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E.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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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검사 출신 정치가. 공화당 소속으로 1944년과 1948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다.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거물이지만 현재에 와선 역전패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안습한 인물.
2. 생애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인물이지만 태어나고 자란 곳은 미시간. 성인이 된 뒤 뉴욕 검찰이 되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기록을 세운다.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후보 경선에 출마하지만 민주당 탈당파 출신의 웬델 윌키에게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의 공식 지명을 받은 윌키도 루스벨트의 3선을 막지 못하고 패배한다. 하지만 이 경선 패배를 딛고 1942년에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다시 한번 도전해 드디어 당선된다. 뉴욕은 다름아닌 루스벨트 대통령의 홈 스테이트(지역 기반)이었으니 민주당으로선 그야말로 한방 먹은 셈.
1944년, 이번에는 당의 공식 지명을 받았지만 상대는 역사적인 4선에 도전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결국 패배했지만 득표율 45%를 넘기는 등 루스벨트를 상대로 4번의 대선에 나선 공화당 후보[1] 중 가장 선방했다. 다만 선거 과정에서 루스벨트가 진주만 공습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음모론을 내세운게 흠.
4년전 활약으로 높아진 이름값을 바탕으로 1948년 루즈벨트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맞서 다시 한번 대선에 도전하는데... 결과는 안습. 여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재선에 성공한다. 미국 대선사에 남을 희대의 역전패를 당한 것.
1952년에는 본인은 출마하지 않고 대신 비슷한 온건파 성향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밀어줬고,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간접적으로 패배의 한을 푼다. 1960년엔 역시 당내 온건파인 리처드 닉슨을 공식 지지했으나 이번에는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하며 빛이 바랐다.
이후 닉슨이 성공적으로 재기해서 대통령이 되는걸 보고 1971년 사망했다.
3. 평가
공화당 내 온건주의 리버럴 세력의 대표격인 인물로 1940년대~1950년대 공화당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민주당 못지 않게 사회 복지 확대나 인종 차별 철폐에도 기여했다. 두 차례의 패배 후에도 한때 세번째 도전이 언급될만큼 공화당 내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친 나름 시대의 거물이었으나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배리 골드워터, 로널드 레이건 등이 전면에 등장해 공화당이 본격적으로 보수화되면서 현재는 당내에서 온당한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