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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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제1·2대 대통령, 제12·13대 주석이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호는 우남(雩南)이다. 1900년대에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거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5]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아 한국인 최초의 박사 학위 보유자가 되었다.[6] 대통령 이외에도 '우남' 혹은 '싱먼 리'[7] , '이 박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이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 '이 박사'라고 더 많이 불렸다.[8]
한국근현대사에서 가장 길고 굵게 살았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고종 12년 조선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9] ,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퇴위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사면되어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활동하였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 신탁통치 반대,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거쳐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으며, 6.25 전쟁과 같은 국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하여 반발을 샀고,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냈고 1965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 고국에 안장되었다.
사후 군사정권에 의해 폄하되었고 1980년대 이후 브루스 커밍스식 수정주의적 관점에서도 '남북분단과 민족상잔의 원흉'으로 비난받았으나, 1987년 6.29 선언 후 민주화 바람 및 1989년 탈냉전 바람과 더불어 재평가 움직임이 일었다. 박정희, 김대중과 더불어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대통령 중 하나이다.
2. 일생
3. 평가
4.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
현대에는 두 사람의 지지세력이 겹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에 비해 두 사람의 행보는 상당히 다르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으나 박정희는 만주군에서 복무했고, 광복 후에도 이승만은 극렬 반공주의자였던 반면 박정희는 남조선노동당에서 군사총책으로 활동한 바 있다. 특히 이 남로당 활동으로 인해 사형을 당할 뻔까지 했었으니 개인적으로 박정희가 이승만을 좋게 볼 리 없었고, 이승만 역시 남로당 활동을 한 박정희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즉, 이승만과 박정희는 근본부터가 서로 반대였으며, 서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박정희가 집권했을 때 이미 4.19 혁명으로 하야했음에도 여전히 인기 있던 이승만은 그에게 장벽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하였으며 장면 총리는 죽어서야 집 밖에 나오도록 했다. 아울러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 폄하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군인의 횡포, 여기서 비롯되는 인사 적체 문제 등을 이승만 집권기에 겪은 바 있다. 1차적으로는 여순반란사건이 박정희와 이승만의 앙금을 만드는데 기여했고, 2차적으로는 전후 진급심사에서 곽영주가 자신의 남로당 행적때문에 진급을 누락시키려하자 백선엽이 말려 겨우 진급한 것 때문에 박정희와 이승만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발췌 개헌 당시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상관인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수립한 바가 있다. 즉 5.16 군사정변은 두 번째 계획이었다. 본래 5.16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계획되었다. 시행날짜는 3월 15일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8일이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이 송요찬인데 그 송요찬이 미국으로 가는 날이 5월 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8일로 정한 것이다.[10]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의 이승만 평가는 영결식 당시 연설과 전혀 다르다. 내용 일부 발췌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는데, 당연하게도 이승만의 장례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었다. 거기서 양자와 의견 조율이 안 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박정희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독립운동가와 그 일족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폄하했다.#[11]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재임 기간이 두 번째와 첫 번째로 길다. 또한 보수, 우익 진영에서는 찬사와 고평가를,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비난을 받는다. 다시 말해 70년 현대사에서 절반가까이 재임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굵직한 행적을 남긴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5. 이승만과 개신교
