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한국 광복군
韓國 光復軍
Korean Liberation Army[1]'''

'''설립'''
1940년 9월 17일
[image] 중화민국 충칭시
'''해체'''
1946년 6월
'''국가'''
[image] 대한민국(임시정부)(1940~1945)
[image] 대한민국(1945~1946)
'''소속'''
한국독립당
'''통수권자'''
김구
'''총사령관'''
지청천
'''주요 전투'''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서울 진공 작전#s-2
'''후신'''
[image] 대한민국 국군
1. 개요
2. 창립
3. 활약
3.1. 인면전구공작대
4. 병력
5. 계급
6. 복제
7. 장비
7.1. 보병무기
8. 군가
9. 광복
10. 대한민국 국군과의 관계
10.1. 대한민국 육군
10.2. 대한민국 해군
10.3. 대한민국 공군
11. 출신 인물
12. 그 외
13. 관련 문서
14. 관련 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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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에 창설되었던 직속 군대로, 한국독립당당군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의 기원이 되는 군대이다.''' 육군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광복 후엔 대한민국 국군이 한국 광복군의 역사를 계승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2017년엔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광복군이 국군의 일부임을 인정하였다.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문서를 참고. 이 책자 발간 이전에도 2010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국군 변천사를 나타낼 때 광복군 복장을 한 제대가 행진하는 등 국군사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있긴 했다.[2]

2.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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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
1940년 9월 17일, 중경, 한국 광복군 창설 기념식이 끝난 뒤 오찬장
축사하는 김구 주석(중앙좌 검은 옷)과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이전과 달리 공동의 적 일본을 상대해야 하는 장제스는 태도를 바꿔 임정이 무력수단을 갖출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조선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장제스와 김구 개인이 돈독한 사이가 된 점도 한몫했다.
그리하여 1939년 창군된 한국독립당 당군을 기반,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충칭에서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이 결성되었다. 초기 인원은 30여 명이었으나 이는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교급 인사만 참여한 것이었으며 이후 병사를 모집하였다. 초창기에는 병력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41.1.1 한국청년전지공작대 100여명이 제5지대로 편입 되면서 골격을 갖추었다. 당시 한국광복군 규모는 1,000명 이하[3]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2.5월 광복군에 편입한 김원봉은 내부 갈등으로 조선의용대 80% 정도의 인원이 화북 지방으로 가자 약 60-70명 정도의 나머지 인원을 규합하여 임시정부에 편입하며 부사령 직함을 달라고 하여 임정은 직제를 새로 만들어 주었으며 그들만을1지대로편입하였다, 화북지방으로 간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하였고 해방후에는 북한 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이 후 광복군 총사령부는 철거되어 상가로 운영되었다가 2019년 3월 29일에 복원되었다.

3.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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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에 위치했던 광복군 간부 훈련소 한광반 제 1기 사진:1944년 9월
장준하.김준엽 등이 속해있다.
1942년, 훈련중인 한국 광복군
전면전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며, 중일전쟁이나 미얀마 전선에서 첩보와 통신, 한국인 회유 등의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과 임시정부가 합의한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에 따라서 모든 작전권은 중국이 가지고 있었다. 준승 사항에 따르면, 광복군은 한반도 본토 진공도 장개석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 압록강을 넘어서도 여전히 국민당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런 불평등한 합의가 성립한 것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모든 것을 중국국민당에 의존하는 무기력한 신세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약은 1944년 말에 가서야 풀렸다. 초창기에는 중화민국 육군의 지휘를 받다가 광복 직전에 지휘권을 환수받은 것.
1945년 8월, 미국 OSS(CIA의 전신)와 접촉해 연합 훈련을 받고 50여 명의 대원을 미 해군 잠수함을 통해 침투시키는 서울 진공 작전에 투입하려 하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김구의 비서인 선우진고려대학교 전 총장이었던 김준엽, 국방장관을 역임한 이범석 등의 인사들이 광복군 출신이다.

