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패터슨
1. 개요
Clair Cameron Patterson, 1922.6.2 ~ 1995.12.5
미국의 화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세계 과학 역사와 현대사에 중대한 업적을 하나씩 남겼다. '클레어'라는 이름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남성이다[1] .
2. 생애
2.1. 화학자의 꿈, 그리고 반려자와의 만남
1922년 6월 2일 미국 아이오와 주의 미첼빌에서 태어난 클레어는 어려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많아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가족들의 지원을 아낌없이 받아[2] 1939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 아이오와 주의 그리넬 대학에 진학, 그 곳에서 같은 화학자 지망생이자 미래의 반려자 로나 맥클레어리(Lorna McCleary, 애칭 로리(Laurie))를 만나게 된다. 그리넬 대학에서 화학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로나와 함께 아이오와 대학교에 진학하여 분자분광학 석사학위를 얻는다. 이후 로나와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으며, 시카고 대학교 진학 후에는 그 곳에서 질량분석법을 익혔으며, 거주지도 테네시 주의 오크리지로 옮긴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클레어는 지질학자 해리슨 브라운(Harrison Brown)의 지도 하에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한다.[3] 그 과정에서 로나와 결혼, 슬하에 아이를 4명 낳았다.
2.2. 지구의 나이를 처음으로 밝혀내다
1948년, 클레어의 지도 교수인 해리슨 브라운이 화성암에서 납 동위체를 뽑아내는 방법을 개발해 내고, 이를 토대로 운석으로부터 우라늄과 납의 농도를 비교하는 일을 패터슨, 그리고 같은 대학원생이었던 조지 틸턴(George Tilton)[4] 에게 졸업 과제로 내어준다. 이 과제를 잘만 성공하면 단순히 둘의 농도 차이를 비교하는 것을 넘어 아예 '''지구의 나이까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이들은[5] 즉시 실험에 착수하였다.[6]
그런데 여기서 클레어의 인생 전체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미친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틸턴이 조사한 운석 알갱이 속 우라늄 농도는 수 차례 측정해도 똑같은 수치가 나왔는데, 패터슨이 담당한 '''납 농도만 계속 측정 때마다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몇 번을 실험해 봐도 결과가 변하지 않자, 패터슨은 틸턴과 자신이 현재 실험을 위해 사용 중인 실험실에서 이전에 납 실험을 한 것을 기억해 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 실험실 내부의 납을 없애려고 미친 듯이 실험실을 청소하고 소독했다. '''20년 넘도록 클레어 패터슨을 시달리게 만든 납과의 전쟁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랬는데도 측정 결과는 계속 뒤죽박죽이었던 터라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실험실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이를 전해듣지 않았을 해리슨 브라운이 아니었고, 1953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로 전근을 간 후에 패터슨을 불렀다. 그 곳이라면 실험실을 새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그래서 패터슨의 염원대로 칼텍에서 특수 실험실을 제작, '''세계 최초의 초청정실'''을 만들어 패터슨은 그 곳에서 실험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정확한 납 수치 측정에 성공, 마지막으로 아르곤 국립 연구소에 가서 운석 알갱이를 당시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던 질량 분석기에 넣고 이온화해 성분을 측정한 끝에 '''지구의 나이가 45억 5000만 년(오차 7000만년)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말았다.'''[7] 이 결과는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열린 회의에서 발표되었으며, 클레어 패터슨은 이렇게 세계 과학사에 중대한 업적을 하나 남기게 된다.
2.3. 납과의 전쟁
지구의 나이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납을 제거하는 버릇이 생긴 패터슨은 그 이후로도 납에 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 마이크로그램 단위의 납을 보통의 암석으로 단리하고 동위체의 조성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서양과 태평양, 북극 등지에서 퇴적물을 채취해 납 농도를 비교하였는데, 퇴적물 속 납 농도에 비해 당시(1950~1960년대) 환경 중에 인위적으로 배출한 납의 양이 무려 '''80배'''에 달하며 납의 지구화학적 사이클이 현저하게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샘플도 심해수, 그린란드의 얼음 등으로 확장되었고, 표층에서 채취한 납 농도와 심층에서 채취한 납 농도를 비교했는데 나머지 금속 원소들을 제외하고도 3~10배나 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확인되어, 자연적인 납 농도 증가 사이클의 2배를 훨씬 웃도는 이 현상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후 실험에 사용한 공백에 보여진 혼입물로 초점을 돌렸는데, 그린란드에서 얻은 빙상 코어로부터 테트라에닐납이 연료로 사용되어 위험해질 때까지 계속 증대해온 사실도 알아내고, 실험 결과에 납이 계속 혼입되는 원인도 '''제조 과정에서 납이 각종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과 대기 중의 납 오염'''이라는 것까지 특별 정의한다. 유연휘발유로부터 결정적인 힌트를 얻기도 했고. 공중위생상 엄청나게 중대한 발견이었기에, 패터슨은 남은 생을 납 제거에 전부 쏟아붓겠다 다짐한다.
