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규(1897)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용규
崔鏞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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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7년 3월 8일
경상남도 마산군 상남읍
<color=#fff> '''사망'''
1959년 9월 16일
경상남도 마산군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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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용규는 1897년 3월 8일 경상남도 마산군 상남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초 명도석, 이형재(李瀅宰), 이정찬(李廷瓚) 등과 협의하고 또 학생대표에게도 연락하여 구마산(舊馬山)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물은 보부상(褓負商)을 가장하여 장터로 운반되고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는 여학생들의 치마폭에 감추어 장꾼사이에 끼어 반입되었다. 오후 3시경 학생을 비롯하여 장꾼들까지 3천여명의 군중이 모이자 만세시위는 본격화되었고 독립만세소리는 장터를 진동시켰다. 일경은 증원군의 응원을 받아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이를 저지하였는데, 이때 그는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처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마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9년 9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최용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