 뿐 아니라 적대국 국민에 대한 굴욕감 심기 및 혼혈 아기를 잉태시켜, 여군들에게 자인종의 피가 섞인 아이를 낳게 하여 순수한 핏줄을 더럽히는 인종청소 차원 등에서 사로잡은 쪽 남성 군인에 의한 강간 임신 등 성범죄도 다수 일어나고 있는 판이다.
그래도 국가가 적어도 어느 정도 개념이 들어가 있고 여유가 있다면 포로를 함부로 대하진 않지만, 모든 국가가 다 그렇지 않고 국가마다 다르다. '''조선인민군이나 구일본군같은 막장 군대라면 포로가 되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의미하는 반면 미군의 경우에는 어지간해서는 포로 대우를 해준다. 물론 지역 소탕전 같이 승산이 전혀 없는 상황에 놓인 적군이 저항 대신 항복을 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잡힌 소련군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연합군에 대한 대응이 각각 달랐다. 소련군 포로는 그야말로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았다. 이는 소련군에 대한 일선 장병들의 악감정이 작용한 것이 크고, 또 소련이 헤이그 협약과 제네바 협약에 가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걸 명분삼은 것도 한 몫 했다. 또 나치의 인종 개념에서 소련 슬라브족은 영, 프, 미의 라틴이나 게르만계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덕분에 독일에 잡힌 소련군 포로 사망률은 추축국에 사로잡힌 연합군 포로 사망률과 자웅을 겨룰 정도.[6] 물론 두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의 포로라고 해서 학대하는 게 국제법상 해도 되는 짓은 아니니 나중에 다 전쟁 범죄로 처벌받았다.[7]
반면 미-영 연합군 포로에 대해서는 소련군 포로에 비해 상당히 관대했는데, 심지어 전쟁 말기에 자기들 먹을 게 없어도 적십자를 통해 포로 먹을 건 챙겨주기까지 했을 정도다.[8] 물론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거지 절대적 기준으로는 좋았다고 할 수 없다. 영화 대탈주에 나온 SS의 포로 학살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특공대나 특공대에 가담한 포로는 상층부의 특별 지시로 군복 여하를 막론하고 즉시 총살당했으며 공습 과정에서 격추된 연합군 항공승무원들을 잡아서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자체 재판을 열어 규율 위반이라는 명목 하에 엄벌을 가하거나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이는 하트의 전쟁이라는 영화에 잘 나온다. 포로였던 장교 하트의 거짓 살해 자백을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하트의 처형을 명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막판에 나온 미군 대령에 대한 독일군 포로수용소장의 즉결처형도 법적으로 따지면 걸릴 소지가 충분하다. 이미 침해 행위가 종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힌 군인이 유대계로 밝혀지면 대부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보통 독일군은 잡힌 미군의 이름이나 인식표를 보고[9] 유대계로 확인될 경우에는 전원 강제수용소로 보내 학살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다 들통나서 전쟁 범죄로 처벌받았다.
- 구 공산권의 경우는 적군의 포로는 곧 인민의 원쑤, 제국주의자의 하수인 or 제국주의자들의 선전 선동에 속은 불쌍한 사람들이었던지라 처우가 각자 달랐다. 저항하거나 자본가 계급의 자식이면 살려주는 것도 나름대로 고마운 것. 하지만 사상 전향이 주목적이긴 해도 대체적인 포로 대우는 북한과 크메르 루주 등 일부를 제외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한 하나의 예도 있다. 대표적으로 중공군은 삼대기율 팔항주의에 따라 포로를 나름대로 인도적으로 대우했다.[10] 그러나 동시에 포로를 공산주의자로 전향시키기 위해 매우 교묘한 방법들을 사용했는데 洗腦라는 중국어 표현이 영어 brainwashing으로 번역되며 유명해질 정도였다. 실제로 이 방법은 한국전쟁 당시 꽤나 성공해서 수많은 미군을 변절자로 만들었고 미국 당국이 대책을 생각할 정도였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중에서 포로를 가장 심하게 학대한 군대는 소련군[11] 이 아니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12] 이었다.
