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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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3. 어록
4. 평가


1. 개요


'''죽어서 하는 기부보다 살아서 하는 기부가 더욱 즐겁다.'''

찰스 프란시스 척 피니 (Charles Francis Chuck Feeney).
미국의 위대한 사업가이자 기부왕으로 유명하다.

2. 일생


척 피니는 1931년 4월 23일, 뉴저지의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험사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간호사로 가정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실한 부모 덕분에 세계 대공황을 잘 견뎌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때부터 타고난 사업가였다. 10대 때 크리스마스카드와 우산 등을 팔아 용돈을 마련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돈 버는 데 재능을 보였다.
코넬대 호텔경영학과 재학 시절에는 샌드위치 장사로 돈을 벌며 사업가의 자질을 일찌감치 선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는 한국전쟁에서 미국 공군으로 복무한 경험을 살려 미 군함에서 면세 술을 팔기도 했다.
1960년. 29세의 나이에 대학친구들과 같이 DFS면세점[1]을 공동 창업했다. 그리고 매년 천만 달러 이상을 벌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 부터는 5천 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연간 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게 되어, 1988년에는 약 1조 5,000억 원(13억 달러)의 자산을 달성해 <포브스>가 발표한 부자 순위 23번째에 이름이 올랐다.
그러나 그는 구두쇠로 유명했다. 직원들에게 이면지를 쓰게 하거나, 소송에 휘말렸을 때 변호사 수임료마저 깎으려 했으며, 경제인 모임에서도 계산을 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돈 많고, 잔인하고, 결단력 있는 갑부.'[2]
그러던 중 1997년 DFS면세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로인해 회계장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뉴욕 컨설팅 회사' 라는 이름으로 15년 동안 2,900회 지출된 금액은 무려 40억 달러. (4조 4천억원)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빼돌렸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곧 진실이 드러났다.
비밀 장부의 지출 내역은 모두 '기부'였다.
1982년 애틀랜틱 재단[3]을 설립해 세계 각국에 자신의 자산 99%를 기부했던 것.
초기 기부 활동은 자신의 모교인 코넬대학교와 모국인 아일랜드에 집중되어 있었다. 모교인 코넬대에 6억 달러, 캘리포니아 대학에는 1억 3천만 달러, 스탠퍼드 대학에 6천만 달러, 고국인 아일랜드 고등교육에 10억 달러를 각각 기부했다.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인 척 피니에게 억만장자가 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한 코넬대에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과 아일랜드를 넘어 베트남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으로 기부 시야가 확대되었다.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을 위해 수술비를 제공하고 아프리카의 급성 전염병 퇴치를 위해 거액의 자금을 투자했다.
또 휴먼 라이츠 워치(HRW)와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등 인권단체에도 기부를 시작했다. 이 수많은 곳에 기부해온 척 피니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부하는 곳에 기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것을 요구했고, 이름이 밝혀지면 기부를 그만둘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그가 이렇게 검소하고 남을 돕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대공황 시절, 경건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일랜드 노동자 부모의 자녀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하지만 서로 돕는 공동체 의식을 배웠다. 이는 봉사와 기부 활동을 열심히 하던 그의 부모의 영향이 컸다.
특히 적십자사의 자원봉사 간호사로 일했던 어머니 매들린은 평소 남을 도울 때 “받은 이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면 자랑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돕는 행위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경계시키는 한편 도움을 받는 이의 기분을 헤아리라는 뜻이었다.
비록 비밀은 들통났지만 그의 기부는 계속되었다. 척 피니가 1980년대부터 35년간 사회에 기부한 돈은 약 9조5,000억 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매일 1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죽기 전까지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면 그만큼의 액수를 기부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척 피니의 소원은 비로소 작년 말에 이루어졌다. 마지막 재산인 약 80억 원을 모교인 코넬 대학교에 내놓은 것이다. 척 피니는 현재 아내와 재단 소유의 임대 아파트에서 지내며 어릴 때 부터 몸에 밴 검소한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약 1만 4,000원짜리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니며, 이동할 때는 버스를 타고, 비행기도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
그는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돈은 매력적이지만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고. 척 피니는 재산의 4분의 3을 기부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처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를 원했다. 그의 신념은 ‘살아 있는 동안 기부’하는 것이었고 85세이던 2016년 말, 드디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당사자에겐 그 누구보다 행복한 파산일 것이다.

3. 어록


"돈 벌기 위해 일하지 않았다. 부는 그 과정(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따라온 것일 뿐"

“부(富)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

“돈은 매력적이지만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


"부유한 죽음은 불명예스럽다"

"부호 명단에서 빠지고 싶다면 돈을 잃거나, 남에게 줘버리거나, 죽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첫째 경우는 생길 것 같지 않고, 셋째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둘째만 남는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돈만 내고 끝나는게 아닙니다.

그들이 자립할 수 있게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죠."

“사람들이 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행복하고, 돕지 않을 때 불행합니다!”


4. 평가


"척 피니가 나의 롤모델"

- 빌 게이츠

"척은 나의 영웅이고, 빌 게이츠의 영웅이다.

그는 모두의 영웅이어야 한다."

- 워런 버핏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선 사업가는 누구일까? 마이크로소프트 황제 빌 게이츠도, 전 재산의 85%를 기부한 전설적 투자자 워런 버핏도 아닌 DFS 창업자이며 아일랜드계 자산사업가인 척 피니이다.

- 로이터 통신

척 피니는 그동안 행한 자선으로 인해 생존해 있는 미국인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미 어깨를 겨루고 있다. 아마도 언젠가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자비로운 미국의 자선사업가가 될 지도 모른다.

- 타임지

아일랜드에서의 애틀랜틱 재단의 활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었으며, 이는 자선활동이라는 위대한 전통 때문만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 척 피니의 고결한 이타심, 진정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같은 절제 때문이기도 했다.

- 셰이머스 히니 (노벨 문학상 수상자)

척 피니는 아일랜드의 교육과 연구에 아주 중요하고 두드러지며 폭넓은 공헌을 했으며, 북아일랜드의 평화 협정 진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너 오클리어리의 통찰력 있고 정확한 설명 덕에 이 훌륭한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버티 어헌 (아일랜드 국무총리)

전 세계의 대학 총장들은 매일 무릎을 꿇고 앉아 척 피니를 만난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 프랑크 로즈 (코넬 대학 명예총장)

도널드 트럼프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거꾸로 산다면 바로 피니의 모습이 될 것이다.

- 짐 드와이어 (뉴욕 데일리)

[1] 듀티 프리 쇼퍼스 Duty Free Shoppers Group[2] Rich, ruthless and determined. 1988년 미 경제 주간지 포브스의 평가[3] 아틀란틱 필란트로피, 아틀란틱 기부 재단 The Atlantic Philanthrop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