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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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군인(해군 대장), 정치인. 두 차례에 걸쳐 최장기 조선 총독과 30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
2. 생애
2.1. 초창기 활동
현재 이와테현 무츠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해군을 주름잡은 사쓰마(가고시마) 번 출신이 아니고, 순전히 자기 힘으로 승진을 거듭한 실력파이다.[2] 14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이듬해, 일본해군병학교에 입학하였다. 해군병학교 졸업 후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1884년 미국 유학을 떠나 1888년까지 초대 주미 일본 공사관 주재무관을 지냈다. 이로 인하여 자유주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1888년 귀국하여 해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였는데 함대 근무는 최소한만 경험하였으며 해군성에 오래 재직하는 관료 군인으로서 대해군을 건설하는데 아키야마 사네유키 제독과 함께 큰 역할을 했다. 작전능력과 행정능력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아 미래 해군의 주역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1893년 해군소좌로 승진했고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메이지 덴노의 시종무관에 임명되었다.
2.2. 해군의 실력자
1897년 12월 초에 중좌로 승진하였는데 12월 말에 다시 대좌로 승진하는 등 전례없는 파격적 승진을 거듭했고 1898년 40세의 나이로 대좌로 승진하였으며 중장보직인 해군차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군무국장, 함정본부장, 교욱본부장 등 해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00년 해군 소장으로, 1904년에 해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 했을 때 해군의 경영을 사실상 틀어쥔 해군의 실력자였다. 일본의 조약파(条約派)[3] 해군 제독 출신으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방 세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도 풍부했다. 해군 중장 니게 카게노리 제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1906년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출범하자 해군대신에 임명되어 1914년까지 5개 내각에서 해군대신을 지냈다. 해군 건설에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수작받았으며 1912년 해군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191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무너지자 이에 책임을 지고 해군대신에서 사퇴했으며 퇴역하여 예비역이 되었다.
2.3. 조선에서의 문화 통치
3.1 운동 이후 무력만을 앞세운 통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일본은 일단 당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3.1 운동의 책임을 물어 해임시킨 뒤, 조선에 대한 유화적인 통치 도입의 필요를 느끼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물색하게 된다. 1919년 8월, 하라 타카시 내각은 군인 출신의 임명을 강경히 요구하는 육군의 요구와 동시에 조선에서의 통치 완화, 육군의 영향력 축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사이토 마코토에게 조선총독에 부임해줄 것을 요구했다. 사이토는 군인 출신이라 육군에서도 반대할 명분이 민간인 출신에 비해 적었으며 해군 출신이라 조선에서의 육군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데도 알맞춤이었다. 그리고 민간인 코스프레를 육군에 비해서 그나마 좀 하는 편인 해군 인사 중 가장 민간인 코스프레를 잘한다는 점에서 통치완화의 상징으로도 적격이었다. 훗날 총리 대신 임용 당시 타임지에서도 이런 언급을 했었다.
그의 조선 통치는 일본 입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그의 통치 시기를 문화 통치 시기라 한다. 문화통치시기에는 보다 교활한 식민지 통치정책이 시행되어, 겉으로는 강압적인 3.1운동 이전의 통치방식보다는 완화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고 동시에 친일매국노 및 민족변절자가 다수 생기게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문화 통치를 조선 민족 정기 말살을 위한 악랄한 통치 수단으로 취급하지만, 단순한 (1930년대 이후의) 민족 말살 정책만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민주주의 운동붐이 한창이었고 그러한 민주주의와 평화 운동의 분위기와 사이토 조선총독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조선 통치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교원까지 칼차고 수업하던 것이 완화되어 더이상 칼을 차지 않게 됐고, 원성 자자하던 육군 헌병 대다수가 보통 경찰로 전환되었으며, 조선인들이 하급 관리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나 이후 상황을 살펴봐도 그렇고, 조선의 문화 통치 역시 저항을 느슨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인들의 지지율을 얻고 환심을 사기 위해 시행한 회유책이었지, 실질적으로 조선인의 자유나 복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식민 통치기 중 조선인들이 약간이라도 숨 좀 편히 쉴 수 있었던 시기 정도로 보면 된다.
