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클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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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십자가를 가져오는 이라클리오스
'''휘'''
플라비오스 이라클리오스
(Φλάβιος Ἡράκλειος, 그리스어)[1]
플라비우스 에라클리우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Heraclius Augustus, 라틴어)[2]
'''생몰 기간'''
575년 ~ 641년 2월 11일
'''재위 기간'''
610년 10월 5일 ~ 641년 2월 11일
1. 개요
2. 황제가 되기까지
3. 막장제국
6. 전쟁의 끝
7. 말년: 새로운 전쟁
8. 평가
8.1. 공용어 전환 조치에 대하여
9. 창작물에서


1. 개요


가장 고귀한 신이며, 이 세상의 왕과 주인이며, 위대한 호르미즈드호스로의 아들이 천하고 무지한 노예 이라클리오스에게 고하노라.

너는 우리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군주라고 칭하고 있다. 너는 우리의 보물을 빼앗고 우리의 하인들을 속이고 있다. 도적 떼 같은 군대로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내 어찌 너희 '''로마인'''들을[3]

멸하지 않으리? 너는 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신은 어이하여 내 손에게 카이사레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빼앗아 가지 않느냐?'''…… 내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파괴하지 못할 줄로 아느냐?

호스로 2세가 622년경에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610~641년에 재위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창건자이다.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는 위기의 제국을 구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랍 제국의 흥성을 막는 데는 실패한 황제로, 이는 그 당대부터도 찬사와 비난이 교차했다.
한때는 고대 로마의 전통을 끝내고 중세 동로마 제국을 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현대 그리스에서도 이 견해를 지지하지만[4] 이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해가 미비했던 아주 과거의 견해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이 7세기 이후로 어떤 형태로든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띄게 된 계기를 제공한 황제임은 분명하다. 근래 사학계 저술에서는 서로마가 멸망한 것과는 관계없이 이라클리오스 전후 시기를 분기점으로 해서 그 전까지는 동로마에 대해서 '로마'라고 지칭하고, 그 이후부터는 '비잔티움'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실제로 제국이 범 지중해적인 패권국이었던 것은 이라클리오스 시기가 마지막이라서,[5] 범 지중해적인 패권을 잃고 나서는 (법통상으로는 여전히 분명한 로마이지만) 더 이상 '로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추락(?)해 버렸으며 성격 또한 다소 달라졌다고 보아[6] '비잔티움'으로 부르는 것이다.

2. 황제가 되기까지


이라클리오스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카르타고 총독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이라클리오스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총독(엑사쿠스, 영어로는 Exarch)[7]이었으며 황제 포카스[8]의 폭정이 심해지자 608년 제국의 곳곳을 다니며 2년 동안 반란 세력을 규합하고 마침내 610년 휘하 병력을 이끌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당시 포카스는 하나밖에 없는 사위마저도 의심하여 체포하려 들었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이런 황제 밑에서는 제국이 망할 게 분명하다 여겨 모든 귀족이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이라클리오스는 무혈입성하여 포카스를 폐위하고[9] 610년 황제로 등극한다. 이때 포카스를 붙잡은 이라클리오스는 그에게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라고 물었는데, 이에 포카스는 "그대가 나보다 더 잘 통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라클리오스는 크게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직접 포카스의 목을 베어버렸다. 처형당한 포카스의 시체는 여러 조각으로 잘려 사냥개들에게 던져졌다고 한다.

3. 막장제국


하지만 전임 황제 포카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면서 제국의 방위 체계를 모조리 망가뜨려 놓았던지라, 사산조 페르시아호스로 2세가 진격했을 때는 제대로 방어가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마침내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611년에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정복당하고, 613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만 안티오크에서 이마저도 격파당하며 다마스쿠스도 점령당하고, 614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빼앗겨 제국의 최고 성유물성십자가마저 빼앗긴다. 뒤이어 호스로 2세는 616년에는 이집트도 정복하고 61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 편의 칼케돈마저 정복한다. 619년에는 전염병까지 도는 데다가 거기다가 622년에는 로도스 섬마저 함락당하는 초유의 위기 상황이 되었다.
대단히 임팩트가 큰 이 상황 때문에 이라클리오스가 무력하게 영토를 잃고 있었다는 오해가 있었으나, 그에게는 남은 야전군을 끌어모아 회전에서 도박적인 승부를 벌이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일단 후퇴는 하더라도 시간을 벌어가면서 후퇴하는 대신 잔여 병력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622년, 영토를 절반 넘게 잃은 상황에서도 동방 방면 야전군들은 그래도 병력을 2/3 넘게 건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국 서쪽에서 슬라브아바르에게 호스로 2세의 페르시아군에게 입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어 일리리쿰군이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훗날 아랍인들과의 전투에서도 야전군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이 참사가 이라클리오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때문에 이래도 저래도 방법이 없겠다 싶은 이라클리오스는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하지만, 카르타고로 가려는 배가 악천후로 침몰한 데다가 총대주교의 만류로 생각을 고쳐 먹는다.