- 구 일본군의 포로학대는 당시 참전했던 군대들 내에서도 심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은 가장 유명한 사례이고 심지어 식인을 위해 잡아먹은 사례까지 있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부시)가 2차 대전에 참전했을 당시, 같이 작전에 나간 부대원들 거의 전부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살해당하거나 잡아먹혔다.[13]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부시 전 대통령은 지금도 당시의 일본군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14]
- 미군 포로 수용소는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 된 포로 대우를 해줬다. 한 예로 1944년 미국의 파파고 파그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들이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도로 잡혀들어간[15] 사건이 있었다. 이때 포로들이 밖에 나가 미국인들과 접촉하면서 이거저거 떠드는 바람에 당시 전시 상황이라서 미국 시민들도 구하기 힘들던 담배, 초콜릿, 돼지고기 등을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배급받은 사실이 밝혀졌고, 시민들은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세금도 내는 미국 시민들도 베이컨 한 줄 구하기 힘든데 이건 뭐냐?"라며 황당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포로 수용소의 악명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물론 이 두 전쟁의 경우에는 포로 대우를 하는 게 당연한 저항세력 소속 비정규군 병사와 범죄자인 테러리스트가 서로 구분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게 크다. 미군 스스로도 탈레반이나 이라크 저항군 포로는 포로 대접을 해야 하는데 알카에다 용병들이 섞여 있어서 걸러내기 어렵다 보니 일단 일괄 전범취급을 한다음 조사를 거쳐 포로만 따로 가려내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 물론 테러리스트의 경우에도 수용소에 가둬놓고 가혹행위를 하는 게 옳은 것은 아니다. 포로와의 차이는 재판을 거쳐 처벌이 가능한 정도다.
- 영국의 포로 대우도 미국과 비슷하게 괜찮은 편이었으나 이쪽은 미국과는 달리 독일의 본토 공격과 해상봉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증오감이 있었다. 특히 영국 본토 항공전 때 영국에 불시착한 독일군 조종사들은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분노한 영국 국민들한테 폭행, 살해 당하기도 했다.[16] 덕분에 영국의 경찰과 헌병들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민들한테 잡히기 전에 항복하라고 외치고 다닐 정도였다. 영국은 2차 대전 당시 잡힌 독일군 포로들을 런던의 도로를 만드는 등의 노동에 동원했는데, 축구 잘하는 포로의 경우 전쟁으로 선수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 영국 축구 리그에서 용병 선수로 뛴 일도 있었다.[17] 물론 이 경우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킨 게 아니므로 딱히 국제법 위반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다. 참고로 영국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은 0.03%로 주요 참전국중 가장 사망률이 낮다. 영국에 수용된 독일 포로들도 탈출을 도모했는데, 대체로 수용소를 빠져나간 후 어찌저찌 배를 타서 중립국인 아일랜드로 탈출하는 계획이었다고. 물론 이런 탈출 계획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 이탈리아 왕국의 포로대우는 유명할 정도로 좋게 대해줬다 한다. 한 사례로 이탈리아 왕국과 항공전을 하다가 한 영국군 파일럿이 격추되어 포로로 잡혀갔는데 포로에게 배급한 음식이 자신 군대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호화로운 음식을 받았다. 처음에는 처형 전에 주는 최후의 식사인 줄 알았으나, 이탈리아 장교가 찾아와 실수로 일반군인 식량을 줬다며 사과하며 제네바 협약을 준수할 것임을 다짐했단다.
-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군은 탈레반 포로 중에서 미국인 존 워커 린드를 발견해 충격에 빠진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적단체인 탈레반의 병사로서 미군과 싸운 까닭에 일단 포로 대우를 하다가 이후 범죄자로 기소. 미국으로 이송하여 반역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런 케이스는 미국이니까 다행으로 한국전쟁 당시 포로가 된 한국군이나 미군은 중국군 참전 이전까지 그야말로 사람 대접을 받아보지도 못했다.
