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스 2세

 


그리스어 Κώνστας Β', Kōnstas II[1]
라틴어 Heraclius Constantinus Augustus or Flavius Constantinus Augustus
1. 개요
2. 치세
2.1. 아랍인과의 혈투
2.1.1. 마스트 전투 (돛대 해전)[2]
2.2. 슬라브 정책
2.3. 아르메니아
2.4. 동생에 대한 의심
2.5. 교황을 유배보내다
2.6. 이탈리아 원정
2.6.1. 옛 로마 방문
2.7. 죽음
2.8. 중국과의 외교
3. 여담
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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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630년 11월 7일 ~ 668년 9월 15일
재위 641년 9월 ~ 668년 9월 15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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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제국의 침공을 온몸으로 막아내려 했던 황제'''
이라클리오스의 첫째 아내 에우도키아의 장남인 콘스탄티노스 3세와 그레고리아의 아들이다. 이 해 641년은 황제만 무려 4명, 즉 교체가 3번이나 있었던 혼란의 정국이었다. 이슬람이 마수를 뻗쳐오는데 집안 싸움을... 어쨌든 집안 싸움의 내용은 콘스탄티노스 3세 참조. 또한 만 11살도 안 된 꼬마가 직접 제위를 쟁취할 리는 없었을 테니, 추대해 준 조력자가 있었던 것인데, 발렌티노스라는 동부군 사령관으로서 아버지의 몇 달 안 되는 치세 동안 새로 부임한 아버지의 측근이었다. 하지만 야심을 품어 딸을 이 아들 콘스탄티노스에게 결혼시키는가 하면, 2년 뒤 공동황제위[3] 혹은 제위 자체(즉 찬탈)[4]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다가 빡친 수도 시민들에게 살해당했다.(...)
무슬림 군대에게 빼앗긴, 알렉산드리아를 위시한 이집트를 회복하려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다만 1차 피트나[5]을 틈타 아르메니아를 회복하였다. 이후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을 복속시켰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랑고바르드족 국가인 베네벤토 공국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는 무려 두 세기만에 로마 시를 방문한 동로마 황제였고,[6] 중국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몇 안 되는 황제 중 한 명이다.

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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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27년의 치세

2.1. 아랍인과의 혈투


642년, 라쉬둔 칼리파(정통 칼리파)의 아랍 군대가 이집트의 마지막 동로마 거점인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다. 645년에 제국 해군이 알렉산드리아를 탈환했지만,[7] 이듬해에 쫓겨났다. 645년에는 아르메니아, 647년에는 카파도키아를 침략당했으며, 아프리카 역시 648년에 공격을 받았다. 근데 차라리 다행이었던 점은 646년에 이미 아프리카의 총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침 아랍인들이 때맞게 쳐들어와서 총독의 지방군과 싸워 총독이 죽고, 그 총독의 측근 내지는 후계자가[8] 아랍군과 적당히 협상한 후 반란을 멈추고 제국에 다시 충성의 의지를 밝혔다. 어쨌든 그리고 아랍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에까지 진출하여 648년에 프리기아를 침공하였고, 해군을 조직하여 649년에는 크레타 섬을 습격하였다. 650 - 651년 아랍 군대는 킬리키아이사우리아 등 소아시아 남부를 유린하였고, 콘스탄스는 시리아의 총독 무아위야와 협상, 황금을 바치고 휴전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 서부를 보전하였다.

2.1.1. 마스트 전투 (돛대 해전)[9]


하지만 654년, 무아위야는 이번에는 해상으로 침공을 개시하여 로도스 섬을 유린하였다. 이에 콘스탄스는 '''직접''' 대함대를 이끌고 근해에서[10] 맞섰는데, 마스트 (돛대)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5백여 척의 동로마 선박이 침몰하였으며, 황제 본인도 옷을 부하와[11] 서로 바꿔입고서야[12] 겨우 몸을 내빼었을 정도였다.[13] 지명도가 높지는 않지만 그것에 비해 규모도 컸거니와 함의 또한 컸던 것이, 낙타 끌고 다니던 상인 유목민이었던 아랍인이 이제는 수백년간 로마의 바다였던 '''지중해상의 해전'''에서마저 황제가 친정하는 로마군 해군을 꺾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 아랍인이 항해술을 배웠거나 해전에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점령지의 이미 물에 익숙했던 이집트인(불과 얼마 전까지 로마인) 부대를 활용한 거였긴 하지만.[14] 칼리파 우스만은 이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자 하였으나, 656년에 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가 발발하며 무산되었다.