4. 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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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일전한 이라클리오스는 622년 이콘을 앞세워 군사들을 격려하고 성전을 주장하며, 교회에서도 많은 기부를 받아(하기아 소피아의 금까지도 벗겨가며) 돈을 충당하여 드디어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걸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비잔티움 연대기라든가... 또한 아예 이 견해가 책 제목에 들어간 단행본 외서도 존재한다.[10] 앞서 봤듯 이라클리오스가 그동안 했던 치밀한 준비를 보면 그렇게 아주 놀라운 기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으나, 이라클리오스에게 비범한 조직력과 장군으로서의 천부적인 자질이 함께 있었던 건 분명하다. 조직력이라면 몰라도 이라클리오스는 그전까진 야전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본인이 직접 군대를 통솔해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높이 사줄 만한 동시에, 제국에 다른 믿을 만한 장군이 없었다는 암울한 점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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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오스가 이끄는 군대는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아나톨리아를 위협하는 페르시아 군대를 어느 정도 처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623년 수많은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바르와 강화를 맺은 이라클리오스는 2만 명만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의 중심부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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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라클리오스는 계속 승리를 거둬 아르메니아의 수도를 점령하고 호스로 2세의 군대를 상대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유명한 조로아스터교 사원인 성화(聖火) Ādur Gušnasp의 사원을 부수는 등의 활약을 한 뒤 티그레니커트에서 페르시아의 세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놀라운 전과를 세운다. 625년 반 호수 북쪽에서 겨울을 보낸 이라클리오스는 빼앗긴 도시들을 수복한 뒤 아다나에서 황제가 직접 진삼국무쌍을 찍으며 트레비존드로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5.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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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로의 뚝배기를 깨는 이라클리오스. 그림을 잘 보면 ‘이라클리오스 대제’라고 쓰여 있다.
626년 호스로 2세는 아바르족과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다. 하지만 제국의 우월한 해군력에 아바르족과 페르시아의 해군은 궤멸당하고 공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이라클리오스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게 하고 하나는 동생[11] 테오도로스에게 주어 사힌의 군대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가장 적은 수의 부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격한다. 사힌의 부대를 상대한 테오도로스가 승리를 거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전투도 승리했는데다가 투르크족의 일파마저 끌어들여 페르시아를 공격하게 하니 황제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페르시아로 진격할 수 있었다.

6. 전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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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오스의 제국군이 니네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12] 궁전까지 약탈하게 되자 호스로 2세는 궁정 반란으로 축출된다. 부친을 몰아내고 새로운 샤가 된 카바드 2세는 동로마 제국에 화친을 요청하였고, 이라클리오스는 모든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성십자가 등의 성유물을 가져와 한니발스키피오 이후 가장 대담하고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칭송받으며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 만약 그가 이쯤에서 죽었다면,
  1.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던 폭군을 내쫓고,
  2. 멸망 직전의 나라를 구원하였으며,
  3. 제국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최대의 적을 멸망직전으로 몰아넣어 데꿀멍 모드로 만들었고,
  4. 최고 성유물 성십자가를 되찾은,
  5. 그리고 역대 황제들중 4명만 받은 대제의 칭호를 얻을수 있었을거다
한마디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그야말로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나란히 평가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오래 살았고 거기에 제국의 변방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새로운 세력'''이 태동하고 있었다.

7. 말년: 새로운 전쟁


이슬람 팽창 문서 참고.