3.1. 인면전구공작대


참고로 당시 1944년 초 시점에서 임시정부가 위치해 있는 충칭에서 서남쪽으로 700km 지점에 이미 조지프 스틸웰이 장제스에게서 얻어낸 중국군 X군 주력의 연합군이 이미 버마 미치나 탈환을 위해 전선을 열었는데,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는 광복군이 이쪽 전선에서 국부군과 함께 참여하는 대신, 왜 1700km나 떨어진 인도 콜카타까지 가서 영국군과 작전을 하기로 하였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당시 영국군은 중국 국민당과의 연합에 그나마 적극적인 미군과 달리 미치나 공격은 전적으로 미군과 중국군의 이득을 위한 것이라 여겼으며, 특히 중국군이 버마에서 주도권을 잡을 경우 전후 발언권이 커져 아시아 지역 식민지 전후처리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다. 임시정부 역시 1941년 대일 선전포고 이후 가장 중요한 외교 목표로 합법적인 임시정부로써 연합국의 승인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당시 국민당이 제시한 9개 준승사항에서 벗어나 외교통로를 다변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광복군의 영국군 파견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상황과 일본군에 대한 정보가 다소 부족한 영국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국민당의 9개 준승사항에 대한 개정은 1943년 경부터 논의가 되어 있었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1944년 11월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이들 인면전구공작대는 사실상 유일한 실전 참가 부대라 할 수 있는데, 국민당 정부로부터 눈칫밥 먹으며 연명하던 것에 비해, 영국군은 현지 사령관이었던 영국 해군원수루이 마운트배튼 제독[4]이 직접 이들을 언급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고, 또한 지속적으로 이들의 파견 및 증원을 요청하고 자신들이 숙식은 물론 급여와 피복 등까지 자진해서 부담하는 등 매우 후한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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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전선의 '''인면전구공작대'''[5] 대원 일동.
이들은 제1지대 소속이다. 가운데 있는 인물은 한지성으로 김원봉의 최측근 인사였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조선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일했던 캐나다 육군의 롤랜드 베이컨 예비역 대위로, 광복군 대원들 사이에서 '''조선의 벗'''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맻은 사람이었다. 베이컨 대위는 임팔 작전후 버마 전선 이리 와디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인면전구공작대 역시 이러한 대우에 걸맞은 활약상을 보여줬는데,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는 인도 콜카타에 도착하여 4개월간 교육 후 대장은 육군 대위, 기타 대원은 중위 대우를 받으며 영국 육군 204전지선전대가 주둔한 아라칸과 부야크에 주둔하였다. 이후 1944년 3월 임팔 작전 전선에 투입되었고, 1944년 5월, 포위된 줄 알고 현지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려던 영국 육군 17사단에게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문응국 대원이 감청을 통해 알아내어 퇴각 타이밍을 놓치지 않게 해 전력을 보전케 하는 등으로 공헌했다. 또한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대원들은 기본적으로 영어일본어 모두 구사할 수 있었으며 적진 교란방송, 일본군 포로심문, 문건번역 등, 심리전에 투입되었다. 일본 육군 15사단 조선인 군속들이 선무공작방송을 듣고 단체로 투항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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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임팔전선에 뿌려진 연합군 삐라