2.2. 슬라브 정책


아랍 군대의 침공이 뜸해진 틈을 탄 콘스탄스는 발칸 반도에 침투해 온 슬라브 족을 격파하고 649 - 667년에 걸쳐 아나톨리아 국경 지대에 정착시켰다.

2.3. 아르메니아


645년, 제국의 지원군이 아랍 군대에 패배하자, 아르메니아의 토후들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들여 이르미니아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654년에는 더욱 나아가 아르메니아의 전역이 이슬람 아랍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659년, 메디나에서 4대 칼리파 알리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낙타 전투가 벌어지자, 동쪽으로 진군한 콘스탄스는 무아위야에게 연공을 받는 동시에 아르메니아를 동로마 측이 회복한다는, 매우 유리한 조건의 평화 조약을 맺었다. 아르메니아는 특히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었을 것으로 여겨진다.[15]
역사가 워렌 트레드골드에 의하면, 이 평화조약 이후인 659 ~ 661년에 최초의 테마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2.4. 동생에 대한 의심


한편, 콘스탄스는 동생 테오도시우스가 제위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에게 그러지 않을 것을 맹세시켰으나 그럼에도 미덥지 않았는지 결국 660년에 처형을 명하였다. 그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민중들은 콘스탄스로부터 등을 돌렸다. (정말로 테오도시우스가 역모를 꾀했는가에 대한) 진실은 역사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2.5. 교황을 유배보내다


한편, 콘스탄스 2세는 단성론과 타협해 기독교 신앙을 단일화하려 하였는데, 이에 교황 마르티노 1세가 649년에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반발하였다. 콘스탄스 2세는 라벤나의 총독 올림피오스에게 교황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불복하자 해임하고, 새로운 총독으로 테오도로스를 임명해 653년에 로마로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게 하였다. 교황 마르티노는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어 문책당하였고,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유배되어 655년에 사망하였다.

2.6. 이탈리아 원정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회복한 이탈리아 반도는 대제의 사후 랑고바르드족이 남하하며 라벤나 ~ 로마를 잇은 회랑과 나폴리 일대, 그리고 장화의 앞뒤굼치 부분만 동로마 제국령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동생 테오도시우스의 처형 이후로 수도의 민심이 콘스탄스를 외면하자, 황제는 660년 이후로 '''시칠리아시라쿠사'''로 궁정[16]을 이전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레 남부 이탈리아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663년에 콘스탄스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인 그리모알드 1세가 프랑크 왕국네우스트리아[17]에 있는 틈을 타 베네벤토 공국으로 출정하였다. 타란토에서 북진한 동로마 군대는 루체라를 함락하였으나, 수도인 베네벤토에서는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함락에 실패하고 나폴리로 퇴각하던 콘스탄스는, 카푸아 백작의 군대에게 습격당하여 패배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황제는 카푸아에 대한 공격을 명하였으나, 제국군은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롬바르드족에 패하며 또 한번 자존심을 구겼다.

2.6.1. 옛 로마 방문


기분이 상한 콘스탄스는 663년 말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중 처음으로 옛 로마를 방문하였다. 교황 비탈리아노의 따뜻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판테온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의 장식이나 청동을 떼어다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었다.[18] 666년, 콘스탄스는 교황의 라벤나 대주교에 대한 간섭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황제 본인이 임명하는 총독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콘스탄스는 사르데냐, 칼라브리아 등지를 순행하며 로마에서 했던 짓을 반복하였고 연공을 강요하는 등 정복자처럼 굴어 이탈리아인들 의 분노를 샀다.

