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정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현기정
玄基正'''
[1]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878년
평안남도 개천군 외서면 견룡리[2]
(現 평안남도 개천시 건지동)
'''사망'''
1922년 3월 4일
중국 지린성 쌍성현
(現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솽청구)
'''본관'''
연주 현씨
'''자녀'''
아들 현승종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5년)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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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 생애


1878년생이며 평안남도 개천군 외서면 견룡리(현 개천시 건지동) 출신이다. 그는 유인석의 문인으로, 1896년 1월 유인석의 제천의진에 참가했다. 이후 1896년 여름 유인석이 황해도·평안도를 거쳐 만주로 이동할 때, 그는 유인석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만주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유인석의 문도인 박장호·조맹선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독립군 단체였다.
대한독립단은 결성 이후 국내 지단 조직에 힘을 쏟았는데, 그는 이와 같은 계획 아래 1919년 11월(음력) 고향인 개천으로 돌아와 비밀결사 공성단(共成團)을 조직하였다. 공성단의 주요 활동은 군자금을 수합하여 만주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최상홍·장덕건(張悳健)·박돈수(朴敦洙) 등 10여 명의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군자금 50원을 모집하여 대한독립단에 송금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만주의 대한청년단연합회와도 연결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1920년 경에 다시 만주로 망명한 그는 독립군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병을 얻어 1922년 3월 4일 지린성 쌍성현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현기정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이명은 현기이(玄基已)[2] 연주 현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