데라우치와 하세가와의 폭압 통치보다 훨씬 간교한 통치와 식민사관 연구의 기반(1925년의 조선사 편수회)도 사이토가 닦았다. 1930년대 ~ 1940년대 징용, 징병 등을 찬양하는 친일파들이 상당했던 것 모두 이 인간이 그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흔히 아베 노부유키 장군의 괴설 떡밥과 함께 식민 교육으로 조선을 장악하겠다는 사이토 제독의 '신교육칙어' 떡밥이 있으나 알다시피 칙어라는 것은 천황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일개 장군, 제독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육 칙어는 일본의 패전 때까지 개정되지도 않았다. 교육 칙어는 유교 봉건적 도덕관을 주제로 한 일제스러운 스타일이라 신교육칙어란 출처 미상의 문서와는 맥락도 매우 다르다. 물론 이러한 역사상 사실이나 차이 때문에 사이토 제독이 우리 나라에 박아놓은 역사 왜곡과 식민 사관을 부정할 순 없다.
그는 1927년 4월 4일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6월 2일 ~ 8월 4일)의 전권 대표로 출석하였으며 12월 조선 총독을 사임하고 추밀고문관에 임명됨으로 일본 중앙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다. 하지만 1929년, 후임 야마나시 한조 장군이 비리[4] 로 사임하자 1929년 8월 17일 재 취임해 1931년 6월 17일까지 통치, 사이토 마코토 2기 집권기에 접어든다. 가히 '''십년 통치'''로, 35년 조선 통치 가운데 1/4을 넘어 1/3에 육박한다.
후임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장군 역시 1930년대까지의 문화 통치와 공업화 정책으로 충실하게 뒤를 이었다.
앞서 말했듯 문화 통치를 시행한 제국주의 인물이지만, 정작 일본 군조직내에서는 합리성을 중시하는 온건파 인물로서 끝없는 전쟁으로 치닫는 일본을 멈춰보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조선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고 독립 운동이 계파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시기 또한 이 인간이 조선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의 사회상은 일제강점기의 민족 분열 통치 시기를 참조할 것.
부부 동반으로 최초로 조선에 올라온 총독이기도 하다. 부부 동반으로 군복이 아닌 평범한 양복에 중절모 차림으로 나와 문화 통치를 선전한 적도 있다.[5] 그렇게 취임하러 온 당일에 강우규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해서 친일 고관과 일본인을 합쳐 37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가까이서 구경하던 민간인 중에도 몇 명의 일본인 부상자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암살 대상이었던 사이토 제독은 그다지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고 한다.
한편 강우규가 재판이 마무리될 때 한 최후의 일언(마지막 항소) 내용은 링크와 같다[6] . 요약하자면 죽이려고 한 것은 사이토 제독 한 사람뿐이며, 주변의 민간인을 부상 입힌 것은 본의가 아니라는 것.
