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경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금경은 1908년 1월 25일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에서 태어났으며, 10대 때 경성부에서 거주했다. 그는 조선 총독부에 의해 급비생 신분으로 도쿄 와세다대학에 유학갔지만, 재학 중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공산주의에 공감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1930년 7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의 5개 순회강연반 가운데 중앙반 연사로서 전국 순회강연을 하였다.
1931년 3월 경성부에 체류하던 그는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과 중국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1931년 7월 서울에서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中央基督敎靑年會學校) 학생인 김만유(金萬有)·홍병모(洪炳模) 등과 함께 먼저 대중 선동 단계로 '학생제네스트'라는 동맹협의회를 기획하고, 혁명촉진의 방법으로 격문을 배포하여 학생제네스트를 감행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31년 7월 6일 김병선(金炳璇)의 하숙집에서 만보산 사건이 조선총독부의 실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리는 격문 약 2,000매를 인쇄하였다. 또 7월 8일 홍병모에게 유영경(柳榮京)을 소개해 홍병모를 지도·원조하였다. 그날 밤 10시경부터 휘문고보·여자고보는 이동재(李銅材), 동덕여고보·청년회학관은 홍병모, 고등예비실업전수는 김만유 등에게 분담해 격문을 배포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영경은 경성 제2공립고등보통학교에 격문을 배포하게 하는 등 서울의 각 학교에 배포한 후 동맹휴교를 일으키려다가 체포당했다.
체포된 인원은 총 17명으로 이 중에서 6명만이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최금경은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4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최금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