잘있거라, 시리아여. 그대에게 기나긴 작별 인사를 고한다. 나의 사랑하는 속주여. 너의 아름다움은 이제 이교도의 수중에 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으라.[13]

638년의 헤라클리우스, 시리아를 떠나며

625년까지만 해도 이슬람 제국은 1,000명이 싸웠다 하면 300명이 도망칠 정도의 오합지졸이었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 힘들여 수복했던 영토 중 상당 부분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앞세운 이슬람의 공세에 모두 빼앗기고 만다. 지금까지 싸웠다 하면 이겼던 황제였지만 본인이 노쇠와 병마 때문에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 못했고, 휘하의 동로마 장군들은 숫적 우세를 가지고도 할리드에게서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한 것이 참으로 제국에 큰 불운이었다. 또한 종교적 갈등도 컸다. 시리아에 우세하던 단성론은 한세기 이상 로마 당국에게 차별을 받다가 6세기 초엽 약 20년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종교적 관용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의 재정복과 함께 칼케돈 주의가 재차 강요되자 단성론 신자들은 분노한 것이다. 이는 페르시아처럼 저항만 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자유를 약속한 이슬람에게 현지인들이 무관심 혹은 환영의 자세를 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엄청난 세금을 과세한 동로마에 비해 이슬람의 지즈야가 덜 가혹했던 점도 있다.
이렇게 온갖 패배를 당하고 백성들로부터는 조카딸과 결혼해서 신의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온갖 비아냥을 들었으며 각종 병마에 시달린 나머지[14] 폭이 좁은 곳은 750m밖에 되지 않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때조차 별별 이상한 방법을 동원해서 겨우 건넜다.[15] 또 대관식을 겨우 끝낸 다음 640년에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공격당했다는 소식과 641년에는 새로운 로마 교황 요한 4세가 단의론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실감에 빠져 죽고 만다. 거기다가 그는 죽으면서 저서 진술의 내용을 부정하며 "모든 게 세르기우스의 거짓말"이라는 단의론을 인정하는 말을 하고 죽는다. 그의 마지막마저 누구나도 알 만한 뻔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죽고 나서도 3개월 뒤에 그의 계승자였던 장남 콘스탄티누스 3세의 명령에 따라 석관을 열고 함께 매장된 보석 제관을 벗겨내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비록 5대 대교구 중 3곳인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아르메니아 등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동방의 모든 땅을 다 잃었지만 이라클리오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 효과를 본 전략을 다시 가동하여 제국에 생존할 수 있는 기회와 역량을 부여했다. 아랍 제국은 제국에게 그렇게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국의 핵심 야전군 다섯 중 그 어느 야전군도 제대로 궤멸시키질 못했다. 아바르와 슬라브족이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며 일리리쿰 야전군 자체를 골로 보내버린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는 놀라운 결과며, 이는 이라클리오스가 어느 순간부터 '''영토는 잃어도 군대만은 보존한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방어적 전략으로만 일관한 데 이유가 크다. [16]

8. 평가


군관구제와 둔전병제를 최초로 실시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의 군대와 행정을 개편하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등 제국을 민심에 맞게 변화시켰다. 열강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상태였던 동로마 제국이 그가 창안하고 정착한 군사·행정조직 덕분으로 이후 800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개인적인 무력도 상당하고[17] 결단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신의 필요를 종교적 대의로 오묘하게 포장하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집안 관리는 못 했는데, 죽을 때 첫째 아내 에우도키아의 소생인 장남 이라클리오스 콘스탄티노스(당시 29세)에게, 이복동생이자 5촌 조카(...)[18]이라클로나스(당시 15세)를 부제 내지는 공동황제로 삼을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동양권의 사극에서 신물나게 나오는 그림이지만 이러면 당연히 사후 개싸움이 난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19] 더군다나 여기는 조카딸과의 근친혼이라는 출생의 비밀 효과가 추가로 덧붙는다.
게다가 황제의 친정은 다 죽어가는 제국을 하드캐리할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만큼 황제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어 이후의 대처에 어려움을 겪게 했다.
이슬람 쪽에서는 비록 적이었지만 평가가 의외로 긍정적인 편이었는데, 쿠란에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언젠가 이길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말년에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카더라는 전설도 있었을 정도. 그리고 진짜로 페르시아는 7세기에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했으며 로마 제국은 15세기까지 존속되었다.