생전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종파는 감리회였으며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12] 조선시대에 태어난 그는 그 시절 태어난 여느 사람들처럼, 과거시험을 공부하고 유학(儒學),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와도 친화성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고종의 전제왕권과 친러정책에 반대하여 만민공동회에서 고종이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입헌군주제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반역죄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13] 한성감옥 옥살이 당시 1901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원래 미국 선교사들과 만남을 가지던 시절에는 성경에 큰 관심이 없다가 감옥에 갇혀있고 나라의 앞날이 어두웠던 시절 마음이 힘들어 성경을 감옥으로 들여와서 읽기 시작한 뒤 감명을 받아서 개종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도 기독교 관련한 얘기가 잠깐 나온다. 정동교회에서 장로직[14] 을 맡으며 교회 내에서도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미국 기독교 사회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인들에게 105인 사건 등과 같은 일본의 한국교회핍박 사실을 알리며, 미국 기독교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거나 청중 강연을 통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
광복 후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개신교를 우대해주기 시작했고, 대한민국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제헌의회 개헌식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축사를 하거나, 목사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이 국회 시작 전 기도를 맡기도 했다. 이 후 취임식에도 매번 목사가 취임선서를 하기 전 기도를 했고,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했다.[15][16] 대통령직 사임 이후 하와이로 간 이후에는 하와이에 있는 한인기독교회를 다니다가 사망한 뒤 장례예배 등은 정동교회에서 치러졌다. 당시 장례는 전통 상여식 장례식과 개신교식 예배를 혼용한 형태였다.[17]
다만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이승만 외에도 개화기 이래 정치가, 지식인들 가운데 개신교인들이 많았다. 개신교를 통해서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 이후에 대립하기도 했던 김구[18] 와 독립운동기에 이승만과 협력, 갈등관계에 있었던 안창호 등도 개신교인이었고 정치적, 민족적으로 중요한 상황에 신앙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19]
6. 묘소
7. 선거 이력
8. 소속 정당
9. 여담
-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의 명필가로 평가된다. 이는 당연한 것이, 후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사실상 조선-대한제국을 살았던 사람이고, 어린 시절에는 한학(漢學)을 공부했었다. 이 때문에 서예에 익숙한 정도가 후대들과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취미로 즐긴 사람과 생활로 한 사람과는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평생 서예를 연마했기에 "명인"이라 불릴 만큼 글씨의 정교와 기교가 빼어나고 한자 뿐 아니라 한글과 영어 필체도 유려하고 필체가 굳세면서 부드럽다. 이승만은 영어에도 굉장히 능했지만 한문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그리고 글씨를 매우 길게 썼다.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필체가 반듯하여 의지가 강하고 인간적인 완숙함을 갖추고 있으며 원칙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성격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2006년 지인용(智仁勇)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 글씨로는 최대인 1억 5500만 원의 낙찰가로 경매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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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실, 구체적으로는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굳이 따지자면 왕가의 후손이긴 했지만 직접적인 왕실과는 멀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자신을 '프린스 리'라 소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걸 가지고 이승만이 거짓말로 사기치고 다녔다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외교독립론자였던 이승만은 현지의 지식인, 엘리트층들과 많이 만나고 인맥을 쌓으려 노력했고 듣보 동양국가 출신이라서 그렇게라도 해야 상대를 해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게 도움이 되었다. 외국에서 'prince'는 한국어의 '왕자'와 정확히 대응되는 단어가 아니라서 먼 왕손들까지 prince로 보는 체계가 없는 것도 아니며[25] , 이승만의 의도가 자신이 왕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일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공화국으로 시작되다 보니 황족, 왕족, 귀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26] 아무리 동양인이라고 해도 일단 왕족쯤 되면 그래도 좀 달리 봤다고. 안익태도 아일랜드에 있을 때 "아이리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에 대해 "나라를 통치해 온 황제의 직계손인 '프린스 리'"라며 '왕손'의 의미로 프린스라는 호칭을 붙인 적이 있다.#
- 광복 이후 잔존한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매몰찼다. 조선의 궁궐, 종묘 같은 국가 시설은 차치하더라도 의친왕의 사동궁이나 운현궁 같은 일종의 사유 재산마저 국고로 환수하려 했고 실제로 일부는 성공했다. 8세 때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해방 때까지 환국하지 못했던 영친왕이 맥아더와 회담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나 한국행을 논의하고자 했지만 냉대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본국으로 오려거든 오시오."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말년의 순정효황후 윤씨[27] 는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군의 원조로 피난했는데, 휴전 후 이승만의 지시로 창덕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릉 수인재(修仁齊)[28] 에서 기거해야 했다. 이승만은 본인이 전주 이씨 왕가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은 있었으나, 조선을 말아먹은 황실 자체에 대해서는 대단히 싫어했고 독립운동 시기부터 그는 공화국 신봉자였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에 대해 좋게 생각할 일이 없었다.