패터슨은 이를 정리하여 1965년에 논문을 발표하고, 납 사용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20년 동안 '''납을 이용해 재미를 보던 업계와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기업가들은 즉시 지원을 끊고, 대학에 패터슨 퇴출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기업가 편에 서서 납에 문제가 없다고 대중들을 설득했던 로버트 키호(Robert A. Kehoe) 같은 납 관련 권위자와도 정면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에틸 사의 로비 활동과 기업가 토머스 미즐리의 유산(테트라에틸납, 클로로플루오로카본 사용) 같은 납 지지 기업들에 거세게 저항했다.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책에서 당시 납 관련 기업에 대한 강한 비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까지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려 '''정치인들이 패터슨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패터슨과 키호를 대상으로 번갈아 진행한 청문회에서 패터슨의 주장이 많은 지지를 얻게 되면서, 1973년에 환경보전기관에서 납 사용 절감을 선언하고, 미국 전역의 모든 휘발유에서 납 사용량을 단계적으로 절감해 1986년에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미국인의 혈중 납 농도는 1990년대 후반에 80%까지 줄어들었다.
이후로도 식료품에 사용되는 납 성분 절감에도 앞장서고, 78쪽에 달하는 납 사용 규제 의견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 의견서는 현재 대부분의 내용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시행 중이다.
이로써 현대사, 특히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업적을 남긴 클레어 패터슨은 1995년에 캘리포니아 시랜치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3세.
3. 기타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20세기의 숨겨진 영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만약 클레어 패터슨이 없었다면 지구의 나이가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무엇보다 '''인류의 혈중 납 농도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높았을 것이며 인류가 자멸하는 길을 열게 되었을 수도 있다.'''[8]
논문 발표 시 작성자 명단에 항상 실험에 같이 참여했던 자신의 제자를 첫 번째 순서로 놓고 자신은 두 번째 순서로 기술했다. 제자들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지독한 결벽증 환자였다. 원인은 본인의 최대 업적들인 납 중독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와,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연구를 할 때의 일때문이었다. 일평생을 납과 싸운 사람답게, 지구의 나이를 측정할 때도 대기 중의 납 성분때문에 측정 결과에 오류가 날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연구실을 허구헌 날 물청소를 하고 절대로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후에 납 중독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본 패터슨은 본인도 납에 오염되어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시달려서, 자기 자녀들을 안아주는 일도 꺼렸을 정도다. 오죽하면, 지독한 납 공포증과 이로 인한 결벽증에 시달리던 그는, 정작 이 때문에 그의 연구를 방해하려는 석유 회사들의 협박에는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았다[9] .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2014년 리부트작의 7화가 이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다큐를 마무리하면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7화를 마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환경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층은 여전히 그들의 과학자를 고용해 논점을 흐리려고 하고 있지만, 자연은 결코 속지 않을 것입니다."'''[10]
[1] 20세기 초중반까지 '클레어'라는 이름은 남자 이름으로 간주되었다. 이 이름을 여자 이름으로 주로 쓰게 된 건 빨라도 6,70년대 이후의 일이다.[2] 아버지가 우편 배달부였고, 어머니는 스쿨 보드의 일원이었다.[3] 그 동안 로나는 적외 분광 연구에 참여한다.[4] 조지 틸턴 또한 이 실험을 거치면서 우라늄 전문 지질화학자로 거듭나게 된다.[5]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2014 리부트작 7화에서는 해리슨 브라운이 언급하는 것으로 소개되었다.[6] 덧붙여 이 때 사용한 운석은 미국 애리조나 주의 베링거 크레이터를 만든 그 운석의 파편.[7] 덧붙여 이렇게 밝혀낸 지구의 나이를 최초로 전해 들은 사람은 클레어 패터슨의 어머니.[8] 실제로 납은 '''로마 제국 멸망의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9] 어차피 정치인들을 포함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그의 뒤를 봐주고 있어서, 그깟 석유 재벌들은 재벌 '''따위'''로 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 준 납 중독 연구에 대한 비용은 미국 정부와 각 군의 관계자들이 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10] 즉, 환경문제에 대해 경고하는 패터슨과 기득권층에 고용된 키호를 비교하며 패터슨의 업적을 높이 세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