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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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Κωνσταντῖνος Δ', Kōnstantinos IV
라틴어 Flavius Constantinus Augustus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이슬람 제국과의 투쟁
2.4. 불가르족과의 전쟁
2.5. 최후
3. 참고자료

생몰 652년 ~ 685년 9월 14일
재위 668년 9월 ~ 685년 9월 14일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와 파우스타의 아들로 3살 때인 654년부터 공동 황제에 옹립되었다가 668년 아버지가 살해된 뒤 정식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해 단의론을 폐기하고 단성론 신봉자들을 파문하는 것으로 수십년에 걸친 교리 논쟁을 어느 정도 잠재웠다. 그러나 불가르 족에게 대패해 그들이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하는 걸 용인해야 했고 685년 33살의 나이에 이질에 걸려 요절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콘스탄티노스는 652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스 2세와 파우스타의 장남으로, 654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황제에 봉해졌다. 이후 아버지가 이탈리아의 사라쿠사에 장기간 머무르는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업무를 관장할 책임을 맡았다. 물론 그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파우스타가 섭정을 맡았다. 668년 콘스탄스 2세가 암살되자, 그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과제는 아버지를 살해한 시칠리아의 메제시오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황 비탈리아노의 지원에 힘입어 반란을 7개월 만에 진압했다.
669년, 소아시아의 한 부대가 수도를 향해 진군하면서 콘스탄티노스에게 두 동생을 공동 황제로 옹립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하늘이 삼위일체에 의해 통치되므로 지상도 그래야 한다는 기묘한 논리를 제시했다. 콘스탄티노스는 그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논의를 해보자며 궁전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그들은 궁전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체포되어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갈라타 교외의 교수대에 내걸렸고 사람들은 콘스탄티노스에게 복종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두 동생의 코를 잘라버림으로써 다시는 자신의 제위가 위협받지 않도록 했다.

2.2. 이슬람 제국과의 투쟁


668년, 칼리프 무아위야는 아르메니아의 군 사령관인 사보리우스로부터 자신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도와달라는 요청을 접수했다. 그는 아들 야지드에게 즉각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야지드는 칼케돈에 도착하여 동로마 제국에게 메우 중요한 요새 중 하나였던 아모리온을 점령했다. 뒤이어 이슬람 군대는 669년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670년, 이슬람군은 시지쿠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를 세웠다. 또한 그들의 함대는 672년 스미르나와 다른 해안 도시들을 점령했다. 콘스탄티노스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사이, 슬라브족은 테살로니카를 포위했다.
672년, 이슬람 함대는 헬레스폰트를 지나 마르마라 해로 들어와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해로로 불과 8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시지쿠스 반도에 주둔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674년, 이슬람 함대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그들은 육중한 공성기와 거대한 투석기를 싣고 와서 성벽과 방어 병력을 한꺼번에 포격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마라에서 황금뿔 지대까지 늘어서 있는 요새들은 적의 공세를 훌륭하게 방어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의 불이 등장한다. 이 무기는 워낙 비밀이 잘 유지돼서 오늘날까지도 그 정확한 성분을 알지 못하고 단지 물로 끄면 더 잘 번진다는 기록을 근거로 석유화합물 종류로 추측될 뿐이다.[1] 동로마 제국군이 이 무기를 사용하자, 이슬람군의 함대는 화염에 휩싸였고 배에 탄 병사들은 살기 위해 앞다퉈 바다로 뛰어들었다.
675년 봄, 이슬람 함대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이슬람군은 678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육로에서 그들을 돕기로 했던 마르다이트족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패배한 칼리프 무아위야는 679년 콘스탄티노스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점령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반환하고 황제에게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금 3천 파운드의 공물을 보내기로 했다. 그 후 무아위야는 1년 뒤 사망했다.

2.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콘스탄티노스는 이라클리오스 때에 제기된 단의론으로 인한 교회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678년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공의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예비 공의회를 소집해 서방 교회 교부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걸 확인한 뒤 황제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이리하여 680년 11월, 제6차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전 지중해권에서 174명의 대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는데, 특히 이탈리아 대표단은 특별한 환대를 받았다.
공의회는 열 달에 걸쳐 18차례 열렸다. 콘스탄티노스는 그 중 처음 11차례와 마지막 회기에서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그는 회의 내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교부들이 마음껏 의견을 개진하도록 배려했다. 681년 9월 16일에 열린 최종 회의에서, 그는 만장일치로 결정된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위격적으로 서로 혼합되지 않고,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완전히 결합되고 일치한다"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단의론자들을 거슬러 "신적이고 인간적인 두 힘 또는 의지 역시 서로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은 채 일치되어 있다"는 교의를 확정했다.
또한 단성론자와 단의론자는 파문되었는데, 개중에는 단의론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던 전 교황 호노리오도 포함되었다.
회의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황제가 최종 연설을 마치자 갈채를 보냈고 그를 세계의 빛, 또 다른 콘스탄티누스 대제, 또다른 마르키아누스, 또다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모든 이단의 파괴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그러나 단성론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고, 이후로도 수백 년간 제국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2.4. 불가르족과의 전쟁


이슬람군을 격퇴한 뒤, 콘스탄티노스는 발칸 반도의 제국 영토를 잠식해가는 불가르족을 공격하기로 했다. 680년, 황제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이끌고 보스포루스를 거쳐 흑해로 들어가 다뉴브강 삼각주 바로 북쪽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그런데 그는 사전에 척후병을 보내지 않아 이 지역이 늪이 많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조직적인 행군을 하지 못했고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급기야 콘스탄티노스는 통풍에 걸려 인근의 메셈브리아로 가서 며칠 쉬었다. 그런데 돌연 황제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자 병사들이 겁먹고 도주했다. 불가르족은 이 틈을 타서 추격하여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까지 진격하여 제국군 병사들을 학살했다.
다뉴브강 이남으로 진군한 불가르족은 여세를 몰아 일곱 개의 슬라브 종족을 손쉽게 정복하고 불가리아 왕국을 세웠다. 황제는 앞서 입은 뼈아픈 패배 때문에 당장 불가르족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공물을 바치고 불가리아 왕국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불가리아 왕국과 동로마 제국은 수백 년에 걸쳐 대립하게 된다.

2.5. 최후


685년 9월 14일, 콘스탄티노스는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33세. 사후 그의 장남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즉위했지만, 얼마 안 가서 동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한 사람이 된다.

3.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과학자들은 뼈와 석회, 오줌을 섞어 가열해 만든 인화칼슘, 또는 자연적으로 분출된 석유 화합물을 사용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