-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만나는 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아이젠하워는 미군 장병들을 위로하러 온 것이라 원래 계획에 없던 이승만을 만날 생각이 없었고 이에 환영 군중대회에 각료들까지 준비해놓고 기다렸던 이승만은 망신을 당할 처지였다. 이에 백선엽이 한미 양국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겨우 회담을 주선했다.
- 손 끝에 입김을 후후 부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고종 퇴위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각종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 이승만이 1904년 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갈 때 선교사들로부터 추천서를 무려 19통이나 받았다고 한다.[31] 1905년 2월,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의 학업을 인정 받아 조지 워싱턴 대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1907년 6월 5일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07~190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1908~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렇게 빠른 시기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한다는 것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지만, 당시의 학위 과정이 지금과 같다고 생각할 순 없을 것이다.
-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81세의 나이였고, 1960년 퇴임 당시 85세[32] 로, 대한민국 대통령 사상 최고령 대통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최초 취임 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74세였던 김대중이 최고령이다.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나이가 73세였다.
- 제1공화국은 거의 모든 화폐에 이승만이 실렸고 화폐의 이승만 초상화가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로 오른쪽으로 옮기던 시절이었다. 현행 원화 지폐도 그렇거니와 화폐의 인물 초상화는 원래 왼쪽에 두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왼쪽이 있으면 좌익이라는 이유로 1956년에 가운데로 갔고, 사람들이 지폐를 반으로 접고 다녀서 자기 얼굴이 해지는 데 불만을 가져 1년만에 오른쪽으로 다시 옮겼다.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간 뒤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지폐 모델로 쓰지 않고 죽은 지 오래된 위인들을 쓰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존칭을 '박사'라고 불러주길 바라던 인물을 실은 지폐답게 이 지폐 시리즈는 각각 '좌이박', '중앙이박', '우이박'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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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후 운현궁이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인정받아 사유재산화 되면서[33] 관저로 쓰지 못하게 되자, 그 대가로 이우 왕자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운현궁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등의 무례를 범했다.#
- 조선 시대에 과거시험을 본 적이 있으나 낙방했다. 이것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이었고 이후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게 된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시험의 폐단을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같은 반공주의자이기도 했고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 사용을 주장할 정도로 북진을 할 생각이 있어 이승만과 죽이 잘 맞았다. 이 외에도 맥아더가 이승만을 대할 때, 서양인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동양인을 아랫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할 때처럼 공손하게 대하고 같이 식사를 할 때도 맥아더가 이승만의 식기를 먼저 챙겨주거나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승만의 얘기도 잘 들어줬다고. 맥아더가 GHQ라는 수완을 발휘한 것과 같이 볼 때 그의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34] 그래서 맥아더가 UN군 사령관에서 잘렸을 때 이승만은 매우 아쉬워했다.
- 월튼 워커의[35] 후임으로 온 매튜 B. 리지웨이는 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의 압록강 재진격 금지, 현 상황 유지 방침[36] 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을 빚었다. 리지웨이의 성격도 이승만 앞이라고 말을 가려 하거나 하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불편해 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자서전인 '군과 나'에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리지웨이 사령관에 대해 "좀 버릇없는 친구였어"라고 평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과는 사이가 좋았다. 리지웨이와는 달리 그는 압록강 재진격에 찬성했고 여러 차례 전선을 북상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37] 한국군 정예화에도 힘 썼다.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은 진정한 장군은 밴 플리트 밖에 없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밴 플리트도 이승만에 대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애국자 중 한명이다'라고 높게 평가했고 그의 회고록에서도 이승만을 높이 평가했다.
