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리아노
- 생몰년: 580년 9월 21일 ~ 672년 1월 27일
- 재위기간: 657년 7월 30일 ~ 672년 1월 27일
이처럼 동방과 서방이 일시적으로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분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근본적인 갈등과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가 표면화 될 일로 라벤나 교구가 로마 교구에서 독립하려 하자 콘스탄스 2세가 이를 지지하기도 했고, 663년 콘스탄스 2세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략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여 12일을 머무는 동안, 처음엔 이런 저런 선물을 증정했다가 본색을 드러내, 판테온을 온전하게 성소화 해야 한다며[2] 판테온은 물론, '''로마 시내의 청동 장식품을 다 떼어가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콘스탄스 2세는 이슬람으로 인한 외환 때문에 서방 교회와 겉으로는 평온하게 지내는 듯 했으나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로마 방문 후 극적인 사태가 일어나게 되는데 로마를 떠나 시칠리아로 건너간 황제가 수도를 시라쿠사로 옮기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 중 한 사람인 메제기오스 장군이 시종을 시켜 목욕 하던 콘스탄스 2세를 암살한 것이다. 황제가 암살당하자 비탈리아노는 메제기오스가 아닌 콘스탄스 2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4세를 지지하였고, 결과적으로 그가 제위를 계승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제위 계승에 비탈리아노의 도움을 받은 콘스탄티누스 4세는 보답이라도 하듯이 로마 교구에서 독립하려던 라벤나 교구가 로마 교구에 예속된다고 천명했으며, 동방 교회에 대한 위신도 강해 졌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를 완전히 정통 신앙을 받아 들이게 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한편 잉글랜드에 새로운 대주교로 테오도로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교회 음악에 파이프 오르간을 도입한 것도 비탈리아노 교황 시대 때부터였다고 전해진다.
비탈리아노는 672년 1월 27일에 선종하였으며, 유해는 오시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월 2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