2.7. 죽음


668년, 콘스탄스 2세가 제국의 수도를 시라쿠사로 옮긴다는 소문이 커져 민심이 흉흉할 무렵, 시라쿠사 궁전의 지중해가 보이는 욕실에서 목욕 중이던 황제는 시종장[19]에게 바구니(...)에 맞아죽으며 암살되었다. 재위는 오래되었지만 워낙 어릴 때 즉위하여, 만 38세가 조금 못 되어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장남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스탄티노스 4세로 즉위하였고, 동시에 장군 미지지오스가 시칠리아에서 황제를 칭하였는데 이듬해인 669년에 제국군에 패하여 참수되었다.

2.8. 중국과의 외교


정관 17년(643년)에 불름국왕인 파다력이 적파리와 녹금정 등을 바치자, 태종이 옥새를 찍은 교서를 내리고 답장하여 위로하고, 꽃무늬를 수놓은 얇은 비단을 하사하였다.

구당서, 신당서

마지막으로 집정관(콘술) 직을 수행한 황제 (642년).[20] 구당서 및 신당서에 의하면 643년 경에 당태종에게 사절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이후 당고종 건봉 연간에도 당나라에 사절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된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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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인 포고나토스는 털복숭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동전에 세겨진 그의 모습은 산타할아버지급.

4.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그리스어로는 콘스'타'스 인 셈. 재위 당시 만 10살 밖에 안 되었으므로 수도시민들이 축약형 애칭(영어로 Jeffrey → Jeff라던가, Theodore → Ted라던가 등)으로 콘스탄티노스를 콘스타(탄)스라고 부른 것이 어느새 황제명으로 정착한 것이다.[2] 영어 위키백과 : Battle of the Masts [3]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의하면[4] 영어 위키백과에 의할 경우: Valentinus_'''(usurper)(찬탈자)'''[5] Fitna, 무슬림의 내전을 뜻하는 고유명사이자 역사적 용어[6] 하지만 후술하듯 삥만 뜯어서, 교황과 옛 로마 시민들로부터 환영받으면서 왔지만, 떠날 때는 저주받았을 것이다.[7]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8] 원래대로라면 총독직은 정부가 내리는 것이지, 자기네들끼리 물려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당나라의 절도사도 아니고... 하지만 반란+외적의 침입이라는 비상사태이니 누군가는 수습해야 하니까.[9] 영어 위키백과 : Battle of the Masts [10] 리키아 지방의 남해안, 지금의 안탈리아(아탈레이아) 근처[11] 이상하게 나무위키에는 없는 이야기인데, '온군해'를 찾아보면 나온다.[12] 연의의 창작이다. 하지만 같은 시점에서, 또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보았을 허저의 어마어마한 호위와, 조조가 탄 나룻배에 너도나도 타려고 입수해서 몰려드는 병졸들의 손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정사에 나오는 실화다.'''[13] <살아있는 로마, 비잔틴 제국> 혹은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둘 중에 하나는 확실한데 어느 것인지는...)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고, 또한 위의 영어 위키백과에도 'he managed to make his escape '''by exchanging uniforms with one of his officers''' '라고 나온다.[14] 위의 영어 위키백과에, 'the success of that campaign set the stage for the '''undertaking of naval activities by the Government of Egypt.''' '라고 나와있다.[15] 이라클리오스는 아르메니아계의 혈통이었다.[16] 수도 이전(천도)까지는 아니다. [17] 프랑스 북부, 파리 근교[18] 아랍인과의 전비 마련이 주목적이었고, 거기에 옛 로마에 있던 모든 것이 천도와 함께 새 로마(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야 한다는 먼 선대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빙의한 것이라고도 한다.(...)[19] chamberlin (체임벌린). 집사로도 번역된다. 환관 전용 직책이다. 아래의 참칭자 장군에게 매수당했다.(...)[20] 그전에는 황제들이 재위 시절 한 번쯤은 집정관직을 역임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몇 번씩 역임했고. 그만큼 공화정의 잔재가 희석되었다는 산 증거이다. 실제로 공화정이 끝난 지 '''600년'''이 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