또한 인면전구공작대는 투항한 일본군 포로 중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별도의 수용시설에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할 수 있도록 영국군과 협정[6]을 맺었는데 그 수는 대략 일본 육군 15사단 군속 고등관 김귀락을 포함하여 대략 100명 정도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당시 영국 육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기무라 육군 소위 외 27명의 일본군이 "광복군이 버마전선에 파견되어 있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에게 적지않은 심리적 타격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영국군 전투부대에 배속된 공작대 한지성, 박영진, 김성호는 버마 중북부에서 만달레이 방향으로 남진하는 부대에, 최봉준, 김상준, 이영수는 버마 중부지역을 우회하여 만달레이를 향해 북상하는 부대에, 그리고 문응진, 송철은 버마의 수도 양곤 상류작전에 참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작대원들과 함께한 베이컨 대위는 전사하였다. 1945년 3월 베이컨 대위와 송철, 김상준 김성호 공작원들은 만달레이 전선 내 모니와 근방에서 작전을 하던 중 기관총 사격에 노출되어 제압되었다. 베이컨 대위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그만 풀섶위로 기어올라가 망원경으로 기관총 진지를 관측하려는 와중, 기총사격을 받아 복부에 중상을 입어 전사하였다.[7]
이후 영국군은 지속적으로 충칭의 임시정부에 인원 증파를 요청하였으며 국민정부에 의해 불허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을 임시정부 차원에서 1945년 3월 파견하려 했지만 종전으로 무산되었다. 남은 공작대원들은 1945년 5월, 연합군의 랑군탈환전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9월 10일 전원 충칭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4.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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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대원 기념사진,
한국 광복군의 영어 이니셜 K I A[8]를 집체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1941년 1월 1일, 한국 광복군 제5지대 창설 기념사진.
규모는 약 350-360명 정도였다. 병력을 보자면, 위에도 언급되어 있는 무장세력과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는데, 김구를 포함한 임정 보수파가 사회주의 냄새 나는 세력과의 연결을 거부한 경력이 오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후일 '''북한 조선인민군의 모체가 되는 조선의용군'''만 봐도 그 본체는 임정에 합류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였다. 하지만 김원봉이 전투를 소극적으로 한다는 이유로 대부분이 이탈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만주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것이 김두봉이 이끌던 세력과 결합된 것이 바로 조선의용군이었다. 본문에도 적혀있지만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연결해서 임정직할병력을 늘리려고 했지만, 김구는 이것이 사회주의자 김원봉의 세력이 될 것이다는 이유로 거부했다.[9] 이 병력은 일제시대 말기 기준으로 봐도 적어도 8천여는 된다.[10] 광복군에 비하면 몇 배나 되는 병력이다. 결국 조선의용군은 일제에 함께 대항했다는 이유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소속되어서 나중에는 국공내전까지 참여한 베테랑 부대가 되었다.
8.15이후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던 조선인들을 모아서 약 3개 사단을 편성한뒤 국내로 입성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광복군을 껄그럽게 생각하던 미군정에 의해서 중국을 압박하여 해산하여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월 18일,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 등 광복군 대원들이 미 육군 고문단과 같이 미 육군 항공대의 비행기를 타고 국내진입을 시도했으나 일본 육군 방공포병저항 탓에 발길을 돌렸다.
장준하는 ‘OSS의 작전만 실행되었더라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 개탄한 적이 있으며 이 말이 유명해졌지만, 현실적으로는 승전국 지위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대대 병력만도 못한 병력으로는 조선 주둔 일본군에 혼란을 줄수는 있을지언정 몰아내기는 어렵고, 설령 몰아냈더라도 미국이나 소련은 임정을 승전국으로 인정해줄 마음이 없었다. 서울 진공 작전 참조. 애초에 한국 광복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던 폴란드 임시정부군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생각해본다면...

