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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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제5대 황제. 묘호는 영종(英宗), 시호는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숙무예성선효황제(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肅武睿聖宣孝皇帝). 휘는 서(曙).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송인종의 사촌 형제인 복왕 조윤양(趙允讓)의 13번째 아들로 송 인종의 5촌 조카에 해당한다. 초명은 종실(宗實)이었으나, 즉위 후 서(曙)로 개명했다.[1] 어린 시절 인종의 양자가 되어 제왕 교육을 받았지만, 1039년 인종의 친아들이 태어나면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인종의 아들이 일찍 죽은 뒤에도 궁 밖에서 살다가 1063년 인종이 붕어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때 자신이 읽던 책들 외에는 궁으로 가져온 게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사실 인종의 5촌 조카이자 양자였지만 즉위하는 과정에서 재상 한기의 도움이 컸다. 한기가 그를 지지해준 것은 일찍이 조종실(영종)이 인종의 양자가 되었고, 어려서부터 황자로서 갖춰야할 교육을 받은 그의 자질과 능력이 괜찮았던 까닭이 컸다. 또 나이도 다른 종실 남자 중 성년에 접어들었다는 점, 조종실이 평소 한기를 비롯한 신하들을 존중해왔고 이미 조정 내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만들어뒀다는 점도 그가 영종의 즉위를 지지한 이유였다.
과거 정헌태후 유씨(유아)의 수렴청정을 경험한 인종은 황후 조씨가 평소 유아를 많이 본받으려고 해왔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여러 중신들이 건저 문제를 제기할때마다 늘 “짐도 다 생각이 있소이다.”라고 말할 뿐 자신과 황후가 일찍이 궁으로 데리고 와서 기른 양자 조종실(조서)을 확정적으로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황자 조서(조종실)를 후계로 삼아도 ‘조황후의 조카가 조서의 부인이었기에 황후가 반대할 이유가 없고 , 이미 조서가 한기 등의 지지를 받았기에 신하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또 정국 주도권 역시 조서가 신하들의 지지를 받고 나이도 있기에 조황후에게 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종법 문제상의 번거로움 등도 있었기에 인종은 신하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말만 안 할 뿐 여러모로 뒤를 잇기에 무리가 없는 조서에게 사실상 뒤를 잇게 할 생각으로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2] 이런 상황에서 인종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고, 조황후와 중신들은 인종이 죽고 다음날 황자 조서를 인종의 후계자로 삼았다.
2.2. 짦은 재위기간과 사망
인종이 가우 8년(1063) 3월 29일 자정 후원 복녕전에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고 4월 1일 황후 조씨가 조정 중신들과 함께 인종의 붕어 사실을 알렸다. 아울러 인종과 조황후의 양자인 황자 조서를 후임 황제로 즉위하게 했다. 그런데 이날 황자 조서는 황후와 조신들의 즉위 요청에 대해 고개를 떨군 채 두려움에 떨며 “그렇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이때 조신들이 조서 옆으로 다가가 억지로 조서의 땋은 머리를 푼 뒤, 어복을 입혀 보좌에 앉혀놓았고 그를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시켰다.[3]
영종은 즉위 이후 친부 추봉을 추진했던 문제 등으로 재위 내내 양모 조태후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4][5] , 전체적으로는 인종 치세의 연장선과 비슷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영종 치평 연간 내내 친부(복왕 조윤양)의 호칭을 놓고 예법 논쟁이 벌어졌고[6] , 이 대간 논쟁에서 사마광이 이름을 떨치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종은 즉위 직후, 친부 봉작 문제 못지 않게 양부 인종의 3년상을 고집하며 꾀병까지 부려가면서 이를 관철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영종의 시도는 신하들이 3년상을 치루는 것을 반대한 까닭에 실패했다. 영종은 국가 업무를 추진할때마다 늘 절차를 중요시 여기고 선황들이 어떻게 비슷한 사무를 처리했는지 물은 뒤 신중히 결정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재상 한기 등의 보좌를 받아 신하들과 관계를 돈독히 쌓을 수 있었고, 인종 대에 활약한 범중엄, 두연, 유항 등이 정무를 돕고 송기, 구양수, 부필 등이 요직에 올라 영종과 함께 했다. 이들의 도움을 받은 영종은 과거 사례를 비춰 문제점을 파악하고 송나라의 파탄난 경제와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개혁에 착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즉위 연간동안 수많은 재해들이 발생하고[7] 영종 본인도 기관지쪽이 좋지 않고 병약해서[8] 즉위 4년만인 치평 4년(1067년) 정월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20살이었던 황태자 조욱이 즉위했다.