2.4. 총리 취임
그 후 1932년 5월 15일 일어난 5.15 사건[7] 이후 군부의 폭주를 경계했고, 사이온지 긴모치와 중신들이 개별적으로 만나 회의한 결과 사이토 제독의 온건노선에 호응하여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정당 당수들을 총리후보로 간택하여 정당내각을 용인해왔던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가 정당정치를 종식시키고 중신들과의 협의를 통해 거국내각을 이끌어 냈다는 점은 그만큼 일본의 상황이 안 좋았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쇼와 덴노는 5.15사건 이후 '인격이 훌륭한 총리' '파시스트 성향 절대 불가', '국제관계에 중심을 둔 온건파'라는 조건을 모두 갖춘 인재를 원했다. 또한, 해군 출신 총리는 전반적으로 정치권에서 해군보다 큰 힘을 행사하던 육군이 문민 출신 관료들과 대립할 때 타협안으로 옹립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역시 감안해야 한다. 사이토 역시 그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여튼 1932년 사이토의 내각총리대신 임명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이 수상으로 가는 코스라는 인식을 가지게 만들면서 군인 정치가들이 침 흘리는 요직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일본 내부 경제문제 해결과 정치 안정화를 위해 와카츠키 레이지로 민정당 총재와 스즈키 기사부로 정우회 총재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초당적인 내각을 만들어 낸다. 절친인 다카하시의 재정정책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여 경제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군사비의 급증으로 효과는 미미했다. 한편, 사상면에서는 전혀 온화롭지 않았다. 교토대학의 타키카와 교수의 사상을 문제삼아 교단에서 내려오게 만드는가 하면 일본 공산당을 전면적으로 탄압하여 궤멸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온건한" 그 조차도 유지했던 군부의 마지막 철칙.
사이토 내각은 1932년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국제연맹에서 일본은 만주국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국제연맹을 탈퇴해 버린다. 만주국의 승인과는 별개로 이렇게 아주 완전한 국제적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본디 사이토 내각의 의사는 아니었고, 탈퇴 성명문을 낭독하고 일본 대표단을 데리고 국제연맹에서 뛰쳐나온 마츠오카 요스케도 자기가 일을 저질렀다 싶어서 차마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는 마쓰오카가 다른 나라들의 대표단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여 국민영웅으로 떠받들며 환호했고, 마쓰오카의 귀국현장에는 대대적인 환영인파가 몰리는 등 여론도 강경하게 되었다. 사이토 내각은 이 국민적 관성을 받아낼 방법이 없어 그대로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리고 만다.“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의 발언)
군부[8] 와 대립을 극력 피했으나 군부는 그의 리버럴 성향을 싫어 했으며 내각을 흔들기 위해 끊임없이 관료에 대한 스캔들 사건을 폭로했고 '제국인조견사' 불법 주식매매사건을 통해 궁지에 몰린 그는 1934년 내각을 사임했다.
사이토 제독은 사임 직후 오카다 게이스케를 후임으로 하여 해군 출신의 중립성을 강조하려고 했으나, 현실은...
2.5. 사임과 끔살
1934년, 총리직을 내려놓은 사이토는 궁내부대신(내대신)에 임명되었다. 총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상 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로부터 현상 유지의 총본산으로 지탄을 받아 미움을 샀다.
이 사진은 1936년 2월 20일에 찍힌 것으로, 6일 후 2.26 사건 으로 두 사람은 사이좋게 저승길로 간다. 총독 시절에 군복 대신 양복을 입고 출근하였는데, 총리대신 취임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캐주얼한 양복차림으로 나타났다.
결국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황도파 청년 장교단은 1936년 2.26 사건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사이토는 77세를 일기로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때 다카하시 대장대신과 와타나베 육군교육총감도 함께 암살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2.26 사건 참조.
물론 그가 암살 기도를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대표적으로 1919년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과 1926년 순종의 승하 때 송학선 의사의 기도가 있었지만[9] 모두 실패했었는데[10]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민족인 일본인, 그것도 자신이 몸담고 있던 일본군에게 사살된 것이다.
여러 번 암살 시도를 넘겼던 사이토 제독은 제 명에 죽을 줄 알았지만, 총독도 총리도 다 그만두고 궁내성에서 궁내부대신으로 활동하던 도중 청년 황도파에게 친영미파로 지목되어 죽게 되었던 것. 사이토 제독은 암살당했던 대신들 중에서 가장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집에 난입한 반란군 황도파 육군 장교들에게 47발이나 난사당했고, 그중 몇 발은 장교도 아닌 증오심으로 가득찼던 일반 육군 병사가 자원해서 시행한 확인사살이었다.