5. 계급


밑에 나와 있는 계급장 중 장교는 견장 형식의 계급장이고, 사병은 팔에 부착하는 형식의 계급장이다.
계급장은 이 블로그를 볼 것. 계급 체계는 상당 부분 대한제국군에서 따왔다.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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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 계급'''
장관(將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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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正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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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副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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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장(參將)
영관(領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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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正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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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령(副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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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령(參領)
위관(尉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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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위(正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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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副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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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위(參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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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위(准尉)
하사관
(下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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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정사(服務正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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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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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中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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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參士)
병사(兵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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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등병(上等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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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一等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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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二等兵)

6. 복제


광복군의 복제(服制)에 관해서는 군복/한국군 문서의 광복군 항목을 참조하면 된다.
대체적으로 국민혁명군의 복식과 비슷하다.

7. 장비


광복군은 국민혁명군 육군의 지원을 받고 있어, 이들이 사용한 독일(제3제국), 러시아제 및 그의 라이센스 생산 무기와 미국, 영국제 장비를 혼용했다. 또 중일전쟁 중 대거 노획된 일본군 병기도 상당수 사용하였다.

7.1. 보병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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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노능서[11], 김준엽, 장준하.
기관총 사격 훈련중인 서안의 광복군 2지대 대원들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중일전쟁에서 쓰인 무기라고 보면 된다. 당시 광복군은 중국에 있으면서 중국에게 원조를 받았기에 중국군이 쓴 무기를 썼고 이 중에선 당연 노획한 일본군의 무기도 있다. 미국 OSS와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할 때는 중국에 지원받은 것과는 별도로 미국제 그리스건M1 카빈 등을 받기도 했지만, 중국 역시 미국 정부로부터 이런 무기들을 지원받았기에 어차피 겹치는 경우이다.
방위사업청
  • 마우저 C96 권총
  • 루거 P08
  • 아리사카 30/38식/99식 소총
  • Gew98 소총[12]
  • M1 카빈 소총
  • 모신나강 소총
  • M3 기관단총
  • 톰슨 기관단총
  • PPSh-41기관단총

7.2. 지상 병기


광복군의 병과 중 기갑도 있는 것으로 보아 장갑차량 등도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광복군의 계급과 병과 대부분은 제도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 배정받은 인원은 없는 경우도 많아 신뢰하기 힘들다.
당시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의 연합작전 때와 1945년 중국본토에서 어느정도 크기를 키우고 훈련을 받을 때 영국군과 미군의 수송차량들인 닷지WC, 윌리스 MB, 포드 GPA, M3 하프트랙을 조금이나마 지원받아서 사용한 적이 있다.
전차의 경우 거의 없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군과 영국군이 몰았고 중국군도 소수나마 사용했던 M6 스태그하운드나 M8 그레이하운드의 사용법을 배운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전 기록과 보유한 경우는 없어도 당시 중국군이나 영국군으로부터 대여나 혹은 교육 형식으로 장갑차나 경전차의 운용방법을 배운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8. 군가


자유 프랑스 비공식 국가로 쓰이던 Les Chant des Partisans 라는 곡을 행진곡으로 썼다. 더 자세한것은 독립군가 항목 참고 바람.
그 외 군가는 다음이 있다.

'''신대한군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 길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 독립군가 -'''

위에 곡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쓰인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라는 곡을 썼다.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뛰고'''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칼집고 일어서니 원수 치 떨고'''

'''피 뿌려 물든 골 영생탑 세워지네'''

'''광복군의 정신 쇠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한 맘 한 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

'''독립 독립 조국 광복'''

'''민주 국가 세워보자'''

 

'''-광복군 행진곡-'''

'''요동만주 넓은뜰을 쳐서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광복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용진가-'''


9. 광복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중국 국민당은 한국 광복군의 이름 아래 패전 후 포로 혹은 항복한 관동군 부대 내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군사 세력으로 편입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장제스의 발언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 또한 조선의용군의 이름으로 패전 후 갈 곳을 잃은 일본 육군 내 조선인들을 규합하였다[13]. 만주군 중위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 시기 광복군에 들어가 평진지대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장준하의 회고록 돌베개에 의하면 인적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편장수나 일본 육군 위안부 조선인 포주도 있었다고 한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논하기는 복잡하지만, 이러한 일들의 영향으로 가짜 광복군 서훈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광복군이 조선을 광복(해방)시키기 위한 거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참여해서 건국실천원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주로 강사로서 교육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나재하, 조소앙, 엄항섭 등. 김학규도 강사로 있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명단 언항섭은 사실 엄항섭인데, 오타가 났다. 평화재향군인회에 있는 명단을 보면 장덕수김활란도 있다. 졸업생(1~2개월 단기 강습형식)은 건국실천원양성소 졸업생 명부는 해당논문 후반부에 있다.#

