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 전투
1. 개요
천안 전투 다음날인 1950년 7월 9일부터 7월 11일까지 미 24사단이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전의면과 조치원읍, 공주시 일대에서 전개한 지연전.
참고로 조치원에서의 지연전은 조치원 전투로 별칭되기도 하며, 미 21연대 1대대(스미스 부대[1] )의 퇴각까지 합하면 12일까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11일 까지로 서술하고 있다.
2. 전투 전 상황
7월 8일 천안 시내에서 시가전을 펼치던 미 34연대 3대대가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자 윌리엄 F. 딘 24사단장은 이날 오후 리처드 W. 스티븐슨 대령의 미 21연대를 전의군과 조치원에, 미 34연대를 공주 쪽으로 후퇴 배치시켜 금강을 연한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면서 전사한 마틴 미 34연대장을 대신해 부연대장 로버트 L.웨드링톤 중령을 연대장 대리로, 3대대장은 대대 선임장교인 뉴우튼 W. 랜트론 소령을 대리로 임명하였다. 또한 극동군 사령부에도 (T-34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105mm 대전차포와 3.5인치 로켓포를 급히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3. 전투 경과
3.1. 7월 9일
미 21연대 1대대는 오전 내내 전의군 동쪽 구릉지대에 진지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 와중 D 중대장 알키르(Alkire) 대위는 134고지와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뻗어내린 능선 일대에도 진지를 구축시켰다. 또한 서남쪽으로 국도와 철도 너머에 있는 오얏고지에도 레이 빅슬러(Ray Bixler)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를 배치하였다. 이 무렵 미 34연대도 공주군 광정리에 3대대, 수촌리엔 1대대를 배치하고 북한군을 기다렸다.
오후 3시 무렵 북한군 전차 11대와 보병 200~300명으로 구성된 종대가 미 21연대 1대대가 감제하는 전의 시내로 진입했고, 그 뒤에도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미 포병과 공군은 일제히 전의 시가지에 포격과 폭격을 쏟아부었고, 이 과정에서 155mm 곡사포는 북한군 전차 11대 중 5대를 파괴했다. 또한 전투기들도 차량 200대 중 절반 가량을 파괴했고, 이 불길은 밤에도 지속돼 1대대 진지와 북한군 수색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2]
3.2. 7월 10일
오전 6시 북한군들은 염탐대를 먼저 보내 요란하게 사격해 미군의 응사 유무로 배치상태를 확인한 뒤 박격포 공격을 퍼부었다.
오전 7시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북한군은 국도 남쪽 A중대 빅슬러 중위의 소대 진지에 소리없이 다가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며 기습했으나 빅슬러 소대는 4.2인치 중박격포의 탄막사격과 최후 저지사격으로 이를 격퇴시켰다. 그리고 잠시 뒤 대대의 동측방으로 우회한 북한군 보병들과 대대 진지를 돌파한 전차는 후방의 박격포 진지를 협공했지만 다른 곳의 미군 병사들은 총/포탄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으나 짙은 안개로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오전 8시 30분 미군들이 후방 박격포 진지가 공격당했단 사실을 알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오전 9시 북한군의 전면공격이 시작되었다.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북한군은 화력으로 격퇴시켰지만, 이미 박격포 진지가 파괴되었기에 빅슬러 소대는 북한군에게 포위되고도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오전 11시 25분 빅슬러 중위는 연대장에게 "피해가 많아지고 있음, 증원 없으면 철수 승인 바람" 이라고 연락하나 이들이 철수하면 대대 좌측방이 노출되어 국도가 차단되기 때문에 스티븐슨 대령은,"곧 증원하겠다"고 회신했다. 직후 두대의 전투기들이 날아와 북한군들을 휩쓸었으나 5분 뒤 제트기가 돌아가자마자 다시 공격해왔다.
오전 11시 35분 빅슬러 중위로부터 재차 위급하다는 보고가 왔지만, 그 뒤로는 연락도, 총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후 대대 좌측방을 장악한 적들은 최우측과 좌측 후방까지 공격해 왔다. 게다가 이 무렵 전방 진지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었던 포병들은 진지들이 적에게 피탈 직전이거나 당한 것으로 오인하고 맹렬하게 진내사격을 했고, 이는 연대장이 제지를 해도 계속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은 축차적으로 진지를 이탈했고, 이를 목격한 스티븐슨 연대장과 일본계 리차드 하사가 이를 막으려 독려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오후 12시 05분 스티븐슨 연대장은 결국 철수를 결심했다. 철수 신호에 따라 1대대 장병들은 진지 후방 논두렁 길을 마치 줄타기를 하듯 건너고 있었는데, 이 무렵 2대의 우군 제트기가 나타나 병사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는 스티븐슨 대령과 동행하던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비가드 종군 기자에게도 목격되었다. 이 과정에서 A중대는 총원 181명 중 57명[3] 을 손실했고, D중대는 3명 전사, 8명 부상. 박격포 소대도 14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장비도 거의 다 망가지거나 잃어버렸다.