- 미국이 1차 대전 징집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 1918년에 작성된 징집카드[38] 에 자신의 국적을 일본(Japan)이라고 기재한 것이 발견되었다.# 다른 미주 한인들의 90%는 징집 카드에 한국(Korea)으로 적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반(反) 이승만 성향의 사람들은 "이승만의 친일성향으로 미뤄 볼 때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그 카드에 Korea라고 적어서 특별히 손해 볼일도 Japan이라고 적어서 특별히 이득 볼일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긴 힘들고 이승만은 애초에 친일성향도 아니다.[39] 이승만은 미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 일본은 물론 미국으로도 귀화한 적이 없었고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로 살았다.# 그리고 1933년 뉴욕 입항 기록을 비롯한 이승만의 다른 문서와 기록들에는 한국(Korea)이라고 기재한 문서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한국 항공 역사의 기념비적인 민간 여객기가 바로 그의 호를 딴 '우남호'다. 우남호는 한국 최초의 항공 노선에 취항했고 한국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기도 했다. 1971년 퇴역후 인하대학교에 기증되어 현재 인하대 캠퍼스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은 인하대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 백범일지는 이승만 정부 시기에 금서로 지정되었다.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때 출정식을 하는 축구팀을 배웅해주며 "만약 (한일전에서)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하네." 라고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한일전은 승리했지만 본선에 진출해서는 헝가리에게 0-9, 터키에게 0-7로 패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
-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때에는 리승만으로 불렸다. 당대의 선거 포스터를 봐도 이승만 본인도 리승만이라고 불렀던 것에 별다른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북한이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 한때 경기도 성남시의 도로명에 그의 호를 딴 '우남로'가 있었다가 헌릉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해당 도로에 지어지는 서울 지하철 8호선 역의 가칭도 우남역이었지만 여러 논란 끝에 그냥 역명이 확정될 때까지 8호선 추가역으로 부르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다만 우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아파트가 해당 역 인근에 생각보다 꽤 있다.
- 임시정부 초창기에 대통령(president) 직함을 사용하는것에 집착했던 것이나 곽영주가 '옥체'라든지, '~옵니다' 등 왕에게나 쓸 용어를 사용하자 좋아했던 것을 보면 원래부터 외형적인 직책/직위를 중시했던 인물이 아닐까 하는 분석도 있다. 이승만이 대통령 시절에 자신을 칭할 때 '짐'이라고 했다는 썰이 있는데 그건 아니고 자신을 '이승만'이라고 3인칭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특징이긴 했지만 워낙 옛날이기도 했고, 이는 현대에도 경우에 따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예를들면 문재인도 '저 문재인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으며 도널드 트럼프 같은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창기 때 대통령 직함에 집착했다는 것은 약간의 오해가 있는게, 당시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수장인 '집정관총재'였는데 이걸 영어로 번역할 적절한 표현이 'president'라고 생각하여 영어 명칭만 president'라고 썼던거지 한국어 명칭으로는 '집정관총재'를 그대로 썼다.
- 이승만은 박사 학위를 1910년에 받았으나 논문이 책으로 출판된 것은 1912년이었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정책 상 학생들은 자신의 논문을 100부 이상 출판해야 했는데 이승만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출판 비용을 대지 못해서 제때 출판하지 못하고 1912년에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 제1차 이승만 시 공모전 사건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시 공모전 세로드립 사건 문서로.
-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중에서 자신이 이승만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면 헛소리로 생각하자. 양자로 들인 이인수 박사는 양녕대군파 중에서 이승만 아들 항렬에 해당하는 자손이지만 사실 이인수 박사는 양녕대군파 중에서 자신과 같은 항렬[40] 대의 사람들 중에서는 이승만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2남 장평도정의 후손이고 이인수는 적2남 함양군의 후손이라 실제 촌수는 33촌이기 때문이다.[41] 현재 양녕대군의 후손들은 이승만과 아무리 가깝다고 한들 최소 12촌[42] 에서 20촌 사이이고 대부분 양녕대군의 후손들은 30촌이 넘어갈 정도로 촌수가 멀기 때문에 결국 이승만과 가장 가까운 부계는 사실상 없다. 참고로 이승만의 누나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43]
- 이승만의 연설 장면[44] 을 찍은 사진이 짤방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된 사용법은 뭔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적어놓고 후술할 짤을 첨부하는 방식. 아무래도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서울 시민들을 속였다고 하여 거기에 빗대어 역설적으로 거짓말임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레바의 트위터 글이 있다. 이 외에도 몇가지 더 있다. 실제론 이승만은 저런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문서로.