10. 대한민국 국군과의 관계


광복 직후부터 6.25 전쟁 시기까지 임시정부 및 광복군 출신 국군 수뇌로는 초대 국방부 장관 이범석, 초대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초대 국방부 차관 및 제2대 공군 총참모장 최용덕, 초대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 육사교장에는 김홍일[14] 장군, 안춘생 장군이 기용됐다.[15][16]

10.1. 대한민국 육군


광복 이후 광복군들 대부분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국방경비대 창설에서 본위주장으로 광복군들 스스로가 반발하여 입대를 대거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다.[17] 하지만 유동열이 통위부장(국방장관)에 임명되는 것을 시작으로 광복군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육군 장교부사관으로 입대, 한국전쟁 때 한국 육군에서 활동했다. 거의 대부분의 광복군 출신들이 한국 육군에 입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숫자 자체가 워낙에 적었던 데다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정치쪽으로 빠지고,[18] 국군에는 일본군과 그 시다바리인 만주군 출신들이 많아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19]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기까지 군 경험을 가진 자원을 끌어모으다 보니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기에 초기 국군 고위 지휘관과 장교 다수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는 점만 부각하면, 육군의 정통성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논쟁거리가 안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은 국군의 뿌리를 대한제국군과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라 명시하고 있다.# 건군기 당시 대다수의 인원이 일본군 학병지원병, 조선인 일본군, 만주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광복군과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국군 창설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육군 최고 수뇌부에 진입을 한 적이 없고 대부분 한직에서 끝난점을 볼 때 분명 논쟁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당대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이를 숨기려 했다는 창군기 선배들의 증언도 있다. 이는 소설 "한강"에서도 비유되고 있는 부분.
초기 육군 지휘부를 구성한 인물 중 광복군 출신인 유해준, 중국군 및 범 광복군 계인 이성가를 제외하면 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기에 그리 인식할 수 있으나, 자유시 참변 이후 공산당계와 분리되어 인적자원이 크게 줄어든 임시정부 직할 군 조직이었음을 따져보면 이상한 숫자가 아니다.
특히, 국방경비대 창설과 초기 국군 형성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의 영향력이 그냥 크다 정도가 아니라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실무를 맡은 일본군 출신 중 최고계급자 이응준이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이었는데, 더 높은 계급의 인물들이 여러 이유로 귀국하지 못하거나 전범으로 처형당하여 일본군 출신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국방경비대 태동기에 전면에 나서 미군정에 협력하며 남한의 군사력 조직에 힘쓰던, 일본군과 만주군을 대표하는 사람이 광복부터 당시까지 홀대받는 것에 대하여 국방경비대 입대를 거부하자 독립군 출신 장병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유동열에게 자신을 낮추며, 통위부장을 맡아주십사 설득하였다 한다.
이응준은 국방경비대에서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광복군 계열보다 10:1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숫적 우위가 있음에도 구태여 유동열을 설득시킬 때,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언급한 것은 이응준의 덕량을 보여주는 동시에, 광복 직후의 반일 정서상 국방경비대가 일본군, 만주군으로만 구성되었다고 알려지는 것은 모병에 큰 악재로 작용하였을 것인 바, 국방영역에서 만큼은 이응준의 설득과 유동열의 수락이 육군의 적통승계, 대중의 혐군 정서 불식 등의 호작용을 하였다고 본다.
이응준이 창군기 일본군 출신 최고 계급자로서, 완전히 광복군 출신을 배제하려 하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겠으나, 이응준 사견으로 "광복군 출신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군대의 법통을 계승하는 일은 숭고한 사명"이라고 말하고 소위 표현하는 "바지사장" 즈음으로 이용하려 했다면, 6.25 전쟁 당시 10여명의 광복군 출신 장군이 배출될리도 없고, 되려 철저하게 유리천장으로 상대방의 승진을 막는게 파벌경쟁에서 주도권을 가진 측이 하는 행동이다.
반대로, 유동열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정황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 조선시대 신분제도 의식을 탈피하지 못하여 인재양성을 저해하거나 같은 광복군 출신인 비슷한 성향의 똥별과 교분이 있었다는 등, 자잘한 일신상의 문제를 노출하였다. 전쟁 직후 유동열이 북한 공산당군에 의해 죽자, 육군의 광복군 법통 승계 역할은 이범석이 하게 된다.
대한민국 육군이범석을 위시한 고위지휘관들로는 , 김홍일, 안춘생, , 이준식, 유해준, 이성가, 권준, 박영준, 박시창, 장흥, 김국주, 김관오, 오광선, 전성호, 김동수, 김응조, 이종국, 고시복, 박기성, 장호강 등이 장성으로 복무하였고,[20] 영관급 이하의 지휘관도 상당 수 활약하였다. 물론 광복군 출신이라도 문제를 일으켰거나 지휘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홍일, 이준식과 같이 6.25전쟁 당시 상당한 지휘능력을 보여준 인물들도 있었다.