8.1. 공용어 전환 조치에 대하여


제국의 공용어를 그리스어로 바꾼 조치가 이상할 정도로 과대 평가되어 있으며, 이런 오해는 대부분의 한국 서적[20]에서 되풀이하고 문제 많은 로마인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다.
본디 공화정 말기부터 서부에서는 라틴어, 동부에서는 그리스어가 공용어였다. 다만 군대에서만은 라틴어를 썼으나, 이라클리오스는 이를 그리스어로 바꾸었을 뿐이다. 라틴어를 공공장소에서 못쓰게 했다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면서 공문서와 군대에서 라틴어를 사용했던 것이 당시 상황에서는 행정력의 쓸데없는 낭비였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일원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라틴어 사용자가 이 때문에 사라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오해. 제국에서 라틴어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이 조치 때문이 아니고, 7세기의 위기를 거치며 교육에 쓸 여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마 제국 전체의 유일한 공용어'란 이미지는 로마사를 잘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오해인데, 때문에 이라클리오스가 그리스어로 바꾸면서 '라틴어의 로마제국'이 아닌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의 동로마 제국'으로 바뀌어 이전의 로마 제국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이런 대중이 받았기에 억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은 라틴어를 쓰는 라틴 민족의 국가가 아닌데 다른 나라 역사도 한국사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왕왕 오해하게 된다. 또한 당시 제국에서 라틴어를 썼다고 꼭 인종적으로 라틴인이 아니었듯이, 그리스어를 썼다고 해서 꼭 그리스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제국의 영토가 옛 전성기에서 동쪽 절반으로 줄어든 지 이미 여러 세기가 지났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오히려 이런 조치는 너무 늦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에도 법률이나 군사 쪽에서는 라틴어의 잔재가 강력하게 남게 된다.
황제의 공식 직함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서 바실레우스로 바뀌게 된 건 이라클리오스 때부터지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이 완전히 폐기된 건 아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처음부터 제국 동방에서는 바실레우스로 불렸다. 자세한 내용은 바실레우스 항목 참고.