사망 후에 영후릉에 안장되었으며 1067년 1월에 존호로 체건응력문무성효황제(體乾膺歷文武聖孝皇帝)를 받았고 시호로는 헌문숙무선효황제(憲文肅武宣孝皇帝)가 추증되었다. 그러다가 1083년에 다시 시호가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숙무예성선효황제(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肅武睿聖宣孝皇帝)가 되었다.
3. 가족 관계
영종은 역대 송나라 황제 중 빈으로 책봉한 후궁이 없는 인물이자 정실부인과 부부 사이가 워낙 돈독하고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후는 선인성렬황후 고씨이며 후궁은 소의 포씨와 수용 장씨가 있는데, 4남 4녀 중 생모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공주 2명을 제외한 4남 2녀를 황후와의 사이에서 얻었다.
선인성렬황후 고씨는 명문가 출신이자 고준보의 딸로 그녀의 이모가 송 인종의 계후인 자성광헌황후 조씨(慈聖光献皇后 曹氏)이므로 아내를 통해서도 선 황제인 송 인종과 인척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영종의 아들들 중, 윤왕(潤王) 조안(趙顔)은 요절했다.
4. 둘러보기
[1] 종실(宗實)이라는 이름에 쓰이는 한자가 둘 다 생활 속에서 많이 쓰이는 한자이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서 개명한 것이다.[2] 당시 문중의 소종이 대종의 뒤를 잇는건 무척 번거로운 문제였기에 인종은 자신의 양자인 조서에게 ‘종실’이라는 명칭을 붙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조서는 한사코 이를 거절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겸손하게 사양해 인종을 흡족하게 만들었고 이후 신하들에게도 사군으로 인정받게 되어 인망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3] 전형적인 서생인 조서(영종)는 당시 종실예법이 엄격하고 종법제도가 국가의 근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다른 이들보다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하고 엄격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양모 조황후와 조정 중신들의 명으로 양부 인종의 후계자로 선포되었음에도 두려움에 떨며 한사코 마다하려고 했다.[4] 영종은 즉위 직후부터 정국 주도권 다툼, 친아버지의 봉작 문제로 인종의 계후(이자 영종 본인에게는 양모) 조태후와 대립했다. 여기에는 조태후가 정국주도권을 쥐려 했던 이유로 영종에게 옥새를 내주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사실 영종이 조태후를 여러 차례 속이고 평소 조태후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이유가 컸다. 실제로 영종은 옥새를 돌려받는 과정에서도 재상 한기와 짜고 다소 무례해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조태후를 속여 서로의 감정이 상했다. 이후에도 양모 조태후를 대함에 있어서 소홀히 대했다. [5] 자신이 강력히 추진해오던 추봉 문제를 조태후가 동의하지 않자 매일같이 고의로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영종 친부의 추봉이 미뤄지자 어느날 조태후를 모시고 궁궐내 복숭아꽃을 보고 함께 식사를 한 자리에서 건강을 축승한다면서 조태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사인을 받아내 아버지를 추봉시킨 일로 크게 조야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연히 술이 깬 뒤 영종의 속셈을 알게 된 조태후는 시정잡배도 안 할 방법으로 어머니를 속였다고 노발대발했고, 신하들까지 반대했기에 영종은 이를 취소해야했다.[6] 당시 송나라 조정에서는 예법상 복왕 조윤양이 친부이기에 ‘황고’라고 불러야 된다는 의견과 양자로 일찍이 입적했기 때문에 ‘황백’이라고 불러야 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고 한다.[7] 숙주, 박주에서 수재가 크게 나고 하남, 산동, 강소, 절강 일대에서도 폭우가 내려 재난이 발생했으며 수도에서도 홍수로 사람이 죽는 등 일련의 천재지변이 일어났다.[8] 치평 원년 11월과 영종이 죽는 해인 치평 4년에 수도에서 하늘이 탁하고 뿌옇게 되는 대풍매가 있었는데, 이후 기침을 얻어 병에 걸렸고 이 병이 다시 걸려 사망하였다. 사마광의 기록에 따르면 영종이 이영각에서 경사강독을 듣던 중 기침을 하였는데 이후 병이 나았지만 다시 병에 걸렸고 사망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손자인 철종 역시 겨울에 감기에 걸려 기침으로 고생하다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