-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에게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들은 각종 고문과 협박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서 석방된 이후에도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존 매케인같은 경우에는 고문으로 인해서 평생 한쪽 다리를 절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릴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매케인과 같이 수감되었던 사람이 윌리엄 로렌스와 제임스 스톡데일이며 질식고문이나 채찍질도 예사로 당했다고 한다. 스톡데일의 경우 이런 악랄한 수용소에서 의연하게 버틴 것이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졌고 명예훈장을 포함한 각종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을 정도.
-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은 미군 포로들을 시범 케이스로 한 명씩은 반드시 사살했다. 살아남은 포로들의 대우도 형편없었고 포로가 병에 걸려도 전혀 치료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제네바 조약의 포로 노동에 대한 조항도 필요하면 주저 없이 무시했고 여군은 백인 제국주의자의 더러운 피를 정화한다는 구실로 집단 윤간하여 임신시켰다는 증언도 있다. 다만 중공군이 포로를 감독하기 시작하면서, 포로에 대한 대우가 그나마 좋아졌다. 이는 중공군이 민심을 얻기 위해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래봐야 포로를 세뇌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로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였고 이런 점에서 북한군보다 중공군을 더욱 악랄하게 여기기도 한다. 아무래도 아주 교묘하게 세뇌시키려는 각종 시도를 하였으니 공산주의에 적대심을 가진 사람들에겐 육체적인 학대를 가하는 북한군보다 오히려 이쪽에 대해 더 반감을 가질 법하다. 거기다 중국군 역시 포로를 아무렇지 않게 사살하거나 배급을 열악하게 하는 등의 학대를 자행했다.
일반적으로는 교전권이 있는 자만 포로로 인정되며, 따라서 국제법상으로 교전권이 인정되지 않는 용병이나 단순히 무기를 들고 설치는 민간인은 포로로 취급되지 않고, 깽판치는 범죄자 정도의 취급만 받는다. 국제법상 교전권이 있어야만 다른 군대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합법적이기 때문. 또한 특수부대나 간첩 중에서 자기 나라의 군복이 아닌 옷을 입고, 적국의 군인이나 민간인인 척 하고 잠입을 하다가 잡힌 경우도 원래 소속에 관계 없이 일반적으로는 포로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행위 자체를 죄로 보고 재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49년 조약에서 민병대, 지원병, 비정규군 및 저항운동단체도 무장군의 일부를 구성하는 경우에 한해서(어느 정도 체계가 있고 자기들끼리의 식별하는 특정 표식 등이 있을 경우) 교전권이 인정되며,[18] 따라서 이들도 잡을 경우 포로로 인정된다. 그리고 군대에 종군하는 민간인[19] 들도 포로의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정규군이 아니라고 무조건 포로가 아닌 것은 아니며 민병대가 제대로 된 표식과 규율을 갖추고 전장에 나갔다면 포로 대우를 받는 게 철칙이다.
문제는 판단 기준이 거의 지휘관의 재량에 달렸다는 점이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완장 하나로만 구분되는 녀석이 아군 진지를 습격해서 피해를 주었다면 보통은 포로 취급을 못 받고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기 딱 좋다. 물론 이 경우도 무작정 테러리스트 취급하는 건 아니고 조사를 해서 저항군 출신 등 준정규군에 속한 게 확인되면 포로로 대우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액트 오브 워에서는 포로가 일종의 자원 개념으로 나온다. 적군 부상자나 적의 파일럿, 비전투인원을 아군 보병으로 잡으면 돈을 벌게 되며 반대로 아군 보병이 적군의 포로로 잡힐시 돈이 빠져나간다. (확인 바람.) 추가로 각 진영의 수용소 건물을 건설하면 총 10명의 포로를 수용할 수 있는데 총 10명을 잡아서 수용할 경우 초마다 500원이 들어오게 되어 필드의 석유가 고갈되어도 자원 수급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 (참고로 10명이 아니여도 돈이 들어온다.) 또한 각 진영마다 포로에 관련 업그레이드가 있다. 예를 들어 생포 훈련 업그레이드라든가.
