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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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학자, 정치가. 미주(지금의 쓰촨성) 미산 출신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 소식이란 이름보단 성씨에 호를 붙여서 부르는 방식인 '''소동파'''로 더 잘 알려져있다.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2] 의 한 사람이다.
2. 생애
22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직후 모친 상(喪)을 치러야 했고, 또 그 직후엔 상경하고 얼마 안 되어 아내와 부친 상을 치러야 해서 또 낙향(...)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과거 합격 당시, 야사에서는 차석으로 급제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시험관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구양수가 소식의 글을 보고 "이건 내 애제자의 글이 틀림없다. 훌륭하지만, 이걸 장원 줬다간 부정 의혹이 일 수가 있다."해서 차석으로 줬다고 한다. 당시엔 부정 채점을 막기 위해서 시험관들이 채점할 땐 답안지의 이름을 가리고 했었다.
이후 33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는데, 이때는 마침 송신종의 시대로 왕안석의 신법 운동으로 인해 조정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때였다. 소식은 국가 정책의 개선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왕안석의 세력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위선과 속됨 때문에 왕안석 본인에게도 의심을 품고 있었고, 또한 급격한 개혁은 오히려 국정에 혼란만을 가중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일반적으로 소식을 구법당의 일파로 보지만, 그는 구법당의 의견에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소수파였다. 실제로 후에 구법당이 신법을 일괄적으로 폐지하려 하자, 그는 일부 법은 존속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문장력을 총동원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황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관으로 발령받아 오랫동안 지방을 전전했다. 이 과정에서 부임지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해 명성을 얻었으며, 남송 수도가 될 임안(지금의 항저우) 지사로 가서 임안을 더 발전시키고 온다. 동파육에 대한 고사(故事)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그러다 1079년에 지방의 실태를 올린 상소가 신법당 일파의 눈에 거슬려(이 때 왕안석은 실각한 상태였다) 파직당하고 문초까지 받았으나, 태조의 유훈[3] 도 있고 하여 간신히 목숨은 건져 유배형을 당했다. 이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신선 사상 등에도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신종이 죽고 구법당이 집권하면서 소식은 예부상서로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이미 신법의 유효성 여부는 안중에도 없이 권력쟁탈의 빌미로만 이용하는 조정의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고, 특히 당시 세를 불려던 성리학자들과 사이가 나빠져 또 귀양크리(...)를 당했다. 훗날 성리학을 숭상하는 이들이 이런 사실과는 상관없이 소식의 시를 추앙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 참고로, 이때 유배된 곳이 해남인데 소식 덕분에 '''해남에 학문이 전해졌다'''고 한다. 이전까지 해남 출신들은 과거를 본다는 것 자체도 생각지 못했는데 소식이 가르친 제자들 몇이 해남 최초로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 뒤 휘종이 즉위하면서 사면받아 상경하던 도중에 병으로 객사하였다.
3. 여담
설니홍조라는 사자성어와도 연관이 있다. 소식이 소철에게 보낸 답시에서 유래한 사자성어.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가 신법에 반대했던 사실을 두고 여러가지 얘기가 난무한다. 왕안석을 지지하는 측은 그가 지방을 전전하던 과정에서 신법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전향했노라 하는가 하면, 반대로 사마광을 지지하는 측은 오히려 지방 생활 중에 신법의 폐단을 보았으며 왕안석 일파의 위선을 두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예술가로서, 또한 백성을 위해 일한 관리로서 모든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움직였을 따름이다.
시인 뿐만 아니라 서예가로도 당대제일로 평가받아 미불(米芾), 황정견(黃庭堅), 채경(or 채양)과 함께 북송 사대가로 손꼽히기도 한다. 서예는 처음 『난정서』를 배우고 안진경의 서예에서 인간성의 발로를 발견하였으나 후에 고인의 모방을 배척하고 일가를 이룬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한반도를 비롯한 다른 주변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규보는 "학자들이 과거(科擧) 공부할 때는 풍월에 눈돌릴 틈이 없다가,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선 소동파의 시에 푹 빠져버린다"라고도 했다.
김부식의 이름 중 '식'(軾)이 소식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의 동생 이름도 소식의 동생인 소철(蘇轍)로부터 이름을 딴 김부철이다.
