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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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기업인. 이른바 '''철강왕'''으로 알려져있다.
2. 상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으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 등과 함께 19세기 미국 산업계를 대표했던 기업가이자[2] , 기차역에서 심부름하던 소년이 근성으로 초대형 철강회사의 CEO까지 올라간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기도 하다.[3]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전성기 때 재산을 현재로 환산하면 3720억 달러로, 원으로 환산하면 '''약 450조 원'''이다. 이는 전성기 빌 게이츠(1100억 달러)[4] 회장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이고, 록펠러 회장과 말리 제국의 황제 만사 무사에 이은 인류 역사상 3번째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부자 사업가라고 한다.
세계적인 거부, 잔머리 굴리는 사업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스스로는 평생 근검절약했다고 한다. 후술되어있듯 부자로 죽는건 불명예스런 일이라며 기부도 생각보다 많이 한 인물.
3. 일생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된 그의 일대기.
1835년 11월 25일 스코틀랜드 던펌린의 파이프 지방의 던펌린에서 출생했고, 1919년 8월 1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레녹스의 섀도브룩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3.1. 어린 시절의 이야기
카네기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식료품 가게에 가게 되었다. 엄마가 물건을 사는 동안 그는 가만히 서서 체리 파는 할아버지 앞에 놓인 체리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 할아버지가 "먹고 싶으면 한 줌 집어 먹으렴"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가만히 할아버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카네기의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한 줌 집어도 돼." 라고 말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체리를 한 움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제서야 고맙다고 말하며 두 손으로 체리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어머니는 카네기에게 왜 할아버지가 집어주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네기 曰,
이 일화는 주인공을 바꾸어서 유머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할아버지 손이 저보다 훨씬 크니까요"'''
3.2. 스코틀랜드
카네기가 태어날 무렵엔 산업 혁명으로 기계가 서서히 보급되면서 가내수공업이 설 자리가 좁아졌고, 아버지인 윌리엄 카네기(William Carnegie) 역시 점차 사업이 힘들어졌다. 그 때문에 카네기 역시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일을 조금씩 도와야 했고 이 과정에서 점차 근성을 키우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삼촌인 조지 로더(George Lauder)로부터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글과 스코틀랜드의 영웅들 이야기(윌리엄 월레스 등)를 듣고 꿈을 키웠다. 카네기네 집은 이웃집 위버네 가족과 공동으로 살 정도였지만 1층짜리 원룸이었다. 즉, 큰 방 하나에서 작업하고 먹고 잤다는 말. 이때 친구들과 함께 토끼를 키우자고 했는데 여기서 그는 사람을 다루는데 유능한 재능을 발휘했다. 풀을 뜯어오면 토끼에게 뜯어온 친구의 이름을 붙인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5]
이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로더 삼촌이 "나중에 돈을 많이 번다고? 그럼 (창 밖에) 보이는 고성을 사서 시에 기증하면 어떨까?"라고 지나가는 투로 얘기했는데, 말년에 카네기는 정말로 그 고성을 사서 던펌린 시에 기증했다.
3.3. 아메리칸 드림
이후 가족의 생계가 힘들어지자 아버지 윌리엄은 친척의 편지를 받고 미국으로 갈 생각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일가족 전체가 펜실베이니아 주의 피츠버그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에도 카네기는 동생 톰과 함께 아버지를 도왔다. 이후 용광로에 석탄을 넣는 화부 역할을 하다가 성실성을 인정받아서 전보배달부가 되었다.
또한 글 재주도 있었는지, 동네의 한 유지가 개인 도서관을 열자 편지를 보내서 자신들도 출입 가능하게 해달라고 했고 결국 승낙을 받았다. 도서관을 열 때 조건이 "일하는 소년들을 위해서"였는데 전보배달부는 취급이 아르바이트급이라 다들 우린 안될거야 아마라고 포기하고 있었다. 이에 카네기가 "우리는 직장 없이 일하는 소년들입니다"라고 써서 보낸 덕에 가능해진 것이다.[6]
이후 전보배달부에서 모스 부호를 써서 전보를 보내는 전신기사로 승진했고, 결국 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 토머스 A. 스콧(Thomas A. Scott)의 비서 겸 전신기사 자격으로 취직했다.
