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양(북송)

 



蔡襄
1012년 3월 7일 ~ 1067년 9월 27일
1. 소개
2. 생애
3. 서법가로의 채양
4. 차사(茶事)


1. 소개


중국 송나라 시대의 서예가, 정치가. 자는 군모(君謀), 시호는 충혜(忠惠)이며 송사가(송 4대가) 중 한명이다. 조카로는 채경[1], 채변이 있으며 이들 역시 서예가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천주낙양교안(泉州洛陽橋堓)의 비 『만안교기(萬安橋記』 , 『안진경자서고신발(顔眞卿自書告身跋)』이 있다.

2. 생애


흥화군 선유(興化軍 仙遊)[2] 사람으로 송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 2월 12일(1012년 3월 7일) 관원이었던 채수(蔡琇)와 혜안현 덕음리 일대의 명사 노인(盧仁)의 딸 노씨(盧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외조부 노인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15세때 향시에 응시해 18세의 나이에 개봉으로 올라가 국자감에 들어갔다.
인종 천성(天聖) 8년(1030)에 개봉 향시에 1위를 했고, 다음해인 천성 9년(1031)에 진사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장주 군사판관에 임명되어 4년간 재직했다. 이후 서경유수 추관을 시작으로 30여년간 관직생활을 하면서 관각교감, 간관,지간원, 직사관, 수기거주를 지냈고, 삼사사(三司使)[3] 겸 지제고[4], 용도각 직학사, 개봉지부사, 추밀원 직학사, 단명전학사 등을 역임했다.
채양은 본래 권세가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황제에게 직언을 하는 인물이었다. 경력 3년(1043년) 범중엄, 구양수, 여정, 윤수 등이 조정의 부패를 논하다가 파면될 당시 ‘사현일불초시(四賢一不肖詩)’를 지어서 이들을 지지한 행동은 그의 이런 인물됨에 비춰 봤을때 당연했다. 채양의 이런 성품 때문에 권세가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바른말을 아끼지 않는다 여겼고, 인종은 이런 성품의 채양을 총애했다.

경력 4년 복주 지사로 갔으며 경력 6년(1046년) 복건로전운사를 지냈다. 그가 복건로전운사로 있을 당시 복주에서는 백성들이 병에 걸렸음에도 부적을 태우고 무당을 불러 절을 했는데 이를 안 채양은 ‘성혜방후서’를 지어 치료를 권하고, ‘복주오계문’을 써서 낡은 미신과 풍속들을 경계케했다. 아울러 이때 그는 백성들을 동원해 복주 대의부터 천주까지 길 양쪽 700여리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때 백성들은 이 일을 소재로 민요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또 천주에 부임했을 당시에는 장물을 횡령하고 법을 어긴 진강 현령을 탄핵하기도 했으며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성도를 건설하는 등 군사 대비에도 힘썼다.
영종 치평(治平) 3년(1066) 10월에 모친상을 당해 어머니 노씨의 상여를 이고 귀향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067년 9월 향년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는 예부시랑으로 추증했고, 후에 다시 소교사를 추증했다. 또한 조정에서는 시호로 충혜(忠惠)를 내렸다.

3. 서법가로의 채양


채양은 송사가 중 한명으로 불려진 인물답게 서예가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일찍이 진(晋),당(唐) 시대의 서법을 익힌 그는 왕희지, 안진경, 유공권의 서체를 배웠다. 채양은 살아있을 당시부터 호방한 필체로 구양수, 소식 등과 함께 ‘본조제일(本朝第一)’이라고 찬사를 받았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명성이 계속되어 후세 사람들은 소식, 황정견, 미불 등과 더불어 ‘송사가(宋四家)’로 부르고 있다.
채양의 주요 작품으로는 <자서시첩(自書詩帖)>, <사석어서시(謝賜御書詩)>, <도생첩(陶生帖)>, <교번(郊燔)> , <만안교기(萬安橋記)>, <주금당기(晝錦堂記)> 등이 있으며, 저서로 『단명집(端明集)』 40권, 『다록(茶錄)』, 『여지보(荔枝譜)』 등이 있다.

4. 차사(茶事)


채양은 차사(茶事)에 있어서도 유명한 인물인데 복건로전운사(福建路轉運使)로 재직할 당시, 용단차(龍團茶)[5]를 만들어 인종에게 이를 바쳤다. 채양에게 차를 받은 인종은[6] 그에게 군모(君謨)라는 자(字)를 하사했기에 이후 채양은 채군모(蔡君謨)라고 불리게 되었다.
[1] 휘종때의 간신으로 더 유명하다.[2] 지금의 복건성[3] 재정 장관[4] 황제의 교서를 작성하는 관리[5] 소룡단이라고도 한다.[6] 인종은 올바른 소리를 아끼지 않은 채양을 총애해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