- 이승만이 박사 과정에 있을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은 훗날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행정학자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이었는데, 윌슨은 이승만을 아끼고 좋아했다고 한다. 윌슨은 흑인은 열등인종이라 말했던 노골적 백인 우월주의자였는데 아시아인은 그리 안 본 모양이다.[45] 항상 이승만을 미래 조선의 지도자가 될 거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프린스턴 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스쿨'에 '이승만 홀(Syngman Rhee·1910 Lecture Hall)'이라고 하는 대형 강의실이 있다. 이승만의 박사 학위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박사 학위인데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박사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이승만 박사"라고 되어있다.[46][47]
- 아마도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장기간 활동한 인물일 것이다. 첫 등장이 1896년 독립협회이며, 마지막 등장이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퇴진이니, 무려 64년간의 활동이 소개된다. 심지어 독립협회 시절은 대한제국도 성립되기 전이니,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미군정)-대한민국을 거쳐 왔다. 근현대사 교과서의 대단원 구분이 '개항기-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구분되는 걸 보면 사실상 모든 단원에서 이승만을 한 번씩은 보고 가게 된다. 사실 생존 시기가 더글러스 맥아더[48] 와 겹친다.
-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인 빌리 조엘의 We Didn't Start The Fire에서 언급되는 영광(?)을 누렸다.
- 어쩌다 보니 남한이 아시아 대륙에서 거의 유일한 자유진영이 되었다며 이렇게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 이승만 정권 아래서 여러개의 동상이 전국에 설치되었는데 4.19 혁명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다. 배재학당 시절에 졸업한 배재대학교에 이승만 동상이 있는데 철거 논쟁에 휩쓸리고 있다. #
10. 어록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이승만의 유언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
그의 1901년 4월 19일자 제국신문 논설
전국을 통틀어 양반은 1000분의 1도 못된다. 나머지 999는 모두 그 양반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실로 나라에서는 1000분의 999는 다 잃어버리고 앉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는 콜레라[50]
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우리는 우리 집 종들이나 남의 집 하인배들, 낮고 천하게 여기는 부인과 여자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어린아이들을 다 한층 올려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사람의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속한 물건으로만 알던 모든 악습을 버리고, 국법과 올바른 도리 앞에서 그들을 모두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하여 따로 서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국민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책 "독립정신" 中
모든 정치제도의 성패는 항상 그 나라 백성들의 수준에 달려있다. 굽어 자란 나뭇가지는 갑자기 펴지 못하고, 앉아서만 자란 아이는 하루에 멀리 가지 못한다.
몇 백년 압제 아래에서 굳어져 있던 백성들은 그 압제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만약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접하라고 하면 윗사람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조차도 반대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치제도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있으니 백성들이 그런 풍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 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배신을 일삼는 일인들은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정복하고자 하였소.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경제구조를 엄청난 규모로 구축해 주었고, 그래서 일부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 중에는 일본만큼 대단한 지원을 받으려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농담을 할 정도라오.
대일 미국 원조와 일본경제의 급속한 부흥에 대해 분개하며 남긴 1951년 4월 25일자 메모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권리만 주장하고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다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 오히려 권리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선원들이 술에 취해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눈이 멀고 팔이 부러져서 배를 움직일수록 위태롭게 만들어 물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이 배의 선객들은 구조하는 일을 남에게 미뤄두고 무심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선객들은 남이 건져주기를 바라지 말고 선원들에게 버려두지도 말고 각자 자기 일로 생각하고 자기 힘을 다해야 한다.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은 곧 2천만 생명을 싣고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이 몰아치는 큰 바다를 외로이 나가는 배와 같다. 우리는 지금 당장 물에 빠져가는 배 안에 앉아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한다.
