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응

 

성명
최종응(崔鍾應)
이명
최근응(崔謹應)

금전(琴田)
본관
경주 최씨[1]
생몰
1871년 8월 21일 ~ 1944년 1월 24일
출생지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둔산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2]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최종응은 1871년 8월 2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둔산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음력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고일청(高一淸)[3]은 내무총장 이동녕과 임시의정원 의원 최창식(崔昌植)의 소개장을 들고 비밀리에 입국하여 윤영선(尹榮善)[4]을 방문하여 조선 내에 장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을 설치할 것이라며 「선정대사(宣政大使)」라는 신임장과 「지방행정조직서(地方行政組織書)」·「지방행정관리통칙서(地方行政官吏通則書)」·「경고부내대소민(警告部內大小民)」이라는 제목이 붙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교서 등을 보여주며 도움을 청하였고, 윤영선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 조직서들에 의하여 각 도에 선정사(宣政使) 및 각 군면에 관장(管長)을 두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최종응은 경상북도 선정사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여 동지 고정일(高政一)·윤영선·이태훈(李泰勳)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조달기반을 조성하였으며 그해 9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순방하며 자산가들의 자산명부를 작성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해 11월에는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현 금호읍) 오계동에 사는 조석환(曺奭煥)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8백원을 받아 임시정부 파견원 고일청[5]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1년 2월 경상북도 영천군 청경면(현 고경면) 상리동에 사는 손계창(孫啓昌)과 칠곡군 지천면 금호동에 사는 윤병돈(尹炳敦) 등 경상북도에 거주하는 부호들에게 2천원 내지 5천원을 요구하는 군자금 납입명령서를 송부하고 손계창과 윤병돈으로부터 300원씩 받아 이태훈에게 전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해 6월 3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2년 3월 30일 소위 공갈 및 제령 제 7호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은거하다가 1944년 1월 24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광정공파 31세손.#[2] 인근의 봉무동과 함께 경주 최씨 광정공파 집성촌이다. 출생지인 382번지에는 현재 그의 생가인 금전고택이 자리해 있다.[3] 1912년 일제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을 받고 일제강점기 초 관료를 지내다가 3.1 운동 직후 퇴직하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임시정부에서 재무부 비서국장, 임시공채관리국장,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27년 '''임시 정부기금 5만 원을 횡령''' 해 독일로 유학가서, 베를린 대학 법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다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 [4] 이명 尹喆[5] 또는 고일치(高一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