9. 창작물에서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역대 동로마 제국 소유 목록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범한 능력치지만 무력은 높은 편이고 최초의 십자군이라는 의견이 있는 것처럼 십자군 트레잇을 가진 최초의 인물. 죽을 때 기준 능력치지만 살찐을 포함한 나쁜 트레잇들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력이 높은 이유는 페르시아 원정 당시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직접 페르시아의 장군 라자테스와 일기토를 벌이기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 외에도 이라클리오스의 무력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위에 언급된 아다나에서의 진삼국무쌍이다. 625년 아다나 인근의 사루스 강에서 도하하던 동로마군이 샤흐르바라즈의 매복에 걸려 전위부대가 섬멸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라클리오스가 용맹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하여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동로마군은 위기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를 본 적장 샤흐르바라즈는 이라클리오스의 용맹에 감탄하며, 동로마인 배신자에게 "너희 황제를 봐라. 쇠로 된 모루처럼 화살과 창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라는 말을 건넸다고 전해진다.
소설 비잔티움의 첩자의 세계관에서는 무함마드가 정교회의 주교가 되는지라 이슬람교가 탄생하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은 각각 동서의 초강대국으로 냉전을 벌인다. 이슬람에게 영토를 털리지 않았으므로 이라클리오스는 제국을 중흥시킨 황제로 칭송받으며 죽은 후 시성된다.
[1] 당대에 쓰인 중세 그리스어 발음 기준이다. 코이네 그리스어 기준으로 읽으면 플라비오스 헤라클리오스. 그리고 잘 알려져 있기에 눈치챘겠지만, 밑에서 후술하듯 이 시기부터 그리스어가 공식화되므로, 이 황제부터는 소개를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로 먼저 한다.[2] 고전 라틴어 발음으로는 헤라클리우스로, 당대에 통용되었을 대중 라틴어 발음으로는 에라클리우스라 읽는다. 사실 대중 라틴어의 H는 지역별로 발음 차이가 존재하는데, 독어권에서는 ㅎ로 발음하고 이탈리아어와 에스파냐어권에서는 ㅇ로 발음하는 편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발음이 지역상 더 알맞다고 보아 에라클리우스로 하였다(같은 원리로 히에로니모스의 대중 라틴어 발음은 이에로니무스 혹은 예로니무스이다).[3] 원문에 그리스인으로 되어 있다. 동로마를 언급할 때는 이런 경우가 많다. 분명히 처음엔 '로마'로 써 있는 것이 번역을 거치며(때로는 2번 이상의 번역, 즉 중역. 예를 들면 원어 → 영어 → 한국어) 나름의 의역이 들어가서 어느새 '비잔티움'이나 '그리스'로 바뀌어 있는 것이 많다. 이 군주 간의 편지 내용을 직접 실어주는 여러 영어권 책들에서는 모두 'Have I not destroyed the '''Greeks'''?'로만 나오고, \''''Romans'''?'로는 하나도 안 나온다. 사실 페르시아쪽 관점에서는 트라키아,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아나톨리아 서부 같은 동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와는 로마 이전의 도시국가와 헬레니즘 시절부터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으니만큼,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라는 명칭이 더 익숙할 수도 있다.[4] 이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민족주의 사관으로만 잘못 이해하면,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일 경우 그리스인들은 무려 마리우스술라 시대 이래로 19세기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보편 제국이었기에 그 제국이 그리스어를 쓰든 라틴어를 쓰든 구성원에 더 이상 이탈리아인이 있든 없든 별로 큰 문제가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힘겹게 독립한 그리스인들 입장에선 약간 아닐 수도 있다.[5] 유스티니아누스 재정복 이후로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레반트의 주요도시들이 함락되는 61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전쟁을 피로스의 승리로 끝맺어 전쟁 전의 땅을 되찾은 후 (이슬람에게 얼마 안 있어 뺏기기 시작하지만) 로마는 現 스페인과 프랑스 쪽의 해안선을 제외한 (보통 좁은 의미의 지중해에서는 빠지는 흑해를 제외하면) 지중해의 모든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現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과 現 프랑스의 프랑크 왕국의 해군력은 로마에 맞서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교황령의 독립 및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대관 시점에서 백 년도 더 전이라, 느슨하게나마 게르만 왕국을 포함한 전체 기독교권의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해서 서고트나 프랑크가 로마와 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해전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서고트는 로마가 페르시아와 한창 전쟁중이었던 624년, 즉 바로 이라클리오스 당대에 現 스페인 동남부 해안가의 모든 로마령을 탈환하고서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지만(즉 로마 상대로 교전을 걸어서 영토를 뺏었지만), 예전 반달처럼 배 타고 아프리카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한 적이 없다.[6] 공식석상에서의 그리스어의 공식화 및 전면화, 고대 도시 문화의 쇠퇴, 주요도시 및 해안가의 요새화, 민정-군정이 분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3단계 지방행정체제(대관구-관구-속주)에서 민정-군정이 일체화된 테마 제도로의 변화 등등.[7] 총독부나 그 영토는 Exarchate라고 한다.[8] 오늘날 이탈리아 로마의 대표적인 유적이자 관광지인 '포로 로마노'에는 포카스가 세운 기념 원주가 남아 있는데, 이는 로마 황제가 포로 로마노에 세운 마지막 기념물이다.[9] 앞서 말한 귀족층, 즉 원로원 의원들과 미리 결탁하여, 편법이지만 권위를 실어주기 위해 아직 이라클리오스가 카르타고에서 608년 출발하기 전에 원로원 의원들이 원격으로(...) 집정관직을 수여했다. 또한 포카스를 폐위시킨 것도 원로원이고, 그가 교회에 숨었을 때 원로원 의원 두 명이 따라붙어 체포해서 이라클리오스에게 신병을 넘겼다고 한다.[10] Geoffrey Regan 저 'First Crusader: Byzantium's Holy Wars'라는 책으로서, 책 앞 표지의 전투삽화가 다름아닌 이라클리오스 시절 페르시아와의 전투로 잘 알려진 사진이다.[11]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복동생이라고 한다.[12] 전해지는 바로는 이 전투에서 이라클리오스는 페르시아 장군 라자테스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했다고 한다.[13] 뒤에 '정말 아름다운 적들의 땅이 되겠구나' 부분이 덧붙여져 있다.[14]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한다.[15] 다리를 만들었다는 설 또는 배를 꾸며서 육지처럼 해놨다는 설이 있다.[16] 결국은 사산 제국에게 빼앗긴 것을 힘들게 되찾고 역습을 가했다가 새로운 세력에게 다시 빼앗긴 것[17] 황제가 일기토에서 두번 이겼다는 건 보통 깡과 자신감이 아니다. 황제의 위치정도 된다면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사릴 필요가 있다. [18] 이라클리우스가 조카딸인 마르티나와 두 번째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라클리오스의 이복동생인 테오도로스가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강행했고, 나중에 테오도로스에게 이슬람 원정을 맡겼는데 그게 알려져 있다시피 실패해서 패전책임을 묻고 수감시킨 후 그 사이의 아들인 이라클로나스한테 감옥 앞에 가서 조롱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19]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독살 의혹도 강하게 제기된다.[20] 이상하게도 번역자들이 일껏 번역 잘해놓곤 후기에다가 이상한 자기 견해를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