10.2.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군 역시 해군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상선사관을 중심으로 창설되었고[21] 이들 세대 이후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바로 넘어간 덕분에 일본군계와는 거리가 멀며[22] 손원일 제독 본인이 독립운동가였고, 중국 해군 국비유학생이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및 교통부 총장을 역임한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었으므로 임정&광복군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해군은 창군 시부터 일본군 출신자들이 아닌, 독립운동가인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상선사관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일본군 출신들이 가장 많이 배제된 군종이다. 굳이 광복군과 연관을 짓자면, 초대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의 부친인 손정도 목사가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김구와 함께 대일본 무장투쟁을 전개한 것과 손원일 제독 본인이 중화민국 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와 상선사관을 했고 1930년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로 입국하였다는 혐의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된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받아들이는 걸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수가 적고, 함정 근무자는 거의 없다시피했기 때문이다. 소수의 일본 해군 출신들은 이후 대부분 해군 육전대 경험을 근거로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시 이쪽으로 옮겨졌다. 이에 해군과 해병대의 문화가 상이하다. 한편 한국 광복군에 함선이 완전히 없었다고 할수는 없는데 영국 국적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던 조지 루이스 쇼는 계림호라는 배로 광복군이나 임정 요인들의 이동이나 군수물자 이동을 도왔다.

10.3. 대한민국 공군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 중국 공군에서 기지사령관과 공군차장을 역임한 베테랑 최용덕 장군을 중심으로 출신 불문 항공인들이 모여 창설이 진행되었고[23] 특히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최용덕 장군이 백의종군[24]을 감수하면서 까지 공군의 시작을 열어 육군 항공대 초대사령관, 공사교장, 참모총장까지 역임하였다. 김구의 아들인 김신을 비롯한 중국 공군군관학교, 운남비행학교 출신 고위장교 및 고위인사들[25]을 위시하여 초기 공군 창건에 지대한 공헌을 한 탓에 대한민국 공군은 광복군의 영향이 가장 컸고, 건군기 부터 미군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유로 창군부터 현재까지 일제의 잔재가 가장 적었다.
중국 공군 대령 (남창기지사령관 역임) / 광복군 참장/참모처장 출신의 최용덕 장군의 주도하에 창군되었다. 공군 창설 7인의 면면을 보면 중국군 출신 2명, 일본군계 4명(육사2, 소년병2, 학병 1), 민항기 1명 등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경력 및 나이로 연장자 급인 최용덕 장군과 장덕창 씨의 주도로 모임이 운영되고 최장군의 결단으로 백의종군하여 육군항공대를 출범하고 공군으로 나아갔기에 일본군 색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기본적으로 장교와 부사관 위주의 기술군으로 낙후된 일본군 사병문화가 침투할 여지도 가장 적은데다 결정적으로 일본군에 몸담았던 조선인 파일럿들이 전쟁 말기 가마카제로 거의 다 죽어버려, 한국전 당시 활약한 파일럿들 대부분 전후 배출된 장교들이라 일본군 문화와 3군중 제일 거리가 멀다.

