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영균은 1900년 11월 14일 전라남도 광주군 기례방면(현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에서 태어났고, 1919년 무렵 숭일학교에 재학했다. 1919년 3월 5일,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으로 상경했던 김철(金鐵)과 최정두(崔正斗)가 광주로 돌아와 독립만세시위를 광주시내에서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때 최영균은 숭일학교 교사 김강과 황상호(黃尙鎬)·홍승애(洪承愛) 등과 함께 3월 8일 광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각각 그 준비를 분담하였다.
그는 학생 동원을 책임졌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준비는 최한영(崔漢泳)이 분담하였으며, 일반시민동원은 서정희가 맡았다. 또 수피아여학교와 영락학교 학생 동원은 홍승애가 맡았다. 그러나 시위 준비와 연락이 부족하여 날짜와 장소를 연기하여 3월 10일 장날 오후 3시 반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 장터에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최영균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군중을 인도하면서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최영균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군중들을 이끌고 경찰서 앞마당으로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기마 헌병들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연행하였다. 최영균은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1년 1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최영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촌리·성저리·시리·후리·보통리 일부와 공수방의 상촌리·하촌리 일부가 합병되어 광주면 수기옥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