그의 저서 "독립정신" 中[52]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11. 관련 자료
이승만은 1800년대 후반부터 신문 발행에 참여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생애 동안 여러 저서와 논설 등을 남긴 바 있다. 그래서 아래에 대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019년부터 이승만 전집도 차례로 발간되고 있다. 동시대 다른 인물들의 전집 발간이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완료된 것과 달리 이승만 전집 발간은 뒤늦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이화장에 있던 방대한 분량의 이승만 관련 자료들이 1990년대 중반 이후에서야 학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11.1. 본인이 저술한 저서
- 이승만 일기#
이 후 아래의 책들은 이승만에 대한 주요 서적들이며 이외에도 이승만을 다룬 책과 연구 논문들은 무수히 많다. 다만, 아직까지 만 90세를 살았던 이승만의 생애에 대해서 세밀한 연구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이승만 전집발간사업 조차 2016년부터 시작되었고, 이승만과 관련된 자료들에 대해서 치밀한 고증을 한 연구는 많지 않은 편이다. 이승만에 관한 책들이 많은만큼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기 때문에, 1차 자료에 근거해서 학자에 의해서 전문적으로 수행된 이승만 연구 저서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기를 바람.
11.2. 전문가들의 저서
실제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이 쓴 책이다.
▲ 유영익의 저서
-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 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 (학술서적)
-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학술서적)
-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교양서)
▲ 고정휴의 저서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학술서적)
▲ 서중석의 저서
-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학술서적)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교양서)
▲ 오영섭의 연구
-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1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간행과 자주독립론」 『한국사학사학보』 22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치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학술논문)
▲ 이정식의 저서
- 이정식, 『이승만의 청년시절』 (학술서적)
-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학술서적)
▲ 정병준의 저서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학술서적)
▲ 손세일의 저서
-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전 7권) (교양서)
▲ 공저
- 송복 외, 『저서를 통해 본 이승만의 정치사상과 현실인식』 (학술서적)
- 유영익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술서적)
- 김영호 외, 『이승만과 6.25전쟁』 (학술서적)
- 최상오, 홍선표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 (학술서적)
- 유영익 외, 『이승만 연구』 (학술서적)
- 오영섭, 홍선표 외,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학술서적)
- 이주영 외,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 (학술서적)[56]
11.3. 비전문가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원제: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원서
이승만의 정치고문이던 로버트 올리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가 1954년에 미국에서 낸 책으로, 해당 저서는 관변 입장을 제외한 이승만 옹호론의 뿌리이자 선구격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2002년에 황정일이 번역하여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냈다.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서적정보
김인서 목사가 1963년에 쓴 책. 2016년에 비봉출판사에서 다시 출판했다.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전 2권)
언론인 이한우가 1995년 신정부터 12월 26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을 묶은 도서로, 연재 시기가 광복 50주년을 맞는 해인지라 '이승만 신드롬'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학계 등지에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 깨기:이승만에 씌어진 7가지 누명서적정보
저자는 남정욱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류석춘[57] 연세대 교수.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라이트 인사들이 2015년 11월 출판하였다. 한강철교폭파와 같은 민감한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서적정보
저자는 참여정부 시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고 오마이뉴스에 정치,역사 글을 연재하고 있는 언론인 김삼웅. 2012년 9월 출판.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이다. 그 외 김삼웅이 쓴 인물 평전이나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책에서는 이승만 개인과 정권이 비슷하게 비판받고 있다. 역사전공자가 아님에도 2010년 이후로만 30명이 넘는 근현대사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며 거의 공장처럼 찍어내고 있다.
▲이승만의 네이션 빌딩서적정보
저자는 조선일보 출신의 언론인 김용삼.[58] 2014년 6월 출판. 이승만의 국가건설 과정에 대한 책이다.