중세 이슬람 문화권에서 포로에게 물을 주는 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살라흐 앗 딘이 기 드 뤼지냥에게 물을 주어 살려줄 뜻을 보여주었는데, 기 드 뤼지냥은 물을 사양하고 르노 드 샤티용에게 넘겨 그를 살려달라는 의사를 보인다. 르노 드 샤티용은 그 물을 받아마셨으나, 살라흐 앗 딘은 기 드 뤼지냥에게 물을 권했지 르노 드 샤티용에게 물을 권한 적이 없었으므로 차가운 냉소를 보내며 손수 르노 드 샤티용의 목을 잘라버린다.
5. 조선인민군의 포로 대우
항복은 곧 죽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름 포로대우를 조금은 받은 미군조차도 잔혹행위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지경이니...
군법으로도 금지됐지만, 억지로 해봤자 죽는다. 아니 그냥 미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한국군의 경우 전시에 포로가 된다면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될 가능성이 지금 전쟁중인 미군보다는 조금 높고 우크라이나군 등 내전지역 현지 정부군 등 다른 군대보다는 낮다. 물론 항복해봐야 학살. 그것도 온갖 잔혹행위 끝에 죽는다는 정도는 다들 아니까 자발적인 투항을 하는 바보는 거의 없겠지만 혹은 저항이나 자살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거나 완전히 제압을 당해서 끌려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테러와의 전쟁 당시 미군에서도 발생했다. 한국군이 상대할 적은 이라크 저항군이나 탈레반보다 훨씬 막강한 북한군이고, 한국군은 미군보다는 약하니 자기 뜻과 상관없이 잡혀가서 포로가 될 가능성은 당연히 미군보다는 더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장병들 중 수백명 정도는 이런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인권이나 제네바 조약 따윈 개나 줘버린 군대'''이며, 식량 공급은 평시에도 하질 않아 '''전시 약탈을 교리로 삼은 놈'''들이다. 한국전쟁 때만 해도 포로에게 먹을 것을 아주 조금씩만 배식하거나 아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차량 없이 행군을 시켰다. 고난의 행군 이후 지옥도가 펼쳐져 일제강점기가 훨씬 낫다는 지금과는 달리 군대 사정이 나았던 1950년대에, 소련과 중국의 지원까지 받은 북한군이 그랬다. 이 때문에 중국군이 개입한 뒤 정신 나간 처우를 보고 황당해하며 가능한 한 포로들을 넘겨받아 관리했다. 중공군도 포로들을 참호나 진지 공사에 동원하고 주입식 사상교육을 실시했으며 수용소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해방군화보사'에서 출판한 '영광스런 인민지원군'이라는 사진집을 보면, UN군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UN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라!"라고 각국의 언어로 쓰여진 피켓을 들고 수용소에서 집회를 열었다는 설명의 사진이 있는데, '''포로들 표정은 겁에 질려있고, 다닥다닥 줄을 맞춰 앉아있으며, 주위엔 무장한 중공군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다. 이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제공권이 UN군쪽에 있었던 탓에 중공군 쪽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식량 배급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한국전쟁 극초반에는 미 24사단이 북한군에게 궤멸될 당시 북한군이 잡은 미 24사단의 포로 중에서 병과 부사관은 죄다 손을 끈으로 등 뒤로 묶은 뒤 헤드샷으로 총살시키고 윌리엄 F. 딘같은 꼭 필요한 포로만 데리고 다녔다.
