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화가, 경희대학교 사범대 학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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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촬영된 사진.
최덕휴는 1922년 7월 4일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홍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의 휘문중학교에서 수학했다. 그가 2학년에 재학했을 때 당대의 유명 화가 장발(張勃)의 작품을 보고 화가에 뜻을 품었다. 이후 1941년 3월 일본으로 유학가서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러던 중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1943년 평양 근교에 주둔한 일본군 제64사단에 배치 근무하다가 탈영한 뒤 중국에 망명했다. 이때 그는 탈출 도중 압록강 철교에서 추락할 뻔했고, 상하이까지 가는 동안 중국인들에게 일제 밀정으로 의심받거나 일본군에게 잡힐 뻔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기어이 중국군에 가담하는 데 성공한 그는 중국군 제3전구 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군 중위로 임명되어 제9전구 제8사단 공작위원회의 공작책으로 활동했다. 이후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되어 항일 활동에 가담했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뒤 귀국하여 서울에 자리잡았다.
광복 후, 최덕휴는 1946년부터 1950년까지 홍성고, 휘문고, 경기여고, 동덕여중, 동덕여고 미술교사를 역임했고, 서울대 및 홍대 강사를 맡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군대에 입대하여 1956년 5월까지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복무했다. 1951년 무공훈장 화랑장을 수여받았으며, 1952년 제2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1956년 한국미술교육협회 창립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채화협회를 창립했다.
1956년 5월 군대를 떠나 교직에 복직한 그는 1958년과 1959년에 국전특선을 맡았고, 1960년 4월 세계미술교육전을 개최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같은 해 경희대 교수로 임명되었다. 또한 1960년 9월 27일 종로 장안빌딩 2층 회의실에서 전상범, 김화경 등 19명의 발기인들과 함께 '국제 미술교육협회 한국위원회'(INSEA-Korea) 사단법인 창립위원총회를 출범시켰다. 이후 1965년 2월 28일 INSEA-Korea가 등기 완료되었고, 초대 이사장에 최덕휴가 선출되었다.
INSEA-Korea는 외국의 미술교육 세미나 교육참관 전시 등 해외교류 목적으로 20여 명의 한국인 화가들을 출국시켰다. 당시 해외 출국은 특수 계층만 가능했고 일반인들에겐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때에 최덕휴는 화가들을 출국시키는 데 성공했고 국가 예산으로 출장여비까지 지원받게 했다. 더불어 외국인 학생들의 미술 작품을 국내 학교와 교환 전시하는 '상호교류전'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1966년 INSAEA world council member 이사를 맡았고, INSEA-asia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회칙을 서울에서 만들었다. 또한 1968년 국제미술교육재료전을 개최했고 1971년 INSEA-asia 서울총회를 유치했다. 또한 1954년 국내 최초의 교사교육 강좌 프로그램인 <교사를 위한 미술교육 정기 강좌>를 '덕수궁 박물관'에서 개최해 전국에서 모인 120여 명의 미술교사들을 교육시켰다. 그리고 대학 세미나에도 열의를 가져 경희대학교에서 <단기고등교육 기관의 개선원칙에 대한 연구, 미술교과과정을 중심으로> 등 1, 2년에 1회 정도 주제 발표를 했다.
1980년 경희대학교 사범대 학장으로 취임한 그는 7년간 역임하다 1987년 6월 20일 정년퇴임했다. 이때 그는 '한국일보 송현클럽'에서 정년 퇴임 기념 고별 강연을 가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덕휴는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녹내장과 백내장 안과 수술을 하는 등 눈병에 시달리다 1998년 2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일본식 미술교육이 해방 되도 크게 고치지 못한 점은 죄송스런 생각이다. 그 뒤 나는 1. 일반 미술분야 2. 전문교육 분야 3. 사회교육에서의 미술교육 4. 입시교육 등에 대해 연구해야 됨을 늘 생각하며 노력했다. 미술교사 교육 양성의 사범대에서도 항상 훈련시간이 적다. 한 학기~1년 정도는 현장 실습, 경험을 살려야 좋은 교사로 만들 수 있다. 인성교육은 질 좋은 교육으로 이끌어야 하고, 그에 맞는 학습프로그램을 개발해야 된다.
아이들에게 미술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반드시 그리는 것보다는 보는 것, 느끼는 것도 훌륭한 교육의 개선이 될 수 있다. 끝으로, 미술재료가 개발되어야 한다. 나는 상공부 등 관련 공무원에게도 찾아가 설득하고 있다. 미술교육은 바로 국민교육인 것이다. 모든 미술교육 관계자들이 나서야 되는 것이다.
최덕휴의 초기 화풍은 풍경을 소재로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비구상적인 표현방식을 시도했다. 그는 대상을 단순화한 과감한 구도와 필치, 자유로우면서도 감각적인 색채에 의한 대상의 재해석을 통해 독자적인 화풍을 전개했다. 대표작으로 <남산에서 보이는 서울 풍경>, <돌산>, <원지동의 가을>, <불암산의 만추>, <용화산경>, <장성광업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