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홍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상홍은 1889년 10월 14일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관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음력 11월 평양에서 현기정 등이 결성한 비밀결사 공성단(共成團)에 가입하여 단원을 모집했다. 공성단에서는 역원(役員)을 선정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우국금(憂國金)이라는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공성단 명의로 대한독립단 통신부(通信部)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독립신문(獨立新聞)>, <포고문> 등을 국내로 들여와 배포하였다. 또한 최상홍 조카의 처가 사람인 오완종(吳琓鍾)과 김창섭 등은 1919년 12월 '1920년 1월 1일은 폐점(閉店)하고 일본국기를 띄우지 말라'는 내용의 문서 100매를, 그리고 1920년 2월 28일에는 조선독립에 관한 문서를 작성하여 평양 내에 배포하기도 했다.
한편 1919년 음력 11월 20일경 재무부장을 맡았던 현기정이 유하현으로 출발한 후 일단 백계홍이 그를 대신해 재무부장을 맡아 적당한 지도자를 물색하였다. 1920년 1월 20일경, 평안남도 참사(參事) 안석(安奭)을 단장(團長)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이후 서울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월 16일경 평양으로 돌아온 안석이 "장차 실력을 양성하면 자연히 독립의 시기가 올 것이므로, 공성단과 같은 위험한 단체는 해산하고, 경제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공동 출자해 조합을 만들어 객주(客主)를 경영하자"고 제안하였다. 단원들은 이 의견에 찬성하여 각자가 출자해 평양 관후리에 8,500원 상당의 집 1채를 점포로 구입하기로 했는데, 이때 최상홍은 1,000원을 출자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20년 10월 1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공소하여, 1921년 1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4년을 받고 진남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4년 7월 2일 출옥하였다. 이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5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최상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