▲이승만의 대미투쟁상하 (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저자는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승만과 주고받은 서한, 전보 등 원사료 중심으로 쓰여져 있으며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입안자들과 벌여온 투쟁을 보여준다.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서적정보
저자는 하와이 한인 이민사에 대해 중점적으로 책을 쓰는 이덕희. 2015년 7월 출판. 이승만의 하와이에서의 활동을 추적해 연구한 책이다.
11.4. 다큐멘터리
- 초대대통령 이승만 (2011, KBS1): 총 2부작으로 구성됨.
12. 대중매체에서
12.1. 단독 작품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1959)
이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1968년에는 영화제작자 김상윤이 조긍하를 감독으로 맡겨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했는데, 이기붕 역은 장민호, 조병옥 역은 박노식, 최인규 역은 허장강, 박마리아 역은 김지미, 이발사 역은 김희갑 등이 각각 맡았다. 당시 일반인 최용한이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았으나 얼굴이 제대로 안 나왔다. 초기에는 공보부로부터 데모 장면 등 일부 수정 지시를 받았긴 해도 정부는 청와대를 촬영 장소로 제공하고 이기붕 자살 장면까지 실제 이기붕 자택에서 찍게 하는 등으로 배려하면서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영화 개봉 하루 전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로부터 서울 국도극장에 걸린 간판이 뜯어졌고, 이에 김상윤은 문화공보부에 수차례 상영 허가 요청을 한 후 문공부 측의 지시에 따라 몇몇 내용을 개작했지만 1971년 문공부 측은 영화진흥공사로 하여금 융자금 540만원을 주는 한편, 필름을 강제로 압수하면서 상영이 아예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제작자 김상윤은 늘어나는 빚과 정신적 충격 등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1975년에 뇌출혈 투병 중 숨졌고, 차남도 1979년 4월 청와대에 호소하려다 경비경찰에게 구타당해 정신이상을 앓는 등 가정이 풍비박산나기도 했다. 이에 아내 홍정순 등 유가족들이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10여년간 호소한 끝에 1987년 6.29 선언 뒤 이듬해 상영허가를 얻어 1989년 9월에야 서울 명보극장에서 추석 특선 프로로 처음 개봉됐지만, 이미 관심이 사라져 흥행을 못했다. 2000년에 유가족이 이 영화 제작행위와 관련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민보상위)'에 민주화운동 보상금 신청을 했으나 2001년과 2007년에 각각 2번 기각됐다가, 2013년에야 직권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보상은 2013년에 법원에서 손해배상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해당 영화는 2016년 12월 20일에 tbs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2002년 오마이뉴스 기사, 2012년 일요신문 기사)
- 2014년에는 코미디언 출신 영화제작자 서세원이 전광훈 목사 등의 후원을 받아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만드려고 했으나, 정치성 논란 등에 시달리다 2015년에 중단됐다.
12.2. 담당 배우
[image]
- 영상물 역사상 최초로 이승만 역을 맡은 배우는 1959년 신상옥 감독 작품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에서 젊은 시절의 이승만 역을 맡은 배우 김진규다. 1959년작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에선 방수일이 연기했다.
- 1968년에 만들어진 영화 <잘 돼 갑니다>와 1973년작 <광복 20년 백범 김구>에서 이승만과 외모가 비슷한 일반인 최용한이 이승만 역을 맡았다.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민지환이 연기했으며, 1998년작 SBS <삼김시대>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역대 이승만 전문배우 중 배역을 잘 소화한 배우로는 역시 최불암이 첫손에 꼽힌다.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처음 맡은 이래, 거의 드라마 자체의 상징처럼 되었으며 1982년작 8.15 특집드라마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와 1987년작 <산하>, 1989년작 <제2공화국> 및 <독도수비대>, 1990년작 <반민특위>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올 정도였다. 그 특유의 스타일은 그 이후 이승만을 맡게 된 후배 배우들이 이승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최불암을 흉내냈다고 일컬어질 정도다.
- 1982년작 KBS1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과 1984년작 다큐드라마 <전쟁 6.25>, <휴전 6.25>에서도 등장하나, 배우의 성명은 불명이다.