사(문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사는 서민적이거나 여성적인 정서가 주축이었는데, 남성적, 서사적 정서를 가진 사를 새로 지어 사의 주제가 풍부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식의 사는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대한 견해에선 위진정통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러면서도 공융을 영웅으로 높게 평가하여 조조는 음험한 도적이자 이리같은 자로 평생 유비를 두려워 하였고 유비는 공융이 천하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준다는 것에 기뻐하였다, 하늘이 만약 한나라에 복을 내려 공융 곁에 유비가 있었다면 유비가 조조를 베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소식의 정통론이라는게 삼국 전부 정통성도 없고 도덕도 없어 누구도 천하통일 못했으니 힘쎈놈이 정통이다 이 수준이라...
복어를 좋아해서 죽음과도 바꿀 맛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3.1. 동파육 개발?
설에 따르면 한 요리의 개발자이기도 한데, 바로 중국요리 중 가정식이지만 한국의 중국집에서는 고급식당이 아니면 보기 힘든 음식인 동파육(東坡肉)이 소식이 만든 요리라고 전해진다. 돼지고기의 삼겹살이나 오겹살을 간장을 베이스로 한 소스에 졸여서 만드는 조림과 수육 중간 정도의 음식인데, 저장성 항저우와 상하이 지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요즘은 인터넷에 만드는 법이 상세하게 올라와 있어서 우리나라 일반 가정에서도 잘 따라만 하면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동파육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단 어떤 기원이든 소식과 연관되었다는게 정론이다. 아래의 내용은 동파육의 기원 중 비교적 잘 알려진 내용 하나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요리의 원형은 빨갛게 구운 고기라는 뜻의 '홍소육(紅燒肉)'으로, 동파육처럼 돼지고기 삼겹살 부위나 양고기로 만들긴 하지만 간장소스가 가미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소식은 1077년 서주의 지주(知州)[4] 시절 홍수가 나자 백성들을 이끌고 제방을 쌓아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아 민심을 안정시키고 인망을 얻었다. 백성들은 감사의 뜻을 담아서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바쳤는데, 소식은 입맛이 까다롭고 미식가였으며 자기가 만든 요리를 나눠주는 취미도 있었기 때문에 그 고기들로 홍소육을 만들어 백성들과 나눠 먹었다.
자신들이 선물한 고기를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다시 베풀어 준 소식의 인간적인 면에 반한 백성들은 그 홍소육을 '고마운 마음이 담긴 고기'라는 뜻으로 회증육(回贈肉)이라고 불렀고, 이 요리는 서주의 인기 요리가 되었다.
3년 뒤인 1080년, 소식은 조정을 비판하는 글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황주에 유배되었다. 따로 사람을 부릴 수도 없는 유배인의 신분이라 소식은 내가 바로 요리사!라는 심정으로 손수 밥을 해먹고 지냈다. 이때 돼지고기로 홍소육을 즐겨 해먹었는데 요리법을 바꿔서 약한 불에 적은 물로 푹 삶는 수육스타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요리법을 시로 적었는데 이 시가 바로 '식저육(食猪肉)'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다시 9년이 지난 1089년, 황주 유배를 마치고 관직에 복귀한 소식은 절강성 항주(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의 지주로 부임하여 폭우로 범람한 태호(太湖)로 침수피해를 입은 민생을 구제하고, 항주의 유명한 호수인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아 미리 침수를 막았다. 중국의 관료의 통치덕목에 꼭 들어가는 것이 물을 다스리는 치수사업인데, 소식은 이 치수사업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소식 덕분에 폭우에도 호수범람 우려없이 무사히 살게 되자 백성들은 소식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는데, 때마침 전에 서주에서 살았던 사람이 예전 소식이 백성들과 함께 홍소육을 만들어 먹었는데 소식이 그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고 가르쳐줬다.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소식에게 돼지고기를 선물하자, 늘 먹던 홍소육에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던 소식은 돼지고기 덩어리를 네모나게 잘라 찜통에 넣고 간장 양념을 해서 삶아보았다. 먹어보고 맛이 괜찮자, 소식은 바로 그 요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백성들을 잘 돌봐주는 데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까지 만들어주는 소식의 유능함과 덕을 기린 백성들은 그 요리를 소식의 호를 따서 동파육이라고 이름짓고 항주의 대표요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동파육이 항주 저잣거리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본 소식의 적대세력들이 이를 와전시켜 소식이 백성들에게 동파육을 강제로 팔아 이득을 챙기고 있다고 탄핵했다. 더 큰 문제는 무능한 송나라 조정이 진상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적대세력의 탄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이 때문에 소식은 또다시 해남(海南, 하이난)으로 유배를 떠난다.