11. 출신 인물


  • 김구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통수권자.
  • 김마리아 - 상사 전역
  • 유동열 - 참모총장
  • 지청천 - 총사령 및 제2지대장
  • 김원봉 - 부사령 및 제1지대장
  • 이범석 - 참모장. 훗날 초대 국방부 장관 겸 국무총리 역임.
  • 최용덕 - 참모처장. 훗날 초대 국방부 차관 겸 제2대 공군참모총장 역임.
  • 최덕신 -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주범, 동백림 사건의 책임자. 훗날 월북
  • 김학규 - 신흥무관학교 출신. 제3지대 장군. 장군이라고 보기에는 군대 규모가 작았다. 지대장은 오늘날의 중대장급 수준이었다.
  • 선우진 - 훗날 김구의 비서가 된다.
  • 장준하 - 역시 계훈제와 함께 김구의 측근이 되었으며, 이후 유신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제2지대 출신.
  • 김준엽 - 장준하와 같이 6,000리 장정을 거쳐 충칭에 도착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 출신. 8.15 광복 이후 고려대 총장 역임.
  • 송호성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육군총사령관 직책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 투항.
  • 박시창
  • 김승곤 - 제1지대 출신으로 해방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광복회 회장 지냄.
  • 한지성 - 제1지대 출신으로 김원봉의 최측근. 태평양전쟁 시기 버마전선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정보 및 첩보전 작전수행. 해방 후 민전에서 정치활동, 월북.
  • 이복원 - 미국육군사관학교 출신.[26] 군무부 군사위원회 위원
  • 이재철: 전 외교관, 과학기술처 초대 차관, 교통부 차관. 일본군으로 징집되자 이탈해 광복군에 붙었다.[27]
기타 인물들은 한국군 내 광복군, 중국군 출신 장군 명단 (총23명) 그외.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12. 그 외


2000년대 우후죽순 생겨난 대한제국 황실 복원운동 계열 단체 중 일부 주장에 따르면, 대한광복군의 광복(光復)이 고종황제의 연호였던 광무(光武) 연간을 회복, 수복한다고 하지만, 그 근거가 대체로 미약하다.
[image]
광복군 창설 70주년 정부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재현된 모습. 착용자들은 대학생들.
[image]
한국 개인 재현자들. 모두 사비를 들였다고 한다.[28]
네이버 블로그, 카페에서 쓸 수 있는 광복군 스티커가 있다.
광복군 스티커.