암살 과정에서 사이토 제독의 처도 장교들에게 저항하다가 장검으로 토막났다는 와전된 야사도 전해지나, 실제로는 천수를 누려 1971년에 98세로 사망했다.
3. 성격
개인적 성격은 털털했다고 전해진다. 1914년 전역 직후 구입한 별장에서 여느 집 노인들과 다름 없이 검소하게 지내다 보니 그 지역의 서장이 일을 하고 있던 제독을 보고 "못보던 영감님이네" 라고 했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군인치고 꽤 신사적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분위기 파악이 빠르고 조용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총리 재임 시절 정치인들이 맹렬하게 비난하고 도발을 해도 "긴장감이 없어보이지만 저는 극도로 긴장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공손하게 답변 했을 정도로 점잖았다고.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해서 감사 편지나 답장을 자주하였으며, 서예를 좋아했던 그에게 휘호를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고 빠짐 없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한 번 들어온 서신은 반드시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개인 정보 습득에 빨랐다. 이런 습관으로 인해 그가 지녔던 서류가 일본 국회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을 정도.
4. 여담
- 고자라는 설이 있다. 그 설의 내용인즉슨 어릴적 개에게 물려 뜯겨나가 외부 성기가 완전히 없다고(....) 실제로 결혼을 하긴 했으나 친자식을 보지 못했고 양아들만 한 명 두었다. 하지만 수염을 기른 것으로 보아 친자식이 없어 생긴 낭설일 가능성이 크다. 고자는 테스토스테론 부재로 인해 수염이 나지 않는다. 애초에 외성기가 없을 정도면 그냥 징병도 아니고 병학교 신체검사를 통과했을리가.
5. 대중매체에서
- 1990년작 KBS1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최정훈이 연기했고,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전무송이 분했다. 조선총독부 기념식에서 최동열의 아버지, 고노에(하야시 장인), 하야시와 인사하고, 고노에와 하야시에게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도와줄 사무라이라고 칭송한다. 이후 나머지 일본 고위관료들과 함께 기미가요를 부르는 것으로 등장 끝.
6. 주요 경력
[1] 부임 9월 1일[2] 보신전쟁 이래 도호쿠 지방 출신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힘들었다.[3] 런던 해군 군축조약 유지를 지지하는 온건파 노선이다.[4] 한 미곡상이 야마나시 한조의 측근에게 당시 금액으로 5만 엔의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조선 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야마나시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로 인해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타이완에서 조명하 의사가 일본 황족 구니노미야 구니히코(쇼와 덴노의 장인)를 칼로 찔러 독살, 이로 인한 책임까지 겹쳤다는 말이 있다.[5]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제복을 입고 보내던 육군과 달리, 근무 시간이나 큰 행사 외엔 사복 정장 차림을 하는 게 일반적이던 해군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도 있다.[6]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는 점은, 강우규는 이미 재판 과정에서 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대해 "끝에서 뾰족한 것이 튀어나와 '''내가 죽이고자 하는 사람''' 하나만 맞힐 줄 알았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 바 있었다.[7] 해군 급진파 청년이 중심이 되어 호헌운동의 중심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한 사건이다.[8] 여기서 말하는 군부란 대체로 일본 육군을 말한다. 일본 육해군의 대립은 해군 출신 총리대신들에 대한 육군의 끊임없는 흔들기로 나타났다. 선술했듯, 해군 출신 총리대신은 보통 육군과 문민 관료간 대립시 일종의 합의에 의해 나오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육군들이 언젠간 쫓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컸다.[9] 송학선의 경우는 닮은 사람을 사이토로 오인하고 죽였지만, 다행히도 민간인이 아니라 일제의 요인이었다.[10]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김상옥 의사도 원래 사이토 총독 암살을 목표로 국내에 잠입한 것이었고, 1933년 만주국 일본 대사 암살을 기도한 남자현도 1926년 사이토 총독 암살을 기획한 적이 있었으나 거사 직전 송학선의 의거로 경계가 강화되는 바람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