종합하자면, 중국군이 그나마 포로 대우를 그럭저럭 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대변되는 기본적인 선을 지키고자 노력했을 뿐 제네바 협약을 제대로 준수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북한군보다는 백배는 나았지만...[20] 당연히 오늘날에 와서도 포로 후송에 차량을 이용하지도 않을 것이며, 포로에게 식량을 줄 리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전쟁 때도 포로 생포시 하나 이상(때론 '''전부''') 살해해서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과 급소를 가격해서 무력화 시키는 것을 불문율로 여겼으며, 시체는 '''트럭이 지나갈 길에 일렬로 눕혀놓고 트럭이 지나가면서 머리를 으스러뜨리거나'''[21] 살해 후 파묻어 찾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미 24사단 참전자 증언. 당연히 삽질은 다른 포로들이 했다. 자신들이 파묻었는데, 정신이 없던 탓에 어디에 묻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더 충격이 큰지, 죽어도 자신이 파묻은 전우를 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살아도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그나마 미군 포로는 가혹한 대우를 받는 선에서 끝났지만 한국군의 경우 사상교육을 받고 의용군이 되어 총알받이로 내몰리기도 했다. 게다가 그때보다 북한은 더욱 막장이 되었으니 오늘날에는 노예, 성노예로 부리는 정도면 다행이고, 심지어 폭격 위험이 있는 장소에 묶어놓고 인간방패로 쓸 거란 예상도 조심스럽게 논의된다.
6. 각국의 포로 대우
- 미군은 기본적으로 적의 정규군은 물론 비정규군이라도 제대로 된 무장과 조직을 갖춘 것이 명백하면 포로로 인정했다. 또한 자국의 전적인 지원을 받는 동맹국의 군대에도 어떤 이유가 있건 간에 이러한 수칙을 반드시 지킬 것을 요구했고,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지원을 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미군이나 미군의 지원을 받는 한국군, 영국군 등 정식으로 동맹을 맺은 국가의 군대에 항복할 경우 포로 대우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22] 물론 미군도 사람이라 감시하기 귀찮다고 사살하거나[23] 포로 관리병들에 대한 감시가 소홀하여 일부 맛이 간 병사들이 경쟁적으로 포로를 가혹하게 대우[24] 하는 등의 행태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발각되면 중벌이 기다린다.
- 중국군은 삼대기율 팔항주의에 의거 기본적으로 외국 정규군에 대해서는 포로 대우를 제대로 해준다라고는 하지만 현실은 영 좋지 않았다. 특히 포로에 대한 세뇌가 심했다고 한다. 게다가 공산주의로 포로를 세뇌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국 여군들을 붙여서까지 연합군 포로들이랑 결혼시켜 중국에 귀화시켜 눌러앉히려고까지 했다. 그리고 삼대기율 팔항주의도 신화에 불과해서 대도시 하나를 봉쇄해 안의 시민들을 통째로 굶겨죽이지를 않나[25] ,식량배급 없이 행군을 시키고, 낄낄 웃으며 포로를 쏴죽이고, 심지어 부상당한 포로를 산 채로 태워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 러시아군으로 치자면 외국의 정규군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포로 대우를 해주는 편이다.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는 반군도 일단 포로대우는 제대로 하려고 한다.[26] 하지만 백인 우월주의가 쩔어주며 사적 린치가 횡행하고 더욱이 자국의 반란군에게는 정규군보다 더 잔혹한 대우가 기다리고 있다. 특히 체첸 저항군 출신 혹은 반러시아 체첸 의용군 병사면서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혔다면 명복을 빈다. 살아서 집으로 갈 방법은 전혀 없다.
- 과거 소련군 같은 경우는 형식적으로나마 제네바 협약을 지키기는 했지만 고생할 각오는 해야한다.당장 2차 세계대전 직후 만주와 한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던 군대이니....다만 자신이 계급이 높고 딱히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 협조적이라면 잘 대해줄 가능성도 0%는 아니다. 물론 자신들의 상황이 열악할 경우에는 당연히 대우가 나빠질 것이다. 또 자국이 패망했다면 몇년간 억류되어 일하다가 석방될 가능성도 있다.
