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전투

 



1. 개요
2. 전투 전 상황
3. 전투 경과
4. 여담


1. 개요


평택-안성 전투 다음날인 1950년 7월 7일부터 7월 9일까지 미 24사단이 충남 천안시 일대에서 북한군 4사단과 107전차연대를 상대로 전개한 지연전.

2. 전투 전 상황


7월 6일 오산 방어선이 뚫렸다는 게 기정사실화되자 미 24사단 사령관 대리(정황상 부사단장)였던 조지 B. 바스(George B. Barth) 준장은 연대를 천안 부근까지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34연대장 제이 B. 러브리스 대령은 예하 대대들을 천안까지 물리게 된다.
하지만 직후 윌리엄 F. 딘 24사단장이 연대 본부로 찾아와 "대체 누가 평택에서 철수해도 좋다 했는가?" 하며 호통한 뒤 내일 일출 후 중대 하나를 북진시켜 전초를 형성하게 한 뒤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명령한 뒤 대전 지휘소로 돌아갔으며, 바스 준장 역시 본 소속인 미 25사단으로 돌아갔다.

3.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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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7월 7일 오전 8시 무렵 딘 사단장이 34연대에게 내린 지령에 따라 L중대와 배속된 수색소대가 성환 쪽으로 북진한다. 이후 딘 사단장은 10시 35분 경 34연대에게 1개 대대도 북진시켜 지연전을 하라고 명령했으며, 이에 데이비스 H. 스미스 중령의 3대대가 선발대의 뒤를 따라 출발했고, 헤릴드 B. 에이리스 중령의 1대대 일부도 천안 북방에 전진 배치되었다. 또한 이 무렵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딘 사단장 밑에서 일했었던) 로버트 R. 마틴 대령이 러브리스 연대장과 교대하고자 천안에 나타났다. 그는 마치 가벼운 마음으로 온 듯 단화와 정복 차림에 권총도 휴대하지 있지 않았다.
오후 3시경 북진중인 3대대는 박격포를 장비한 적의 매복조와 조우해 연대 작전주임 던 소령을 포함한 부상병들과 중화기들을 남겨둔 채 천안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 무렵 연락기가 34연대 본부로 날아와 통신통을 투하했다.

제34연대장 앞, 7월 7일 16시, 매우 주의해 작전하라.귀관의 동측에 적의 대부대가 있으며, 안성에는 전차 40~50대, 기타 차량이 배속된

기갑부대가 진출해 있다. 또한 온양 부근에도 적의 부대가 집결해 있다. 성환리에 집결한 적도 귀 부대를 우회하려 하는 것 같다.

이에 인수인계 중이던 러브리스 대령과 인계받는 마틴 대령은 전황을 파악하고자 천안 북방 1대대를 직접 찾아갔는데, 이곳에는 부사단장 메노아 준장과 처치 준장이 와 있었으며, 메노아 준장은 연대장의 교대 명령을 전달했다. 이 와중 3대대는 지리멸렬하게 철수해 왔고,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은 본부중대로 하여금 천안북방에 유기된 장비들을 회수해 올 것과 예하 대대들에겐 천안 시내를 방어할 것을 명령한다.
오후 5시 재정비를 마친 3대대는 천안 시가지를 방어할 수 있는 위치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6월 30일 일본에서 공수된 대전차 지뢰 800여개가 천안 북방 경부본도와 동북쪽의 안성가도에 매설되었다. 이 와중에도 많은 피난민들이 도보나 우마차(牛馬車)로 계속 내려오고 있었고, 국군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인들도 함께 남하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북한군은 서서히 천안으로 접근해 왔고, 이 와중 아이레스 대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어 한 때 연대본부가 이들이 고립되거나 궤멸된 게 아닌지 불안해 했지만 얼마안가 연락이 재개돼 일단락됐다.
7월 8일 일출 무렵 5~6대의 전차가 대전차 지뢰 지대를 별 탈 없이 통과했고, 이에 장병들은 의문을 가졌으나 지뢰가 낡아서였는지, 야음을 틈타 북한군 정찰대가 제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후 천안 시내로 돌입한 전차는 닥치는 대로 포격을 가하며 전진 배치된 3대대와 교전했고, 이 과정에서 3대대는 2.36인치 로켓포와 수류탄으로 전차 2대를 파괴했다.
오전 6시 적 보병들이 가세하면서 시가전은 격화되었고, 이 와중 마틴 신임 연대장은 이 상황을 타계하려면 무엇보다 전차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대전차전을 직접 수행하다 8시경 전차탄에 전사하고 만다.[1] 여기에 적들이 3대대를 포위하는 바람에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 무렵 대전의 지휘소에서 철야를 하던 딘 24사단장은 전황을 파악하고자 찾아온 워커 중장의 방문을 맞았고, 그로부터 곧 증원군이 도착할 것이며 본인도 이를 지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오전 9시경 3대대장은 연막 포격을 요청했고,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일부가 가까스로 34연대 1대대와 21연대 1대대가 있는 곳까지 탈출할 수 있었으나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은 3대대장 이하 175명에 불과했고, 마틴 대령과 함께 갔었던 연대본부 장교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3대대장도 오전 10시 삼용리의 연대 지휘소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려 혼절했다.
오후 딘 사단장은 21연대를 연기군(현 세종시) 전의군조치원에, 34연대를 공주 쪽으로 후퇴 배치시켜 금강을 연한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하면서 전사한 마틴 신임 연대장을 대신해 부연대장 로버트 L.웨드링톤 중령을 연대장 대리로, 3대대장은 대대 선임장교인 뉴우튼 W. 랜트론 소령을 대리로 임명하였다. 또한 극동군 사령부에도 (T-34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105mm 대전차포와 3.5인치 로켓포를 급히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7월 9일 전의군과 조치원 일대에서 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4. 여담


  • 천안 시가전에서 정신적 궁지에 몰렸던 3대대장은 7월 9일 정신적 피로를 이유로 후송되었다.
[1] 참고로 당시 연대 S-3 선임하사관이었던 제리 C. 크리스틴슨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연대장은 로켓포의 사수, 나는 탄약수가 되어 어느 건물 속에서 적 전차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전차와 연대장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발사해 전차의 85mm 포탄을 직격당한 연대장은 두동강이 났고, 그 뒤에 있던 나도 충격으로 한쪽 눈알이 튀어 나왔으나, 그 눈알을 도로 밀어넣은 다음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