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각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채희각'''
'''蔡熙覺'''

[image]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채희각(蔡凞覺)
'''자 / 호'''
성민(聖民) / 괴당(槐堂)
'''본관'''
인천 채씨[1]
'''출생'''
1894년 8월 2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 미대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2]
'''사망'''
1967년 10월 6일[3]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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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채송대는 친동생[4]이며, 홍연흠은 그의 고모부이다.

2. 생애


채희각은 1894년 8월 2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의 평민 집안에서 아버지 채규식(蔡奎植)과 어머니 성주 도씨 도응호(都應浩)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채희각은 채갑원 등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함께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채갑원의 집에서 채갑원·채봉식·채학기와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 앞서 세 사람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학기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경성감옥·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해 12월 11일 가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7년 10월 6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28세 희(熙) 항렬.[2]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학기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인천채씨대동보 3권 302쪽에는 1944년 2월 29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채송대가 이후 첫째 숙부 채효식(蔡孝植)에 입양되면서 족보상으로는 사촌 동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