백성들은 기껏 좋은 어르신을 만나 큰 덕을 입었는데 갚지도 못했다며 미안해 했고, 대신 소식이 가르쳐준 요리법을 지켜 동파육을 항주의 명물로 대대손손 전수했다. 덕분에 소식이 죽고 송나라가 망하고 다시 원명청의 왕조를 거쳐 1956년에 정부로부터 항저우를 대표하는 36대 요리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3.2. 고려에 대한 비판
貊賊 入貢 無絲髮利 而 有五害 今請 諸書 與 收買 金箔 皆 宜勿許。
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6] 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여러 서책과 더불어 거두어 사가는 금박 모두 마땅히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중국에서 위인이자 시인으로 알아주는 인물이지만 고려를 천한 나라라고 하는가 하면[7] 고려에 대한 서책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연호도 송나라와 다른 연호를 쓰며 멋대로 고려 황제를 칭한다고 말이다. 한편, 서책 수출을 반대한 데에는 송의 안습한 대외관계 탓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사방에서 틈만 나면 송을 뜯어먹으니, 그런 나라 사정 속에선 고려도 위험한 예비 적성국가로 보였을 법하다는 것. 실제로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 왔을 때 엄청나게 디스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요나라에 하도 치인 탓에 고려를 홀대할 수 없었던 송나라의 사정상, 의천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송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소동파의 주장도 아예 일리가 없는건 아닌데, 실제 당시 송은 요와 중원을 두고 다투고 있었고 문종~숙종에 이르기까지의 고려는 이런 요와 송 사이에서 간을 보며 '''60만'''에 달하는 정병을 키우고 있었다. 요든 송이든 중원을 노리는 상황에서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고려를 도모하기엔 송은 황해가, 요는 천리장성 때문에 장기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상황은 송-요가 단독 1위를 노리는 공동 1위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가진 2위 고려가 양쪽 모두에게 을질을 하고 있었던 천하삼분지계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송이나 요나 고려 사신을 후하게 대접해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송의 재정과 품위에 꽤나 부담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사신들은 돌아가는 길에 송나라인의 물건을 강탈하거나, 조공품은 제대로 보내지 않으면서 하사품은 10배로 뜯어가거나, 이 하사품을 개봉과 항주 같은 대도시에서 바로 금과 은으로 바꿔서 가져가거나, 군사기밀인 지도를 비롯해 황실에만 있는 희귀도서들을 달라고 하거나, 황제에게 입시하기 전에 다른 사신들[8] 과 먼저 만나 접대를 받거나 하는 등등등, 안하무인적 행태를 보여줬다.[9] 허나 당시 국제관계상 송은 고려를 어쩌지 못했다.[10] 그러니 열불은 나고 고려가 사실상 주는건 없는데 달라는 것만 많다는 식으로 깐 것. 위의 의천 사례만 봐도 소동파 입장에선 북송이 고려에 휘둘리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이런 감정을 고려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11]
한편, 이러거나 말거나 정작 소식은 고려인이나 후세의 조선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 고려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시는 모름지기 소식과 황정견을 모범으로 삼았고, 과거에 급제한 33명을 가리켜 삼십동파출[12] 이라고 할 정도로 소식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현대에선 그저 고려를 깐 혐한이더라~ 이렇게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친일 행적으로 논란[13] 이 된 시인 이은상도 수필 소동파에서 어느 식당에 가니 적벽부가 적힌 시를 액자로 매달고 있어서 소동파가 고려를 혐오하던 자인데 이게 뭔짓이냐고 호통치자 식당 주인이 놀라서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인줄 몰랐다며 액자를 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리도 고려를 혐오했는데 고려나 현대 한국에선 여전히 소동파가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 무슨 일이냐고 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14]
결론적으로 고려에 대해 반목하는 감정이나 혐오 성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현대에 혐오범죄처럼 아무런 근거 없거나 말도 안되는 이유로 무조건 고려를 싫어한게 아니며 이에 대해 '''고려도 딱히 할 말은 없다'''는 게 중론. 실제 기록을 보면 그의 제자인 장뢰가 당시 송나라에서 인기를 끌던 고려 부채[15] 를 구해 주자 고려 부채를 칭찬하는 시를 짓기도 한걸 보면 '고려' 자체를 싫어한거로 볼 수는 없고 당시 고려 정부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현대에도 일본 정부는 싫어도 일본 문화나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소동파 본인의 성향과 별개로 그의 한시가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이러한 성향을 이유로 그의 업적을 절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작가 본인의 행보와 문학적인 성취는 별개로 봐야한다. 그런 만큼 순수하게 시로서 좋아하는 것에 대해 비난할 이유는 없다.