- 제3세계 군대이고 미군의 지원을 받지 않는 경우에는 포로가 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북한군 같은 경우가 아니면 후진국 군대라는 한계로 처우가 열악한 건 어쩔 수 없어도 포로 대우 자체는 그럭저럭 해주는 편이다. 제네바 협약 미가입국이라도 해당되는데, 국제적으로 합의가 확실하게 이뤄지고 주요 강대국 대부분이 존중하는 조약은 그 자체가 국제 관습법이기 때문이다.
- 북한군이나 다에시, 탈레반, 알카에다 같이 종교 광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실제 테러와의 전쟁 중에 미군 등 다국적군 소부대가 적 대규모 부대와의 전투에 휘말리면 생존자 없이 전멸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는데[27] , 탈출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절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8] 항복해봐야 고문당한 뒤 죽는 게 보통에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잡히면 보태서 참수 동영상이나 찍힐 게 뻔하기 때문이다.
7. 포로 교환
교환 기준은 '''계급보다 병종이 먼저고 그 다음이 계급이다.''' 계급은 같은 계층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1~2계급 차이까지는 허용되지만 병종은 다르면 교환대상이 아니다. 머릿수 같고 계급 같다고 무조건 교환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때문에 장교와 사병이 맞교환되는 일이 없으며 장교의 경우도 일반사관과 특수사관이 맞교환되는 일은 없다.
- 병끼리는 그냥 다 교환 대상이 된다.[29]
- 부사관의 경우는 병종별로 구분되며 같은 병종끼리만 교환 대상이 된다.
- 장교의 경우는 각 병과별로 구분되며 같은 병과끼리만 교환 대상이 된다. 특수사관이라 해도 군의관과 군종사관의 맞교환은 불가능하며 법무사관과 군의관의 맞교환도 불가능하다. 같은 계급 기준이며 위관급, 영관급, 장성급을 따로 분류한다.
- 같은 장교라도 대위와 소령은 맞교환 대상이 아니지만 소령과 중령은 맞교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 직후 윌리엄 딘 소장과 리학구 총좌의 맞교환인데 이 경우 리학구가 준장으로 분류됐다.
8. 참고 항목
[1] 정당하게 민간인을 억류하는 경우라고해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행해져야하며 자국의 군사적 또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민간인들을 부당하게 억류할 수 없다.[2] 부대 차원의 입장에서도 전쟁이 발발하면 엄청난 수의 적국 민간인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들을 그때마다 모두 잡아 포로로 관리할만한 인원이나 물자가 여유로운 군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간인은 작전수행 중인 군대 입장에서는 건드려봐야 절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피해다니는 게 일반적이다. 민심이 안드로메다로 가고, 의병과 게릴라가 일어나며, 국제적인 비난 및 국가 위신 추락으로 인한 외부 압력 등등.[3] 단, 포로에 관한 조항은 1차대전 이후인 1929년에 맺어졌다.[4] 원칙적으로 포로들은 자신의 관등성명 외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사 정보를 밝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단 여단 단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진짜 중요한 군사기밀이면 고문 안 하고 배길까? 예를 들어, 본인이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이끌고 있는 람세스라고 가정하자. 적군인 히타이트군이 없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병력을 진군시키고 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부하들이 히타이트군 몇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이 상황에서 상대방이 관등성명만 외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 역사에선 람세스가 포로 2명에게 채찍질을 통해 히타이트군의 위치를 알아내어서 적들의 매복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5] 단, PMC는 말이 용병이지, 대부분 정규군의 작전을 보조하는 준정규군 역할을 수행하는 점에서 교전권이 없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6] 독일에 잡힌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57% 전후로 추정된다.