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시기'''
1584년 3월 ~ 11월
'''장소'''
오와리 이누야마성, 코마키 나가쿠테 일대
'''원인'''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와 도쿠가와의 대립.
'''교전세력'''
하시바 군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지휘관'''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츠네오키(死)
모리 나가요시(死)
<^|1>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츠
'''병력'''
20,000 ~ 40,000 명
10,000 ~ 16,000 명
'''피해'''
사상자 2,500 명 이상
사상자 550명
'''결과'''
하시바 군의 전략적 승리
'''영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국 지배 확립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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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小牧長久手の戦い'''. 1584년 3월부터 11월까지 하시바 히데요시[1]군과 오다 노부카츠,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이 격돌한 전투. 북부의 코마키성, 이누야마성을 중심으로 오와리 남부, 미노 서부, 미노 동부, 이세 북부, 기이 이즈미, 셋츠 곳곳에서 전투가 진행됐다. 동시에 이 전투와 연계된 싸움이 호쿠리쿠 시코쿠 관동에서도 일어났다.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우세를 점하면서 이에야스도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2. 배경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정치적으로 공백상태였던 카이, 시나노 등 舊 다케다 가 영지에 세력을 확장했다. 오다 가의 중신 카와지리 히데타카가 다케다가의 영지를 받은 상황이었으나 이에야스가 사주한 다케다 잔당의 잇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살해당했고, 다케다를 배신하고 영지를 보전했던 아나야마 바이세츠도 혼노지의 변 이후 영지로 귀환하는 길에 농민에게 살해당해, 바이세츠와 달리 운좋게 혼노지의 변에서 귀환한 이에야스는 아나야마 등의 다케다계 호족들을 쉽게 종속시킬 수 있었다. 이 당시 이에야스는 시즈가타케의 싸움 때 시바타 가쓰이에로부터 제안을 받긴 하였으나, 가쓰이에가 히데요시를 이길 가능성이 없다 생각하여 거절했다. 그렇다고 해서 히데요시의 편에 선 것도 아니라,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와 은밀히 손을 잡고 히데요시를 견제하고 있었다. 1584년 3월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에 반기를 들고 이에야스와 기요스 성에서 강화를 체결하였고 이것은 히데요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3. 전개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상대로 일전을 벌이게 되었고, 전투는 지구전으로 발전해 양측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이에야스는 코마키산(小牧山)에 진을 치고 맞서고 있었는데,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츠네오키와 그의 사위 모리 나가요시[2]는 이에야스가 없는 틈을 타 미카와로 진격하는 전략을 세워 히데요시의 조카인 미요시 히데쓰구를 대장으로 세우고[3] 공격을 개시했는데 이미 히데요시 군이 미카와를 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이에야스는 오히려 재빨리 이들을 뒤에서 추격하여 나가쿠테에서 이들을 '''전멸'''시켰다. 도쿠가와가 별동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가 이번엔 자신이 도쿠가와의 군대를 뒤쫓았으나 코마키산 본진에 남아있던 혼다 타다카츠가 소수의 기병대로 진군을 방해하였고 이에 이에야스는 자신있는 평지에서의 대회전을 통해 별동대를 박살날 수 있었고, 히데요시의 군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총대장 미요시 히데쓰구는 간신히 도망쳤고, 이케다 츠네오키와 적장자 이케다 모토스케, 사위 모리 나가요시[4]는 나란히 전사하여 이에야스에게 수급이 바쳐졌다.

4. 결말


어이없게 패한 히데요시는 이간책을 쓴다. 노부카츠의 중신 세 사람을 의심받게 해서 노부카츠의 진영에 자중지란을 일으킨 것. 결국 스스로 급해진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와 단독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노부카츠를 원조하기 위해 코마키에 주둔하던 이에야스도 더 이상 군대를 움직일 명분이 사라졌기에 군대를 이끌고 하마마츠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야스 본인은 히데요시를 쓰러뜨리고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5], 히데요시 역시 이에야스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자신의 여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에 시집보내 인척의 관계를 맺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까지 딸을 보러 이에야스를 방문하게 한다.
이후 이에야스는 둘째아들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 인질로 보내고, 자기도 오사카로 상경해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끝내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이에야스를 신종하게 만든 히데요시는 정국을 장악할 수는 있었으나 이에야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결국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즉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세우고 일본을 지배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한 전투라 볼 수 있다.
[1] 1586 년 도요토미 사성(賜姓)[2]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서브컬처쪽에서 유명한 모리 란마루의 형이다.[3] 이때 히데쓰구는 아직 전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대장이었고 지휘는 이케다 츠네오키가 맡았다. 당초 이케다가 전략을 제시할때 거절당할 것을 걱정하여 공로가 필요하던 히데쓰구를 앞세워 히데요시에게 어필한 것.[4] 당시 도쿠가와군의 선봉 역시 도쿠가와의 사위인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였다. 사위에는 사위로 대적했다고..[5] 노부나가가 죽었을때 이에야스는 70만석이었는데 재빨리 가이와 시나노를 장악하여 150만석까지 석고를 늘렸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세력을 수습해서 '''600만석'''이 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두번 전술적으로 이길 수 있으되 물량 앞에서 장사 없다는 것을 이에야스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