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석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명도석은 1885년 4월 3일 조선 경상도 창원대도호부 중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산의 창신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6년 12월 구영필(具榮佖)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비밀결사조직 합사(合社)에 가담했다. 합사는 실업, 군사, 외교 부문의 광범위한 준비와 실력행사로 국권회복을 꾀하는 거대조직으로 구상되었고, 국외 독립운동자들과 연계해 상당한 조직망을 형성하려 했다.
그러나 구영필이 1918년 2월 조선국민회 사건을 수사 중이던 평남경찰부에 의해 봉천에서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합사 조직은 이로 인해 드러났다. 결국 명도석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개월간 복역해야 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마산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3월 12일, 명도석은 이형재(李瀅宰), 최용규, 이정찬(李廷讚), 최동락, 신택식(辛澤植) 등과 협의해 거사일을 3월 21일 마산 장날로 정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이윽고 1919년 3월 21일, 명도석 등은 학생, 상인, 일반 대중으로 구성된 3천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는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했으며,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웠다. 이에 마산 일본군 중포병대대 21명과 마산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7명이 동원되어 총검으로 군중을 공격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후 명도석은 당국의 수사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가을, 명도석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박용만의 밀사와 만주 랴오닝성 단둥에서 만났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되어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27년 7월 20일 신간회 마산지회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고, 1929년 1월 28일 신간회 마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가 해소될 때까지 활동했다.
1940년 2월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창씨개명을 강요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고 은둔했으며, 1944년 8월 여운형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활동했다. 8.15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시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경남군정청의 경남도고문회의 마산대표를 역임했다. 그러던 1954년 6월 9일 마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명도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