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경식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채경식'''
'''蔡敬植'''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자직(子直)
'''본관'''
인천 채씨[1]
'''출생'''
1896년[2] 11월 24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3]
'''사망'''
1950년 11월 6일[4]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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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채경식은 1896년 11월 24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아버지 채승원(蔡昇源)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하영(姜夏永)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해 4월 28일 밤 10시에는 권재갑·채갑원·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학기·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11월 6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27세 식(植) 항렬.[2] 인천채씨대동보 4권 15쪽에는 1895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갑원·채명원·채봉식·채학기·채희각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인천채씨대동보 4권 15쪽에는 1951년 12월 6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