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석순은 평안북도 삭주군 출신이지만 태어난 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때 동생 최석준과 함께 삭주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에 가담했고, 일제가 시위 주동자 색출에 나서자 남만주 집안현으로 망명했다. 이후 동생 최석준은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해 독립 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1922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녀오다가 안동에서 체포되어 의주로 압송되고 그해 11월 14일 의주 경찰서에서 일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그들이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동생이 비명에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최석순은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남만주 지역의 대한독립단에 가담해 집서(輯西)지단장을 맡으며 집안현 서부지역의 민족운동을 총괄했다. 또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이후 주민자치와 민주공화제 이념을 표방하며 결성된 참의부에 참가해 제2중대장과 참의장 등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최석순이 이끄는 부대는 1923년 국내로 진입하려다가 일본군의 역습을 받았다. 최석순은 짧은 교전을 벌인 뒤 철수했고, 상등병 백낙원(白洛元)과 김관빈(金官賓)이 전사했다. 이후 1924년 5월 참의부 제2중대장으로서 ‘남만(南滿) 군인대표’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했다.
1924년 5월 19일, 최석순 휘하 참의부 제2중대 1소대 소속의 장창헌 이하 대원 8명이 압록강 일대 국경지대를 순시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일행이 탄 배에 총격을 가했지만 암살에 실패했다. 또 최석순 휘하의 제1소대 2분대장 김창화(金昌化)와 부대원 7명은 평북 후창군 우항령에서 일본 경찰과 접전 끝에 적 1명을 죽이고 다른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1924년 7월, 최석순은 동지 조응건(趙應建)·김만성(金萬成)·박영진(朴永鎭)·김봉서(金鳳瑞)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평북 초산에서 밀정 이갑정(李甲廷)의 집을 불태웠다. 이후에도 최석순이 이끄는 참의부 의용군 부대는 여러차례 국내로 진입해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고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으며, 일제 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다.우리는 국토광복과 민족자유를 위해 생명과 재산을 공공단체에 이미 공헌(供獻)한 것이다. (중략) 임시정부 군무부 호령 하에서 원수의 적을 격퇴하기로 맹약(盟約)하였다. 우리의 임시정부는 전민족의 대동통일적인 최고기관이다. 이러므로 대한(大韓)의 군민(軍民)된 우리는 마땅히 전민족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공고케 하는 것이 의무와 본분이다. 남북 만주에 유리방황하는 형제자매여, 밤낮 피땀으로 모은 금전을 바치는 것도 국가독립을 위함이며, 내외지로 모험 맹진하는 군인동지여, 막중한 생명을 희생함도 민족자유를 위함이라. 어찌 개인 야욕 아래 생명을 희생하며 어찌 국부(局部) 사회에 재산을 허비할리요. 우리 군인은 반드시 전민족의 주재기관인 임시정부 기치 하에서 대업을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절대로 개인의 야욕 하에서나 또는 국부 사회의 편견 하에서 활동치 아니하기를 것을 선언하노라
1925년 2월, 최석순은 남만주 집안현 고마령에서 5개 중대 군사회의를 열어 국내 진입작전과 군자금 모집, 일제 기관의 파괴 등 작전 계획을 협의했다. 그런데 그해 2월 25일 밀정 이죽파(李竹坡)가 이 사실을 일제의 초산경찰대에 밀고했고, 초산 일본경찰대는 즉시 참의부 회의장소를 기습 공격했다. 참의부 간부들은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끝내 무너졌고 최석순(崔碩淳) 등 29명이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석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