3.4. 철도회사 시절
장거리 노선에 침대차를 도입하여 큰 성공을 이루던 도중, '''얼마 후 구입한 농장에서 막대한 석유가 터져 벼락 부자가 된다.''' 공업의 기초가 철강 산업임을 예견하고, 석유로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철강업에 투신, '카네기 제철'을 세워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석탄 채광부터 운송과 생산까지 수직계열화에 성공해 업계 지배력이 대단했다.
다만 축재의 방법이 그리 떳떳하진 못해서 공정경쟁보단 '''독점'''으로 불린 덕이 컸다. 록펠러, JP 모건 등 당시 상당수 부자들처럼 카네기 역시 미국 남북전쟁 때 미 연방정부에 자본, 물자, 철도, 석유 등을 대면서 엄청난 떼돈을 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881년 카네기는 석탄왕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을 카네기 스틸의 회장으로 임명한다. 프릭은 석탄왕이라고 불리며 경영능력이 높다고 평가받던 인물이었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불법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미국 역사상 악명높은 CEO를 이야기할때 으레 상위권에 든다는 인물이다.#
프릭은 회사의 임금을 삭감했다. 1892년 6월에 카네기의 소유인 홈스테드 제강소에서 임금협상 중 프릭은 공장폐쇄를 강행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자 프릭은 공장을 탈환하기 위해서 용역깡패 '핑커톤 전미탐정사무소'의 용병 300명을 고용했다. 용병단은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과 총격전을 벌여서 1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고 이 사건은 '''‘홈스테드 학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용병단으로는 부족하다라고 생각한 프릭은 펜실베니아에 군대를 요청했고, 8천명의 군인들이 공장을 지키면서 노동자들은 일을 해야 했다. 결국 군대의 개입으로 홈스테드 사태는 종결됐으나 이 사건은 대중에게 확산되면서 노동인권에 대한 새로운 불꽃을 일으켰고, 급기야 이 사건으로 스코틀랜드에 머물던 카네기는 장기 체류를 하며 언론의 불꽃이 사그러들기를 기다렸으나..
설상가상으로 7월 23일 홈스테드 학살사건에 분개한 무정부주의자 청년 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터지면서 카네기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프릭은 버크만이 쏜 두발의 권총탄이 귀와 목을 스치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맨손으로 버크만을 제압하고 두들겨 패 거의 죽일뻔 했다.
이에 대해서 카네기는 이 사태가 프릭이 일방적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한 증거로 자신이 프릭에게 남긴 편지를 들었다. 그러나 카네기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도 카네기 스틸의 파업은 이미 어느 정도 예고된 상황이었고,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카네기는 실질적으로 프릭을 제지하기 위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카네기는 CEO인 프릭에게 전권을 주어 배드캅 역할을 맡기고, 문제가 커지면 자신이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 경우엔 카네기가 진짜 몰랐다고 항변했지만, 애초부터 카네기는 이미지 메이킹 대비 실제 사원들의 복지엔 크게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물론 카네기가 이미지 메이킹을 잘한건 있었기에, 홈스테드 노동자 총격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카네기는 당대 경제계에선 '''정직한 기업가이며 노동자의 벗'''이라는 평가도 일견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겪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수수방관했다는 평이 많아지자 이미지가 악화됐다. 실제 이 사태를 기점으로 카네기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대중매체가 생겨났다. 한편, 웃기게도 프릭은 버크만의 암살미수 때문에 동정적인 여론을 받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게 미국의 노동운동 역사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프릭 암살미수 사건을 벌인 버크만이 노동운동과는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그 둘의 상관관계를 찾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1910년대 미국의 노동운동은 그야말로 몰락하게 된다.게다가 자신의 동의없이 욕받이 역할을 떠맡은 프릭은 카네기와 갈등을 빚었으며, J. P. 모건에게 카네기 스틸을 매각한 이후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말년에는 후술되어있듯 교육과 자선사업을 미친듯이 많이 했지만 존 데이비슨 록펠러처럼 더럽게 번 돈으로 생색낸다며 욕도 많이 먹었다. 악독한 방법을 말하자면, 먼저 국회의원을 매수해 누군가 자신의 사업에 뛰어들면 세금을 왕창 먹이도록 했다. 처음에는 싸게 팔아 경쟁자를 몰락시킨 다음 그 후에는 값을 두 배 이상 받는 이른바 매점매석을 이용한 기업을 트러스트 기업이라고 했는데, 카네기 역시 이런 트러스트 기업의 대표적인 소유주였다.[7] 사실 본인도 복지에 관심이 있는 척 했지만 한편으론 다수의 빈자를 근면하지 않은 게으름뱅이 정도로 생각했다.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 1920)에는 이런 말이 있다.[8]