(소수 견해로는 70%까지 잡기도 한다.) 한편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27% 정도이다.(그에 반해 중국군 포로 사망률은 최대 60%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야말로 둘 다 독보적인 수준.[7] 한쪽만 협약에 가입한 경우 가입하지 않은 쪽이 협약을 위배하지 않는 이상은 가입한 쪽은 협약을 준수해야 한다.[8] 덕분에 이는 깨끗한 국방군의 신화를 만드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것 외에도 냉전이라는 상황 등도 작용했지만.[9] 우리나라와는 다르게(과거 해군과 해병대의 인식표에는 종교가 표기되었던 적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인식표에 종교를 기재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개신교는 P, 가톨릭은 C, 유대인은 H로 인식표를 새겼다.[10] 하지만 일본군 포로만은 그다지 잘 대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어차피 일본군과 싸운 주력은 국민당군이라 중공군이 포로를 학대할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을듯.[11] 물론 대우가 좋지는 않았으나 이는 대전 초반에 소련의 상황이 심각하게 나쁜 탓도 있다. 일단 제네바 협약은 최대한 지키려고 했다.[12] 어느 정도였냐하면 고문은 당연하다는 듯이 기본 옵션에 좋게 죽이는 것이 녹슨 도끼로 머리를 수차례 내리쳐서 고통스럽게 참수해 머리를 장대에 꽃아놓고 다녔다. 구글링을 하면 이 참수장면을 볼 수 있다. 충격받을 수 있으니 주의.[13] 참고로 이 식인사건은 아군이었던 다른 일본군 장성조차도 경악시켰고 결국 주범들은 일본군 장성들한테 얻어터지고 종전 후 전범으로 사형당했다.[14]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일본군은 적에게 잡힌 아군의 포로에게도 인정사정이 없었다는 점이였다. 아군이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합의를 통해서건 탈출을 했건 간에) 돌아오면 환영까진 기대 안해도 적어도 위로는 못할 망정(이는 군사적 효율성 면에서도 당연히 해줘야 하는 행동이다.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한 병사는 포로로 잡혔다는 경험 자체로 이미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이다. 이들을 아군의 전력으로 다시 활용하려면 이 충격을 최대한 빨리 해소할 필요가 있기 때문. 이 때문에 대부분의 정상적인 국가들은 귀환한 아군 포로들에게 포로로 잡힌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조촐하게나마 위문 행사를 해주는 게 보통이었다.) 오히려 갖은 모욕과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단순 현지 징용된 병사(중국인, 조선인 등) 뿐만 아니라 본토 일본인에게도 예외가 없었는데 이는 일본의 포로를 용납하지 않는 관습 때문. 사실 2차대전 당시 소련도 적에게 잡힌 아군 포로에게 인정사정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스탈린 개인의 성향 때문에 그렇게 됐고 소련의 높으신 분들 모두 다 그런 행위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고위층부터 일선 사병들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동참했다는 게 더 문제. 이 때문에 연합군에게 잡힌 일본군 포로는 연합군 측이 별다른 심문을 하지 않아도 순순히 군사 기밀을 말해주거나 폭격 목표를 유도해 주는 등 잘 협조해 주었다. 어차피 아군에게 귀환해도 중벌을 받을 게 뻔하니 자포자기 식으로 협조했다. 일본군의 포로 문제에 대해선 일본군/포로 항목에 자세히 나와있다.[15] 아이러니한 게 이때 수용소 당국에서는 포로들이 국외로 탈출하거나 민간인들에게 어떤 범죄를 저지를지를 걱정하기 보다는, 포로들이 민간인들에게 어떤 짓을 당할지를 더 걱정했다. 전시 상황인 데다 그렇지 않아도 총 쏘는 걸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탈출한 독일군 포로들을 어떻게 대할지는 뻔한 이야기. 