-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는 배우 서인석이 이승만 역을 맡았다. 다만 드라마의 시대배경이 동학 농민 운동 이후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시기를 다루다 보니까 이승만이 2~30대때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것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 1985년작 KBS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신구가 연기했는데, 1991년작 <여명의 그날>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최정훈이 연기했는데, 1993년 <다큐멘터리극장>과 2004년작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등장했다.
- 1989년작 KBS2 미니시리즈 <무풍지대>에선 배우 하대경이 연기했는데, 같은 해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배우 김인태가 연기했다.
- 1991년작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선 배우 윤주상이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정욱이 연기했으나, 그가 2007년 다단계 사건으로 출연금지 처분받은 것 때문에 해당 드라마의 복사구매가 금지돼 있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권성덕이 연기했는데, 그는 이듬해 MBC 드라마 <영웅시대>,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특히 <야인시대>에선 종영 후 2010년대 들어 인터넷상에서 밈화돼 있고(이승만(야인시대) 문서 참고), <서울 1945>에선 장택상과 함께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그려졌는데, 방영 직후 양자 이인수와 장택상의 3녀 장병혜 등 유족들이 담당 PD 윤창범과 이한호 작가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2010년에 대법원은 '이승만이 여운형의 암살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장면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대법원 2007도8411)
- 2014년작 영화 <국제시장>에선 개그맨 정성호가 목소리 연기를 했다.
- 성우들 중 1967년에 방송된 DBS 드라마 <잘 돼 갑니다>와 TBC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에서 이승만 역을 깔끔히 소화해낸 구민이 알려져 있으며, 방송 당시 청취자들은 이승만 목소리가 실제 육성인지 구민의 연기인지 점심내기를 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MBC <격동 50년>의 박일도 선배 구민을 능가할 정도로 맛깔스럽게 대사를 구사했다. 동시에 이승만의 능구렁이같은 면도 세세하게 표현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미중년을 많이 맡았던 박일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준 연기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원조 이승만 전문성우 구민은 2001년에 미국으로 이민갔고, 박일마저 2019년 7월 31일 돌연사했다.
12.3. 대체역사물
구한말과 독립운동기를 다룬 대체역사물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주로 유능하지만 음흉하고 정치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명과 암이 뚜렷한 인물이다보니 댓글란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를 두고 항상 병림픽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능구렁이 같은 거물 정치인'이라는 이승만의 대중적 이미지 자체가 소설에서 써먹기 좋은 소재라서 주인공의 협력자나 라이벌로 많이 등장한다.
13. 각종 타이틀
초대 대통령인 만큼 뭘 해도 최초이니 너무 세세한 것은 적지 말 것.
- 최초이자 윤보선과 함께 둘 뿐인 조선시대 출신이자 19세기에 출생한 대통령
-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남은 대통령[59]
- 유일하게 과거시험을 본 대통령
- 최초의 40대 최연소 대통령임과 동시에 70대 고령 대통령
- 유일하게 80대에 재임한 대통령
-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
- 최초로 탄핵을 겪은 대통령
- 최초의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
- 현재[A] 까지 유일한 국회의장 출신 대통령
- 최초의 독재 대통령
- 최초로 임기를 끝내 마치지 못했던 대통령
- 유일하게 스스로 하야한 대통령[60]
- 두 대한민국의 초대가 된 대통령
- 현재[A] 기준 두번째로 장수한 대통령[61]
- 최초로 외국에서 사망한 대통령
- 현재[A] 까지 유일하게 외국인 영부인을 둔 대통령
- 가장 많은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 (10번, 경비계엄: 3번, 비상계엄: 7번)
- 기혼인 대통령 중에서는[62] 현재[A] 까지 유일하게 딸#s-1이 없는 대통령[63][64]
- 현재[A] 까지 유일하게 입양자녀가 있는 대통령
- 최초이자 박정희와 더불어서 유이하게 이혼 이후 재혼 경험이 있는 대통령[65]
- 최초이자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은 이북 출신 대통령[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