4. 둘러보기
[1]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Sū Shì이다.[2] 후한대부터 산문(수필)에 유미주의적인 풍조가 만연하자, 문장은 진(통일왕조) 이전의 글이 그러하였듯이 그 내용에 도리(道理)를 품고 있어야 한다며 고문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 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s-3 구양수(歐暘修), 소순,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소식, 소철.[3] "선비를 사화(士禍)로 해치지 마라."[4] 주의 1급 행정관. 주지사쯤에 해당한다.[5] 맥적(貊賊) (적은 도적 적 자다.(...)) 은 북방 이민족인 맥족을 뜻하며, 소동파의 이 대사에서는 맥족의 후예인 고려를 낮춰 부르는 용도로 사용했다.[6] 돈이 너무 많이 들며, 백성들이 힘들고,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 넘기고, 말로만 송을 받든다면서 정작 실리만 챙겨가는데다 심지어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는 것의 다섯가지.[7] 하지만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구경하였으면 원이 없겠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고 하면서 금강산에 대해선 극찬을 했다고 한다. 물론 소동파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 9월 21일 己未 1번째 기사에서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며, 고려에서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라는 말이 중국에 있을 정도다'고 하므로 꼭 소동파가 아니라도 저런 명성이 중국에 어느정도 퍼져 있었다는 것 자체는 분명해보인다.[8] 서하, 일본, 남만, 요 등[9] 괜히 북송 시기를 다루는 포청천 드라마에서 고려태자의 깽판 같은 에피소드가 나오는게 아닌 것이다.[10]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송나라 군사력으로는 서하나 요나라, 이후 금나라 견제하기도 벅찼기에 고려까지 쑤실 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국경선을 맞대고 있던 것도 아니고.[11] 그런데 이게 북송에만 이랬던 것이 아닌데, 고려는 상대적으로 가기 편한 요에 더 많이 조공을 했고, 이는 바꿔 말하면 더 많은 하사품을 요로부터 뜯었던 것이며, 요나라 지도 또한 뜯어내서는 송에 공유하기도 했다. 심지어 비위에 거슬리면 요나라 관리들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채찍으로 때리는 등 송보다도 아낌없이 을질을 했다(...).[12] 이규보의 답전리지론문서에 나오는 문구.[13] 친일파 연구로 유명한 故 임종국이 90년대에 쓴 책자인 <한국의 친일파 99인>에서도 나왔을 정도인데 이에 대하여 억울하다는 반대 주장도 있지만 이은상에 대한 친일 증거가 여러모로 나오고 반박되고 있다.[14] 친일 논란 있는 인물이 민족주의적 발언을 하니 이게 뭔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자 중 민족의 존속과 민족국가 건설(독립)을 동일시하지 않던 민족주의자(흔히 타협적 민족주의자라 불린다)들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일제에 비굴하게 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일 행각을 하고 일제와 가깝게 지내면서도 한편으론 민족주의 스탠스를 취한 것이다. 일제 자체도 민족주의에 심취해있었기도 하고.(정확히 말하면 나치 독일의 아리안 제일주의와 같은 침략적 민족주의다. 조선이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의 저항적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 게다가 이은상은 친일 행적은 물론 서정주처럼 생전 친독재 스탠스를 보인 기회주의자라는 평이 다수이다. 적어도 자신이 속한 나라에 애국하기 위해 고려를 비판하고 민생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던 충신 소동파를 이은상이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싶다.[15] 소나무로 만들어 부드럽고 고풍스러워서 중국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