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독립운동가)

 


1.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김강(金剛)
2.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김강(金江)
3. 광주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김강


1.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김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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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강(金剛)
이명
송재길(宋在吉)

무산(武山)
생몰
? ~ 1920년 11월
출생지
평안도
사망지
중국 연길현 동불사 북구
종교
개신교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김강은 평안도 사람으로 알려졌을 뿐 그외의 인적사항은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다. 그는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학교에 재학하던 중 105인 사건과 관련된 혐의로 수사망이 좁혀지자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북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청년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북간도에서 간민회(墾民會) 일본조사부원으로 활동하였고,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 회원, 동제회(同濟會)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 통신부원 겸 중부경호부장을 맡아 1920년 11월까지 활동했다.
1920년 7월 22일에는 연길현 동불사(銅佛寺)의 시민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여관업자들은 적의 숙박을 지금부터는 허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1919년 11월에는 간도청년회(間島靑年會)의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의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2월에는 '간도 15만원 사건'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북간도 지역에서 철혈광복단원(鐵血光復團員)으로 활동하고 있던 최봉설(崔鳳卨)·윤준희·한상호(韓相浩)·임국정·김준(金俊) 등이 1920년 1월 일제의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동 은행 용정(龍井)출장소에 보내는 송금을 탈취하기로 결의하고, 15만 원을 탈취한 사건이었다. 그는 여기에 가담한 뒤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등과 함께 연해주, 간도의 오지로 피해다녔다.
그러던 1920년 11월경, 김강은 연길현 태평구 용포동 부근에서 가납기병연대에게 체포된 뒤 연길현 동불사 북구에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만주방면 독립운동가, 김강(金江)


성명
김강(金江)
생몰
? ~ 1927년 11월 13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만주 화룡현 연길시외 연집강 소석구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김강은 혁신단(革新團)에서 제2분대장을 맡아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1927년 11월 13일 만주 화룡현 연길시외 연집강 소석구에서 혁신단 제1분대장 한익과 동지들인 임칠호(林七虎)·방준(方俊)·정칠명·박덕언(朴德彦) 등과 함께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3시간 30분 동안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강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광주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김강


성명
김강(金剛)
생몰
1890년 1월 4일 ~ 1930년 8월 6일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목 효천면 양림리
사망지
전라남도 광주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김강은 1890년 1월 4일 전라남도 광주목 효천면 양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신교 신자로, 1919년 3월 5일 김철(金鐵)·최병준·최한영(崔漢泳) 등이 서울에서 돌아와서 독립선언식 광경과 만세시위 정황을 전해주자 바로 청년, 유지 등에게 연락했다. 이날 밤 양림동에 소재한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숭실학교 교사인 최병준과 최한영·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奉)·한길상(韓吉祥)·송흥진(宋興眞)·김용규(金容奎)·손인식(孫仁植)·김태열(金泰烈)·최정두(崔正斗) 등과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는 김철에게 서울의 시위 정황을 알려주게 한 뒤 광주에서도 똑같은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해 모두의 찬성을 얻어냈다.
이후 그는 광주 큰 장날인 3월 8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학교 학생 및 주민의 시위참가 선전, 독립선언서의 등사·태극기의 제작 등 사전준비를 분담하고 추진했다. 그러나 준비 기간이 너무 촉박하자, 다시 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그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을 등사하고 거사 연락을 취하였다. 이윽고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어,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이 넘었다. 이때 그는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군중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장안을 행진했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 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며,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일본 헌병·경찰은 감히 시위방해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자, 많은 경찰과 기마 헌병이 김 철 등의 주모자를 연행하였다. 이에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수까지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아울러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다. 이때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0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