실제로 같은 시대의 악덕 재벌이었던 록펠러나 밴더빌트, 모건과 달리 그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좋은 이유는 기부 문제도 있지만 카네기 자신이 평소 본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많은 신경을 썼고 노후에 반독점법에 걸려서 욕 먹었던 록펠러와 달리 그의 사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었기에 일찍 사업을 정리해서 말년이 깔끔했던 덕이 크다. 게다가 이 사람은 흑인 및 소수인종 교육에도 관심이 좀 있었기 때문에 전후 인종주의가 판치던 남부에서는 극딜을 당했지만[10] , 오히려 이게 후대에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서 욕을 덜 먹게 되었다.이른바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에게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 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9]
국내에는 카네기의 아들들[11] 에 대한 일화가 일부 퍼져 있는데 전술했듯 그에게는 아들이 '''없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본인이나 작가들에 의해서 미화된 것이 많기 때문에 가려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도 평화주의자에 기부를 많이 한건 사실이니 다양한 평가를 할 수 있는 복잡한 인물이다.
4. 기부 및 평화운동
카네기가 이런저런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이미지메이킹 차원을 넘어 스스로 부의 사회환원에 적극 앞장섰기 때문이다. 자식도 없었던 카네기는 딱히 돈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지[12] 1901년 회사를 매각한 뒤 JP모건에 철강회사를 매각한 대금으로 재단을 설립했고,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을 시작했다.'''"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 그의 좌우명
특히 교육 분야에 기여한 바가 큰데, 1902년부터 시작된 카네기의 도서관 건립 계획을 통해 미국 전역에 2500여개의 공공 도서관을 건립했고[13] , 모두 사회에 헌납했다.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도 나름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후 글로벌 명문 대학교가 되는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런 대학교도 카네기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사업가로 활동할 당시엔 실질적인 노동인권 문제엔 큰 관심이 없던 잔머리 사업가라는 말도 듣던 카네기가 이때 기부하면서 내건 구호가 "노동자 계층 자녀들을 위한 직업훈련학교"였던 걸 보면 묘하다.
카네기가 카네기 홀,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각종 대학 등에 기부한 총 액수는 3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에서 발돋움하던 신흥국 일본의 1년 국가 예산이 1억 3천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 그가 사망했을 때 남은 그의 재산은 당시 돈으로 3천만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전재산 중 대략 90%를 기부한 셈.
1901년에는 카네기 스틸[14] 을 J. P. 모건에 매각하고 자선사업을 하며 노후를 보냈다. 그런데 이 자선사업 분야의 일부가 현재 미국 은행 자산 순위 20위권에 들어가는 TIAA 은행이 됐다. 포트폴리오가 굉장히 보수적이라 1910년에 설립됐는데도 100년이 넘게 모든 경제위기들을 극복하며 살아남았다.
평화주의와 반제국주의 사상이 강해 윌리엄 매킨리 당시 대통령과 독대해서 스페인과 하려는 전쟁을 막기도 했다. 이때 한 말이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저겠지만, 그래도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미국의 외교안보 싱크탱크 가운데 온건, 진보 성향이 강한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의 설립에도 기여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워진 국제사법재판소의 건물(통칭 '평화궁')도 그가 기탁한 돈으로 지어진 것이다.
5. 저서
- '승리하는 민주주의(1886)'
- '부의 복음(1889~)[15] ''
- '오늘의 문제: 부 노동 사회주의(1907)'
- '자서전(1920)' 등이 있다.
6. 기타
비서에 따르면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해피한 기분을 유지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우울증에 자주 시달린 록펠러와 대조되는 부분.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미국 여행 중에 카네기를 만난 적이 있으며 카네기홀 개장식 때 축하연주회 지휘를 했다.
나폴레온 힐(1883-1970)과의 일화가 있다. 당시 기자였던 나폴레온 힐은 운 좋게 카네기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힐의 포부를 들은 카네기는 그에게 자신이 아는 부자 507명과 연을 대줄테니 그들과 인터뷰를 해보라고 했다. 대신 보수는 0. 힐은 잠시 망설이다가 승낙했고 20년간 무보수로 거부들과 뼈빠지게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20년 후 그 자료를 모아서 성공학에 관한 책을 집필해 전설이 되었다. 이후 나폴레온 힐 재단을 설립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가르치고 있다.
