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희(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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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廷禧
1876년[1] 10월 10일 ~ ?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대구(大丘)[2]#, 자는 성전(聖傳), 호는 농천(農泉) 또는 묵재(默齋)이다. 6선 국회의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서범석이 그의 아들이다.
1876년(고종 13)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만리동)[3]##2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아버지 서병갑(徐丙甲)[4] 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규일(李圭一)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문중(徐文重)의 9대손으로, 증조부 서병순(徐秉淳)은 서문중의 6대 종손으로 종3품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서병갑은 1874년(고종 11)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던# 무관이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894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으며, 1896년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1897년(고종 34) 무안우체사(務安郵遞司) 주사에 임용되었고#, 1900년 광주우체사 주사로 전보되었다가# 1904년 해임되었다.# 1905년에는 모종의 이유로 징계를 기다리다가 곧 사면되었다.#
1906년 1월 나철 등과 한일의정서에 반대,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1907년 2월 권중현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5년간 유배되는 형을 선고받았다가##2 1908년 탈주하여 광주군에서 대한협회 광주지회를 조직하였고, 곧 사면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사립 광주법학강습소를 창립하여 법학 교수를 지냈다. 1915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만주에 갔다가 1918년 귀국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광주노동공제회·전라노농연맹·남선노농동맹 위원장, 광주 소작인연합회 집행위원장, 경성 조선노농총동맹 총무부 집행위원장, 조선교육협회 평의원, 신간회 조직부장 등을 지냈다.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바 있으며, 1934년 3월 15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10월에 출옥하였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이 되어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지도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본부 중앙상무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포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윤성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직후 7월에 납북되었다. 이후 재북평화통일협의회(在北平和統一協議會) 중앙위원을 역임하다가 1958년 숙청·감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徐廷禧
1876년[1] 10월 10일 ~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대구(大丘)[2]#, 자는 성전(聖傳), 호는 농천(農泉) 또는 묵재(默齋)이다. 6선 국회의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서범석이 그의 아들이다.
2. 생애
1876년(고종 13)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만리동)[3]##2에서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아버지 서병갑(徐丙甲)[4] 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규일(李圭一)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문중(徐文重)의 9대손으로, 증조부 서병순(徐秉淳)은 서문중의 6대 종손으로 종3품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서병갑은 1874년(고종 11)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던# 무관이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894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으며, 1896년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1897년(고종 34) 무안우체사(務安郵遞司) 주사에 임용되었고#, 1900년 광주우체사 주사로 전보되었다가# 1904년 해임되었다.# 1905년에는 모종의 이유로 징계를 기다리다가 곧 사면되었다.#
1906년 1월 나철 등과 한일의정서에 반대,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1907년 2월 권중현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5년간 유배되는 형을 선고받았다가##2 1908년 탈주하여 광주군에서 대한협회 광주지회를 조직하였고, 곧 사면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사립 광주법학강습소를 창립하여 법학 교수를 지냈다. 1915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만주에 갔다가 1918년 귀국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광주노동공제회·전라노농연맹·남선노농동맹 위원장, 광주 소작인연합회 집행위원장, 경성 조선노농총동맹 총무부 집행위원장, 조선교육협회 평의원, 신간회 조직부장 등을 지냈다.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바 있으며, 1934년 3월 15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10월에 출옥하였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이 되어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지도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본부 중앙상무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포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윤성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직후 7월에 납북되었다. 이후 재북평화통일협의회(在北平和統一協議會) 중앙위원을 역임하다가 1958년 숙청·감금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