13. 관련 문서



14. 관련 틀




[1] Korea Independent Army 라고도 한다.[2] 다만 이 당시 제대의 고증은 그렇게 훌륭한 편은 아니다.[3] 이는 한인 거주자가 많았던 만주에서도 게릴라전을 펼칠 당시 한국 독립군의 병력은 약 1,600여 명 정도였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산하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무장부대들도 그 숫자는 몇백명 수준이었던걸로 추정된다. 그런데 중국 본토, 그것도 한참 내륙인 충칭에서 사람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4] 엘리자베스 2세국서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삼촌(필립의 어머니 앨리스의 남매)이자 영국으로 이주한 전 바텐부르크 공자. 영국으로 오면서 성을 마운트배튼으로 갈았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누구에게나 잘 어울렸고, 인도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해 인도 정부의 인수인계를 돕고 자와할랄 네루와 친해졌다. 훗날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의 폭탄테러로 사망.[5]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의 인(印)은 인도, 면(緬)은 미얀마를 가리킨다.[6] 한영군사상호협정서(韓英軍事相互協定書) 8조[7] 그동안 많은 정이 들었는지 광복군 대원들은 베이컨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고, 인도에 거주하는 한인들로 부터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하였다.[8] Korea Independent Army[9] 그리고 당시 화북지대원들도 "후방에서 선전전만 하지 말고 만주로 가서 싸우자"는 생각으로 간거라서 과연 돌아왔을지도 의문이다.[10] 북한의 선전상으로는 8만이지만, 이건 과장이다. 5개 지대로 구성되었는데 각 지대가 1600명을 기본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의 주장대로 화북지대 병력의 규모가 정말로 8만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면 아무리 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라해도 노선이 다르므로 '''관동군과 함께 소련군에게 쓸려버렸을 것이다.'''[11] 광복 이후 행적이 명확하지 않으며, 2014년에 세상을 떠났다.[12] 중국 정부가 면허생산한 중정식 소총도 포함.[13] 조선의용군은 2~3만 명 수준까지 성장하여 6.25 전쟁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된다.[14] 최종 직책으로는 한직이나 전선 지휘관으로서는 탁월환 지휘를 하여 6.25전쟁 초기 육군이 지리멸렬하던 초기전황에서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압도적인 병력차를 견디며 지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어마어마한 활약을 하였다.[15] 중국군/광복군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 졸업자는 유해준 이정일(이성가) 2인이다. 이중 정통 광복군 계인 유해준 장군의 진급속도 및 지휘관 임용이 동기생 대비 매우 늦었음을 볼 때 초기 견제는 분명히 있었을거라 보인다. 왕정위군 출신이나 국민당 남의사 출신으로 알려진 이성가 장군의 경우는 신성모 장관의 후원 덕에 경우가 달랐으며 한국전쟁 개전시 대령으로 8사단장이었다.[16] 문재인 정부 들어서 광복군과의 연계성을 연구한다고 한다.[17] 한국군 초기 고위장교단의 형성에서 광복군의 비중이 극도로 낮은 것은 이 이유때문이다.[18] 지청천, 신익희 등이 대표적인데, 지청천은 두 아들을 입대시켜 군무로 종사시키고 본인은 국방분야 의원으로 입법활동을 하였다. 신익희는 광복군 출신 정치인으로서 지청천과 함께 건군기 국군을 정계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19] 국사편찬위에서 낸 건군기 장성들의 회고 책자에 따르면 광복 당시에 군경력자를 보면 일본이나 만주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사람은 약 40만, 중국 등에서 경험한 사람은 3만5천.[20] 송호성은 납북(또는 월북) 후 북 공산당 간부로 이적행위, 최덕신은 박정희에게 찍혀 자진 월북하였고 이적행위가 확인되었다. 송호성은 국군 현역 장성인 당시 무능으로 상관에게 찍히고, 최덕신은 민간인 학살행위가 확인된 사실이 있다.[21] 육군과 달리 해공군은 선각자들의 힘으로 자체 창설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조금이라도 군대를 운영한 적 있는 한국인 장교들은 전부 손에 잡히는 대로 투입해야 했던 건군기였기에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22] 6.25 전후 장비가 극히 열악했던 해군에게 미국의 함선 지원과 미국식 교육체계가 그대로 이식되어 공군 다음으로 일제의 잔재가 적은 편.[23] 공군 창설의 7인중 최용덕 이영무는 중국군 광복군계. 장덕창은 일본 민항기 베테랑 파일럿. 김정렬, 이근석, 박범집, 김영환은 일본군계로 고루 분포되어 있었으며, 모임의 좌장이 최용덕 장군이었다.[24] 공군 창설의 7인 모두 고급장교 또는 베테랑 경력자임에도 당국의 홀대로 육군 참위 임관을 제안 받았다. 육군에서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고속승진하던 만군 일군 출신과는 대조. 최용덕 장군은 당시 이미 군경력 20년을 넘겼으며 중국 육군대학까지 졸업하고 기지사령관, 총사령부 차장을 역임한 거물이었다.[25] 이영무, 권기옥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운영한계 때문에 항공전력은 중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어 대일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임시정부 활동을 같이 하였다. 광복 후 육군 항공대 및 공군 창설에 관하여 정치적인 기여를 하거나, 현역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26] 미국 육군사관학교 기록에는 없다. 캘리포니아의 민간군사학교를 다녔다는 말도 있다.[27] 갑질사건으로 논란이 되고있는 이명희의 아버지.[28] 옥의 티가 있는데, 태극기의 사괘 배치가 1949년에 개정된 현행 도안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