다행히(?) 포로들은 죽거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체포되거나 제발로 돌아왔다.[16] 영어에 서툰 자유폴란드군 파일럿들도 독일군으로 오인 받았으며, 심지어 영국군 파일럿의 경우도 "독일 놈이 영어도 잘 하는구나!"며 두들겨 맞기도 했다.[17] 브레멘 출신의 맨체스터 시티 레전드 골키퍼 베르트 트라우트만(Bert Trautmann 1923~2013)도 2차 대전 당시 포로로 잡혔다. 현역 때 공수부대원이었던 그는 석방된 후에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1949년에서 1964년까지 영국 리그에서 508경기를 뛰었다. 2004년에는 축구계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훈장까지 받았다.[18] 익히 알려진 것과 달리, 제복을 착용한 경찰도 합법적인 교전권자이다. 단, 경찰의 존재 목적이 적과의 교전이 아닌 민생치안 등을 위한 것이므로, 전투경찰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점령군에게 저항만 안 하면 총기류를 점령군에게 인계토록 하고 공격하지 않기도 한다.[19] 가령 군종장교가 아닌 종군 성직자나 부상자들을 돌보는 간호 자원봉사자들을 말한다.[20] 한편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은 북한군보다 더 쉽게 투항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항복할 때 즉결처분당할 수 있고 귀환할 때 또 죽을 수 있지만, 중국군은 그냥 외국 적군이라 굳이 죽일 필요도 없고 귀국해도 당적박탈 정도의 중징계로 끝냈기 때문이다.[21] 이러면 신원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주로 후퇴시 사용했으며, 대표적인 예로 서울 수복 당시 중랑교에서 발견된 시신들이다. 이렇게 발견된 시신들은 '반동'으로 몰린 민간인이나 대한민국 공무원, 소자본가들이 대다수라 포로에 대한 처우로 말하기는 곤란한 면이 있기는 한데 민간인이든 포로든 학살한 시점에서 이미 충분한 막장이다. 산 채로 눕혀서 처형한 일도 있다고 한다.[22] 일부 한국군 포로를 학살한 북한군에게 보복하자거나 한국인이 학살당한 만큼 북한의 군병력이건 민간인 거주지건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해 보복해주자는 말이 실현 불가능한 이유가 이것이다. 북한군 포로는 포로 대우를 해줘야 하고 학살을 저지른 자들은 전범재판을 거쳐 처벌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적 보복을 단행할 경우 당장의 기분은 좋겠지만 대의명분을 잃는데다 적군이 극렬히 저항할 것이 안 봐도 비디오에 남의 나라에서 정의롭지도 못한 전쟁을 한다고 베트남 전쟁 때처럼 미국 내 반전여론이 비등할 가능성이 있다. 단 한국의 피해가 지나치게 클 경우 가족을 잃은 병사들이 지휘관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높기는 하다.[23]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참고.[24] 2004년 아부그라이브 포로 학대 사건. 그나마 이게 바로 문제가 된 건 감시병들이 사진을 유출시키는 등 제정신 아닌 짓을 한 데다 무엇보다 수감자들이 반정부군 포로였기 때문이다.[25] 곤장춘,장춘위곤이라고도 불리는 장춘 학살.국공전쟁 당시 장춘이 중공군에게 투항하지 않자 중공군은 장춘시를 봉쇄해 최대 30여만명의 사람을 직간접적으로 죽였다.이는 난징 대학살과 맞먹는 숫자이다.[26] 돈바스 전쟁의 우크라이나 반군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분리주의 그룹과 독립된 그룹으로 나뉘는데, 전자에 붙잡힌 우크라이나군은 실제는 어떻건 간에 신분상으로는 일단 포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포로교환도 했다.[27] 실제로 대테러전쟁 당시 이슬람주의 반군 쪽 부대 인터뷰에서 다국적군의 시신과 노획된 무기는 수두룩했으나, 포로는 정말 가끔가다 한명 나올까말까 했다. 알카에다나 IS 쪽 반군이 아닌 이상 버그달 이병의 사례에서 보듯이 죽이지 않는 경우가 죽이는 경우보다 많았으니까 항복 거부하고 다 죽었다는 소리다.[28] 반대로 미군 부대를 상대로 적의 소부대가 포위당하고 저항이 무의미하면 항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군에 항복하면 최소한 죽이거나 잔혹하게 대하지는 않기 때문.[29] 장교나 부사관과는 달리 전문적이지 않은 데다가 개체수가 월등히 많기 때문에 따로 분류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