한 가구점 직원이 비를 맞고 있는 그의 할머니를 자기 가구점에서 비를 피하도록 도와준 덕분에 나중에 그의 사무실에 있는 가구를 주문받는 혜택을 받은 일화가 있다.
결혼을 굉장히 늦게 했다. 52세에(재혼도 아닌 첫 결혼) 22세 연하(!)의 여성인 루이스 휘트필드와 결혼했으니,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할아버지가 되어서 결혼한 셈이다.[16]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만혼이 잦아진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늦은 결혼인데, 현대로 치면 70대나 80대에 결혼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결혼을 늦게 해서인지 둘 사이에 자녀는 딸인 마가렛 카네기 밀러 하나뿐이었는데, 이 딸은 카네기가 무려 62세, 휘트필드가 40세일때인 1897년 태어났다.
인간관계론을 만든 데일 카네기와 이름이 비슷해서 이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을 만든 걸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데일 카네기도 노린 점이며, 앤드류 카네기의 유족들도 저런 착각이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별다른 대응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우스갯소리로 카네기가 직원들을 불러놓고 너무 근무를 많이 했으니 이제 휴가를 가져야겠다고 말하자 직원 가운데 한명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와 신난다, 마귀가 없는 동안 낮잠을 실컷 잘 수 있겠네!".
마마보이였다는 말이 있다.
[1]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활동할 생각이 있었는지, 50세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미국에 귀화했다.[2] 당시에는 철강산업이 너무 매력적인 분야였기에 록펠러도 광산과 제철소를 세워서 그를 압박했으나, 결국 서로 피볼 것 같자 어찌저찌해서 록펠러의 제철사업부를 인수했다.[3]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자기 이름을 '카'''네'''기'라고 두 번째 음절에 강세를 넣어서 소개했지만, 오늘날 영미권에서는 ''''카'''너기'에 가깝게 1음절에 강세를 넣어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4] 한화 약 135조.[5] 자존감을 이용해서 사람을 움직이는 기술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6]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는지, 카네기는 훗날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앨러게니 무료도서관 앞에 헌사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대략 내용은 '웨스턴 펜실베이니아의 무료도서관 설립자인 코로넬 제임스 앤더슨에게 바침. 그는 자신의 서재를 일하는 소년들에게 열어 주었고, 토요일 오후에 사서로 활동하며 고귀한 역할을 했다. 지식과 상상력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은 근로 소년 앤드루 카네기가 감사의 마음으로 이 기념비를 세운다.'[7] 감리교 목사 존 위즐리의 말에 따르자면, 대충 '벌 수 있는 대로 전부 벌고, 저금할 수 있는 만큼 전부 저금하고, 기부할 수 있는 만큼 전부 기부하라'라는 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8] Alain de Botton,'불안',정영목 역,은행나무,2011,p117에서 재인용.[9] 이런 그의 사고는 기부 원칙에도 어느정도 적용되었는지, 도서관도 건립 후 유지 관리는 지자체가 전담하게 하는 등 일종의 타협을 즐겼다.[10] 이땐 오히려 북부를 등에 업은 공화당이 공화당 급진파의 사례처럼 소수인종을 위해 노력하던 시기니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11] 같은 가문 사람들을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12] 실제 카네기는 가족 상속과 사후 기부에 반대했다. 첫째는 후손에게 오히려 짐이 될 수 있으며, 둘째는 고인의 뜻대로 돈이 쓰여질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 결국 저승에 돈 싸들고 갈 수도 없는데 살아있을 때 사회 환원하는게 최고라는 것. 이때 나온게 상기된 부자로 죽는건 망신이란 표현이다.[13] 상기했듯 어린 시절 자신도 무료 도서관의 혜택을 봤기에 도서관 사업에 열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카네기는 정규교육을 4년밖에 못 받았다. 일종의 도서관 독학러(?).[14] 매각후 US 스틸이 되었다.[15] 저서라기보단 A4 용지 5~6장 분량의 일종의 기고문.[16] 다만 이와 별개로 카네기는 83세까지 살아서 당시로서는 매우 장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