직후 스티븐슨 연대장은 칼 C. 젠슨 3대대장에게 1대대 병력들을 구원하고 피탈당한 진지들을 되찾기 위한 역습을 명령한다. 이에 3대대는 M-24 경전차와 함께 진격하며 국도 북쪽의 진지를 탈취하고 호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병사 10명도 구출했지만, 빅슬러 소대의 진지는 되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 와중 조치원에서 전초진지로 박격포탄을 들고 가다 매복에 걸려 후두부에 총상을 입고 죽은 병사 6명의 시체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와중 M-24 경전차 선두전차가 T-34전차 한 대를 파괴했으나, 곧이어 응사를 받아 미군 전차 2대가 파괴되었고, 뒤따라오던 전차도 철수하고 말았고, 이 무렵 1대대 잔존병들은 재정비 후 조치원 북쪽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3.3. 7월 11일
오전 1시 무렵 미 21연대 3대대는 목표했던 1대대 진지에 도착했으나 그곳은 이미 북한군과 게릴라들이 들어차 있었고, K중대는 이들과 한시간 가량 교전한 뒤 탈환에 성공했다. 한편 북한군은 진지 구조를 이미 파악해 놓은 상태였고, 이 3대대를 격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작전을 세운다.
그렇게 이들은 치밀한 작전 속에서 3대대를 옥죄어 왔고, 이들은 포격 지원을 요청할 수 없는 가운데 자체 화력으로 맞서야 했다. 하지만 보급이 원할하지 않은 가운데 부상자 후송도 할 수 없었고, 3대대는 정오 무렵 거의 궤멸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 3대대장 젠슨 중령과 정보주임은 전사했고, 인사와 작전주임, L 중대장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심지어 퇴로까지 전날 밤 차단당해 1대대가 물러나 있는 조치원까지 도달한 이는 가지고 있는 걸 모두 다 버리고 전력질주한 150여명에 불과했다.[5]1. 보병진지와 지휘소, 포병진지 간 유선을 단절시킨다.
2. 퇴로 차단 부대를 침투시킨다.
3. 오전 6시 30분, 안개 속에서 전차를 돌진 시킨다.[4]
4. 대대 본부와 포병 지휘소, 통신 시설과 탄약고도 박격포로 날려버린다.
5. 1천여명의 보병들이 3대대의 양측방과 후방을 공격한다.
이날 저녁 딘 사단장은 공병대에게 적의 공격 축선상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교량 파괴를 독촉하는 한편, 그리고 대구에 남겨두었던 미 19연대를 금강 선으로 배치시켰다.
한편 공주군의 미 34연대도 북한 4사단과 교전했으나, (적의 주력이 전의-조치원에 집중된 탓에) 광정리의 3대대는 별 피해없이 금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 무렵 수촌리에 남은 1대대는 M-24 경전차 소대와 함께 지연전을 벌이고 있었고, 3공병대대 D중대 역시 교량들을 폭파하고 장애물들을 설치하며 금강 이남으로 철수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경전차 3대가 파괴되었다.[6]
참고로 이 과정에서 금강교 역시 파괴되었으며 52년에 응급, 56년 9월에서야 정식 복구되었다.
3.4. 7월 12일
이 날 새벽, 조치원 북쪽에 홀로 남겨진 미 21연대 1대대 장병들은 북한군의 대공세를 예감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 북한군 1개 대대가 지원포격 속에 대대 좌측방을 공격했고, 다른 쪽에서도 몰려와 2천여명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한차례 두들겨 맞고 여기로 온 상태라 전투력은 보잘것 없었다.
정오 즈음 대대의 혼란은 가중되었고, 이 무렵 연대장은 금강 이남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포병의 지원 속에서 질서있게 퇴각했지만 오후 3시경 금강 이남까지 도달한 1대대원은 261명에 불과했다.
또한 이 소식은 옆에서 전개중인 청주 전투에 영향을 주었으며, 미 24사단은 이후 13부터 16일까지 대평리-공주 전투를 치른다.
[1] 참고로 이 대대는 오산 전투의 그 스미스 부대 맞다.[2] 참고로 이건 개전 이래 미 공군이 단일 출격에서 낸 최대의 성과였으며, 공습 직후 북한군은 남진에 정신이 팔려 대공 수단에 신경 안 쓴걸 후회했다고 한다.[3] 부상 27명, 행방불명 30명.[4] 참고로 천안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일대에 매설한 대전차 지뢰는 폭발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5] 다만 이후 7월15일 산속으로 도망쳤던 병사들이 귀환함에 따라 생존자는 322명(50%)으로 늘어났다.[6] 2대는 북한군의 포격, 1대는 북한군 보병의 육탄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