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골드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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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배리 골드워터. 이 당시에 몇 안 되는 컬러 사진이다.
1. 개요
2. 생애
3. 활동 노선
4. 기타


1. 개요


Barry Morris Goldwater
1909년 1월 2일 - 1998년 5월 29일
미국의 정치가. 공화당 소속으로 1964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으며, 현대에는 공화당의 '''강경 보수화'''의 시초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2. 생애


1952년 애리조나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상원 원내대표였던 어니스트 맥팔란드를 이기는 이변을 일으키며 당선된다. 당대 공화당의 주류를 형성했던 온건 보수 계열과는 거리가 있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실제 같은 공화당 소속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대립했으며 인종통합 정책과 복지 정책 예산 확대를 비판하며 같은 시기 이름값을 높였다.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난전 끝에 넬슨 록펠러 등을 꺽고 대선후보로 결정된다. 이때 지지연설을 해서 유명세를 얻은게 그 유명한 로널드 레이건. 그러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아 그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는 상황이었던데다가, 현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의 위대한 사회 구상이 미국 국민들의 호응을 얻어 전반적으로 선거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골드워터는 아예 소형 핵무기를 남베트남 국경에서 사용하자고 주장하고, 크렘린의 남자(=흐루쇼프) 방에 핵무기를 떨어뜨리자는 식[1]의 발언을 일삼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넘긴지 2년밖에 안지난 시점에서 이러한 발언은 '''그냥 선거를 안하고 말겠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고''', 결국 당시 공화당 주류였던 온건파의 반발을 사 당의 적극적인 협조를 구하기 어려워 진데다가, 이를 두고 존슨 대통령이 그가 당선되면 핵전쟁이 일어날거라고 주장한 "데이지 걸" 광고를 내보내면서 결국 득표율 22.6%p, 선거인단 434명 차 역사적 참패를 당한다. 다만 이때 매우 오랜기간 굳건한 민주당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조지아를 비롯한 남부 5개주에서 골드워터가 승리하는 소소한 이변이 있었는데, 이것이 1968년 이후 이어진 리처드 닉슨과 공화당의 남부 전략의 정치적 기반이 된다.
대선 후에도 꾸준히 공화당 원로로 활동했고,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엔 닉슨 대통령에게 강력히 하야를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정계 활동 막바지인 1986년에는 민주당의 윌리엄 니콜스 하원의원과 미군 지휘체계의 3군 합동성을 강화하는 국방부 개편 법안을 발의, 통과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2] 이는 '골드워터-니콜스 법'으로 불리며, 오늘날 미국의 군 지휘체계 기초를 마련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3. 활동 노선


대외적으로는 강경한 냉전 대결론적 성향이었지만, 국내 현안에서는 자유주의, 개방적 면모를 보였다. 예를 들어서 흑인 인종차별에 '''매우 반대'''했고, 낙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달린 것이라며 찬성했고, 동성애자의 군 입대에 찬성했다.[3] 그가 정계에서 활동했던 20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매우 드문 사례다. 이는 그의 보수주의 사상이 자연법을 근거로 개인의 자유는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자유지상주의를 토대로 성립된 것이며, 이를 침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강경하게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평생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는 큰정부, 독재정권, 공산주의에 강경하게 반대했으며, 자유의 적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강경한 매파적 입장은 이러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컬러방송이 일반화 되었을때 활동했던 정치인이었지만 배리 골드워터는 컬러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리 골드워터의 컬러 사진 수는 린든 B. 존슨의 컬러 사진 수에 비해 매우 적다. 컬러 사진을 싫어했던 이유는 "흑백 사진이야말로 인종에 관계 없이 사람의 모습 그대로 평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정치계에서는 배리 골드워터의 흑백사진 선호 행보에 대해, 정치를 하면서 프레임의 중요성을 상당히 빨리 깨달았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결국 본인의 계속된 강경 발언은 린든 존슨이 그를 "전쟁광"으로 몰아붙이는 데 이용되었고, 1964년 대선의 패배 요인이 되었다.
비록 본인은 대선에서 참패했지만 이후, 로널드 레이건부시를 거치며 공화당 주류가 되는 신보수주의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 인물이다. 배리 골드워터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현재 미국 보수주의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 티파티, 자유지상주의, 자유의지주의의 측면들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저들 중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부분으로서, 그의 사상은 현대 미국 공화당, 미국 보수주의의 원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기타


대선 과정에서 배리 골드워터는 진짜 핵전쟁을 벌일 수도 있는 돌아이로 비쳤기에, 여러 정신과 의사들이 골드워터를 정신분석한 책을 펴낼 정도였다. 나중에 골드워터는 이 책을 출판한 사람을 고소했고, 이 때문에 이후 미국 정신의학회에서는 "선거에 나선 사람의 정신분석은 하지 않는다"는 '골드워터 규율'을 만들었다. 이후 52년간 이 규율이 유지되다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다시 한번 정신 분석을 시도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다혈질의 급한 성격으로 수많은 구설수에 오른 인물이었지만, 의외로 매우 고상하고 품위있는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었음에도 "배리는 진정한 미국인으로서 난 그같은 인물을 결코 본 적이 없다. 그는 위대한 애국자이자 인간적으로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고 평하며 추모했다.
[1] 다만 진지한 발언이 아니라 농담조였다고.[2] 그리고 골드워터가 은퇴하고 그의 지역구에서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존 매케인.[3] 그의 손자가 게이이다.